동네의사의 환자일기
2023.12.8 ~ 23
만성통증 증후군 환자에게 쉬어가는 날이 온다.
그날은 충분히 쉬면서 안식해야 하는 날이다.
안타깝게도 내 몸에 통증이 잦아들었지만 내 생각이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
생각이 오래된 기억에 물들어 내 몸에 찾아온 비교적 평화로운 순간을 놓쳐버리곤 한다.
그 순간을 놓쳐버리면 자신이 늘 고통에 시달리고 있으며 이 고통이 끝나는 순간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역설적이게도 늘 고통이 끝나는 그 순간을 기대하면서도 말이다.
이런 안타까운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관찰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언제나 통증이 제 자리에 머무르며 끝도 없이 괴롭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르막도 있지만 내리막도 있고 때로는 평지도 있다. 물론, 보통 사람들처럼 완전히 통증에서 자유롭지는 않지만 언제나 사람은 비교의 동물이라 그전보다 좀 더 괜찮은 날이 있기 마련이다. 이럴 때 좀 가벼운 마음으로 순간을 즐길 수 있다면 만성통증이라 하더라도 조금은 견딜만한 것이다.
먹고살기 위해 노동이 숙명처럼 주어진 사회에서 반드시 쉬어가는 날을 정하여 안식일을 준 것은 정말 신의 지혜가 아닐 수 없다.
혹자는 유대인들이 지금껏 안식일을 지키며 살아온 것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인을 지켜온 것이다.
그렇다.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에게는 없는 독특한 안식일 개념을 가지고 일주일에 한 번은 온전한 휴식을 취하는 것을 법으로 정해두고 목숨을 걸고 그날을 지켰다. 예수님이 오기까지는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그렇게 열심히 안식일을 지켰다. 로마에 의해 멸망당한 뒤 세계에 뿔뿔이 흩어진 뒤에도 그들의 풍습은 변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이어져 온다.
그 일벌레처럼 열심히 살아가는 유대인들을 지켜낸 것은 정기적으로 온전한 쉼. 그것이 아니었을까?
만성통증 증후군 환자에게도 그런 날이 온다면 온전히 쉴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들도 살아갈 용기가 생긴다.
OOO님)
안녕하세요. 정신과에서 넘어졌는데요... 병명을 물으셔서요.
제가 섬유 근육통이나 하지 불안은 아니지요?
만성통증 증후군인거지요?
원장님이 근골격계 문제는 아니라고 하셨던 것 같아서요.
문항 작성 중에 톡 드려요.
귀찮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ㅠㅠ
나)
만성통증 증후군인데
보통은 섬유근육통이라고 해야 더 잘 이해할 거예요.
OOO님)
맞아요 만성통증
그건 통증 보는 선생님이 아실 거라고 잘 모르시더라고요.
그래도 (정신과 선생님이) 무기력이 좋아지면 넘어지는 것도 줄어들 거라고 치료 잘 받으라셨어요.
약물이 무기력을 좋아지게 한다고.
감사합니다...
실제로 의사들 가운데도 '만성통증 증후군'이라는 진단명이 있는 줄 조차 모르는 분들이 많이 있다.
3개월 이상 같은 통증이 지속되면 그 원인은 둘째로 치고 3개월 이상 같은 증상이 지속된다는 것 자체가 병명이 되는 것이다.
대체로 의사들은 특정한 질병이 발생하면 그 원인을 찾는 것이 기본적인 속성이다. 모두들 그렇게 배우고 대체로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러나 만성통증 증후군은 환자에게 장기적으로 해롭지만 않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통증 그 자체를 줄여야만 한다. 물론, 쉽사리 마약성 진통제를 쓴다든가 하는 일은 피해야 하지만 특별히 해가 없다면 어떤 방법이라도 써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통증치료에 웃음치료도 사용할 수 있다. 폭소를 터뜨리거나 미소를 지으면 통증이 줄어들며 이것은 전혀 환자의 건강에 해를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의사가 진료실에서 환자에게 농담이나 하고 있을 것인가?
정신없이 환자를 보고 다음 환자를 빨리 봐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환자는 언제나 빨리 해치워야 하는 일거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태도로는 절대 만성통증 환자의 쾌유를 기대할 수 없다. 대한민국 의료시스템은 무척 효율적이기는 하지만 이 지점에서는 절망적일 만큼 쓸모가 없다.
나는 이런 절망적인 시스템 속에서 OOO님과 같은 고통에 시달리는 분들을 치료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넋을 놓고 시스템 탓만을 할 수는 없다.
다행히 OOO님이 다니는 병원의 신경정신과 선생님이 꽤 자상하게 진찰해 주시는 것 같다. 무기력감이 줄면 넘어지는 증상도 줄어들 것이라는 그분의 의견에 나도 동의한다.
우울증은 쉽사리 자살사고와 연관이 되지만 무기력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분들이 많다. 우울증의 가장 큰 증상 중 하나가 무기력감인데 그것을 약물로 좀 도움을 받을 것이라고 설명해 주고 계신 것이다. 당연히 환자분의 심리 기저에는 우울증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OOO님)
원장님 안녕하세요.
어제 급 무릎통증 (추측: 넘어짐)으로 병원 갔는데 반월상 연골판? 안쪽 부분 파열이래요.
심한 건 아니라 하구요.
꼬리뼈는 MRI 찍어보래요.
내일 OFF이시죠? 목요일 내원하겠습니다.
나)
저런, 많이 붓지는 않았나요?
내일 진료하면서 자세히 볼게요.
OOO님)
네. 전혀요 ^^
내일 뵙겠습니다.
OOO님)
안녕하세요.
진심 아주 많이 행복해졌어요.
원장님은 의사 가운 벗으시면 예수님이나 수녀님? 혹은 부처님 같아요.
치기 어린 마음에 원장님 괴롭혀서? 다시금 죄송해요.
욕을 하셔도 시원찮을 판에 사랑을 주시네요.
분노는 스스로를 약하다고 증명하는 것 같아요.
원장님 글씨는 볼 때마다 경이롭습니다. 배우고 싶어요.
많이 존경해요.
감사합니다.
나)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셨다니 다행^^
OOO님)
원장님 하실 만큼 넘치게 해 주신 거 알아요.
행진하세요.
크리스마스가 다가와서 오랫동안 치료해 온 환자분들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썼다.
나는 어릴 적 교회에서 주보를 만들 때 글씨를 쓰던 버릇이 있어서 나름 글씨체가 좀 다듬어진 편이고 여러 가지의 글씨체를 구사할 수 있다. 때로는 컴퓨터 글씨처럼, 때로는 붓글씨처럼 쓰기도 하는데 최근에는 좋은 붓펜들이 많아서 이때 붓펜으로 OOO님에게 카드를 썼다. 그랬더니 카드를 받고 많이 행복한 느낌을 가진 것 같다.
나에게는 이분에게 카드를 쓰는 것도 치료의 일환이다. 약목록이 적힌 처방전만 환자를 낫게 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처방전보다 직접 쓴 카드 한 장이 더 효과가 있을 때도 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바로 전날이 토요일이었다.
성탄절의 기분을 내기 위해 우리 병원 식구들은 성탄절이 되면 머리에 루돌프 머리띠를 하고 하루를 시작한다.
올해는 성탄선물로 핫팩을 준비했다.
나는 이 날이 늘 기다려진다.
빨간 산타복을 입고 환자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순간이 언제나 행복하다.
어릴 적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 평소에는 선물 같은 것은 꿈도 꾸기 어려웠다.
성탄절이 되어야 자그마한 선물 하나라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그만큼 산타가 그리웠다.
그러나 산타는 언제나 내가 원하는 선물을 주지는 않았다.
전공의 1년 차 시절, '그렇다면 내가 산타가 되는 편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입원해 있던 환자들에게 산타복을 입고 회진하면서 새해의 소망을 담아 카드를 건네며 시작한 것이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다.
어떤 환자에게는 내년에는 지팡이 없이 걸어보자, 어떤 환자에게는 콧줄을 빼고 식사를 해보자... 하면서 성탄카드를 쓰곤 했었다.
환자에게는 산타가 필요하다.
OOO님이 크리스마스 전날에 내가 다른 분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장면을 찍어서 보내주셨다.
메리크리스마스
해피크리스마스
우리 모두에게는 산타가 필요하다.
추워지는 계절... 우리에게는 은혜가 필요하다.
은혜가 없는 삶은 혹한기에 냉수마찰하는 군대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능력이 없는 삶도 힘들지만
은혜가 없는 삶도 팍팍하기는 마찬가지다.
능력이 있으면 소유를 더 가질 수는 있겠지만
은혜가 없으면 행복을 맛볼 수는 없다.
오지 않는 산타를 기다리기 보다
내가 산타가 되는 편이 더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