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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itor 흰둥 Oct 21. 2019

#08. 불효녀의 ‘혼수 채우기’

어느덧 결혼 준비도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가장 고비가 될 줄 알았던 신혼집 구하기는 일찍이 끝이 났고, 입주를 앞두고 혼수 고르기에 바쁜 나날들이 이어졌다.


혼수(婚需): 혼인에 드는 물품
가전, 가구와 같은 신혼살림을 일컫는 단어


우리의 첫 보금자리를 위한 공간 꾸미기. 이것은 사실 드레스투어만큼 나에게 떨리는 일이었다.

자취 경력 11년 차. 이미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한 상태였지만(물론 육체적으로만) 진정한 살림은 살아보지 않은 터, 이제는 정말 나만의 살림 공간이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마냥 기뻐할 게 아니라는 걸 이때는 왜 알지 못했을까? (살림을 우습게 봤다간 큰 코 다친다.)


어쨌든 이 기간에는 엄마와 딸 사이에 잦은 다툼이 생긴다고 익히 들었었다. 취향 차이가 곧 갈등으로 이어지는 셈이다.


혼수 장만은
모녀 갈등 유발?


연륜과 노하우를 앞세운 엄마와 나만의 개성을 드러내고 싶은 딸. 사실 나도 엄마와 의견 충돌이 종종 생기지 않을까 앞서 걱정이 들었었다.

소소한 예를 들어보자면, 엄마는 깔끔하고 관리가 편리한 블라인드를 제안했지만 난 시각적 아름다움을 주는 커튼이 좋았다. 실용성도 좋지만 나만의(?) 미적 효과를 해치는 건 원치 않았다. 불편함을 감수할 자신이 있었다.

이렇듯 의견 차이는 존재했지만 다툼은 없었다. 엄마는 나에게 ‘너의 살림’이라는 무게감과 책임감을 양쪽 어깨에 얹어주며 내 선택을 적극 따라주셨다.


그래서였을까. 이 모든 게 생각보다 훨씬 더 즐거웠다. 특히 머릿속으로 3D 시뮬레이션을 그리며 가구를 선택하는 일은 묘한 행복감을 선사했다. 하나씩 구매한 물품들이 집안 곳곳에 자리를 잡아나가는 것 역시 매우 뿌듯했다.

물론 이 모든 행복의 뒷배경에는 부모님의 따스한 배려가 녹아 깃들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매번 감사함을 표하지 못했지만...


사실 부모님께 무얼 해 드리는 효녀 심청이는 되지 못했다. 시집가는 그날까지 오히려 도움만 받았을 뿐. 죄송함과 감사한 마음이 함께 공존하는 가운데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행복하게 잘 사는 모습으로 진정한 효도(?)를 실천해 보겠다고!



결혼 준비 기간 안에 ‘혼수’라는 제도는, 집 내부 채우기라는 명시적 목적이 뚜렷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부모님과 함께 교감할 수 있는 값진 순간들이 분명 존재한다.

함께 고민하고 선택을 내려야 하는 순간들이 많은 만큼 더 많은 시간을 서로 함께하며 대화를 나눌 수 있기에.

나는 특히 엄마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애틋한(?) 모녀지간이자 세상 가장 친한 친구이면서 같은 여자로서 공감대를 이뤘다.


처음 들어보는 엄마, 아빠의 러브 스토리와 신혼 초창기 이야기부터 진정한 연륜 미에서 흘러나오는 결혼 생활 팁까지.


그중에서도 엄마가 나지막이 내뱉은 “시간 참 빠르다”라는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그 시간 안에는 엄마의 젊은 시절부터 나를 낳고 기른 모든 나날들이 담겨 있다. 엄마의 마음을 완벽하게 헤아릴 수는 없어도 짧은 이 문장 안에 아쉬움과 벅차오름이 뒤섞여 있음은 잘 알 수 있었다.




이날만큼은 결혼 준비가 좋으면서도 엄마의 말처럼 빨리 흘러가는 시간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붙잡고 싶어도 붙잡히지 않는 시간 속에 나는 매 순간을 소중하게 보내고 있는 걸까. 찰나의 결혼식을 위해 과소비를 하고 있지는 않은 걸까. 준비 과정 속 부모님에게 서운한 감정을 남기진 않았을까.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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