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드윈 May 08. 2024

짧은 시 감상평, 김수환 - 우산

서로 사랑하십시오, 용서하십시오

우산(雨傘)


삶이란 우산을 펼쳤다 접었다 하는 일이요
죽음이란 우산을 더 이상 펼치지 않는 일이다

성공이란 우산을 많이 소유하는 일이요
행복이란 우산을 많이 빌려주는 일이고
불행이란 아무도 우산을 빌려주지 않는 일이다

사랑이란
한쪽 어깨가 젖는데도 하나의 우산을 둘이 함께 쓰는 것이요
이별이란
하나의 우산 속에서 빠져나와 각자의 우산을 펼치는 일이다

연인(戀人)이란
비 오는 날 우산 속 얼굴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요
부부란
비 오는 날 정류장에서
우산을 들고 기다리는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다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갈 줄 알면 인생의 멋을 아는 사람이요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가는 사람에게 우산을 내밀 줄 알면
인생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비요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건 우산이다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의 우산이 되어 줄 때
한 사람은 또 한 사람의 마른 가슴에 단비가 된다.




 지금은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님의 '우산'이라는 시입니다. 


 우연찮게 추기경님이 쓰셨던 시를 한 편 읽게 됐습니다. 이 우산이라는 시였지요. 종교인이 쓴 시 치고는, 추기경이라는 높고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었던 분이 쓴 시치고는 종교적 메타포는 찾아보기 힘든 그런 시이기도 했죠.


 시를 읽기 전엔 '시를 통해서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시를 아무리 읽어도 제가 생각했던 하느님의 무한에 가까운 사랑에 대한 이야기보단, 발에 땅을 붙이고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시어는 비와 우산입니다. 비가 긍정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사실 비가 오면 우산을 쓰더라도 옷과 신발이 젖고, 기분이 썩 좋지는 않지요. 하지만 비가 내리고, 우리는 우산을 씀으로써 비로소 시 속에서 이야기하는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비라는 세상이 비록 힘들고 아름다워 보이지 않더라도 우산이 있다면 그러한 힘든 세상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는 것, 그것을 부드럽고 따듯한 시선으로 시라는 매체로 녹여낸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시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딱 한 번 쓰입니다. 그리고 묘하게도 그 단어 이후의 시는 '우산'을 통해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에 대해 아시는 분이라면 그분이 남긴 유언을 들어본 적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용서하십시오."


 그 말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추기경님은 이 시를 통해 사랑에 대한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네요.


 예전에 한 평론가님이 사랑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생각이 납니다. 완벽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국어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너무 쉽게 쓰이고 있어서 그 빛을 잃어버려서 심심한 말이 되었다. 하지만 가끔 시인들은 기가 막히게 빛을 잃어버린 사랑이란 단어가 다시 빛날 있도록 생명을 불어넣는다."라고요.


 이 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사랑에서 그러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추기경님은 전업 시인이 아니셨기에, 평론가님이 말씀하신 그런 시인들이 쓴 시처럼 사랑을 멋들어지게 표현하신 건 아니지만


 평생을 하느님을 위해 또 그러한 하느님이 사랑하는 우리 모두를 위해 일생을 살아왔던 한 종교인의 솔직하고 따듯한 시선 역시 '사랑'이란 빛바랜 단어에 다시금 생명력을 불어넣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가 오는 어느 날. 거리를 걸었든 창가의 거리를 보았든 미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신자들을 배웅하며 보았든 어쨌든 간에 


 그분의 눈에 비친 세상과 사람이 어떻게 이토록 아름답게 보였었을까, 그분은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이었기에 이렇게 아름답게 세상과 사람을 표현할 수 있었을까,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추기경님의 유언처럼 서로 사랑하고, 또 용서할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이 만들어지길 기대하며.


 


작가의 이전글 넌 그렇게 프로로 살아라, 난 이렇게 아마추어로 살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