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간 영혼을 갈아 넣어 만든 포트폴리오, 여행에서 돌아온 날 나타나다니
글 쓰는 오늘, 2020. 3. 2.(월)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오늘로 4천 명을 넘었습니다. 지금 제가 있는 이 곳, 대구는 코로나19의 타격을 가장 심하게 받았습니다. 그래서 거의 3주째 자유롭게 외출을 못하고 있습니다. 포스텍에 공부하러 가는 것도 2주나 연기되었고요. 제 짝꿍은 취업 준비에 한창인데, 코로나19 때문에 구인하는 회사도 많지 않나 봅니다. 여행을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생각만큼 녹록지 않습니다. 오늘은 제 짝꿍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여행 가는 날 잃어버린 USB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당시에는 정말 패닉이었죠. 하지만 지나고 보니 하나의 즐거운 에피소드가 되었습니다. 취업에 너덜너덜해진 지금 이 순간도 나중엔 즐거운 에피소드가 되길 바라면서 이 글을 씁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늘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증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취업을 했다 하더라도 내가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떤 결과를 냈는지 늘 정리해야 하죠. 그렇게 모인 포트폴리오가 곧 직장에서의 나란 존재니까요.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점점 더 사라지는 지금 우리에겐 이 포트폴리오가 점점 더 중요해집니다.
32GB의 꽤나 무식하게 생긴 까만 USB는 제 짝꿍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만든 포트폴리오입니다. 사회초년생으로 갓 회사에 들어가서 겨우 1년간 만든 포트폴리오가 뭐 그렇게 대단할까 싶겠지만, 결코! 그 무게가 가볍지 않습니다. 사회초년생의 온갖 애환이 담겨있기 때문이죠.
사회초년생으로 직장에 처음 들어갈 때만 해도 출근하는 게 마냥 행복해 보였어요. 그런데 날이 가면 갈수록 조금씩 피폐해지는 게 느껴집니다. 어떤 날은 퇴근하고 집에 와서 곧장 침대에 눕더니 몇 시간이고 인스타그램만 뒤적이기도 하고, 돈을 버니까 쓴다는 듯 퇴근길에 족발을 포장해오더니 몇 점 먹지도 않고 방치해 두기도 합니다.
영혼을 갈아 넣어 만든 포트폴리오다 보니 내용이야 어떻든 만든 사람에겐 매우 소중한 자료일 겁니다. 그런데 그 USB가 여행 가는 날 아침 없어진 거죠.
우린 꽤 게으른 편입니다. 6개월의 세계 여행을 떠나는 날 아침에 짐을 싸고 있을 정도니까요. 출발을 2시간 정도 앞두고 갑자기 짝꿍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립니다.
"여기 있던 내 USB가 어디 갔지?"
분명 이 서랍에 넣었고, 중요한 USB라 빨간색 동전지갑에 넣어 놓았는데 어디 갔는지 못 찾겠다는 겁니다. 저는 포트폴리오를 모아놓은 USB가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자료가 있다는 걸 진작 알았다면, 클라우드에 업로드 해 놓았을 텐데요. (아직까지도 그 중요한 자료는 클라우드가 아닌 USB에 담겨있다는 놀라운 사실.....) 중요한 거라고 빨간 동전지갑에 넣었다니, 귀엽다고 해야할까요?
출발 전 2시간 정도를 그 작은 USB 찾겠다고 집 전체를 뒤졌습니다. 사실 제가 며칠 전 집 청소하면서 USB 하나를 본 기억은 나는데 도무지 어디 뒀는지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지금에서야 고백하지만, 그 당시에 속으로 '혹시 내가 버렸나?' 생각하면서 엄청 조마조마했더랬죠.
결국 그 USB는 못 찾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출발부터 꼬인 거죠. USB를 찾으며 집 전체를 뒤지는 내내 한숨을 쉬면서 울먹이던 짝꿍은 막상 여행길에 올라서니 여행의 설렘이 더 컸는지 그럭저럭 좋아 보입니다. 그런데 여행 중간중간 불현듯 자기 인생은 이제 망했다는 짝꿍.
이제 다시 취업하긴 글렀어. 내 잃어버린 1년...
어쩌면 그 USB는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다시 안정적인 일상으로 자신을 들여보내 줄 열쇠 같은 게 아니었을까요. 직장이고 미래고 일단 다 접어두고 여행을 간다고는 하지만, 이 여행에도 끝이 있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요. 이 여행이 끝나면 다시 사회로 돌아갈 마지막 보험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했던 거지요. 그런데 그 마지막 동아줄마저 잃어버리니 진짜 모든 것을 다 털어버리고 여행을 떠난 셈입니다.
여행 초기에 USB 생각만 해도 한숨짓던 짝꿍은, 순례길을 완주하고 베를린에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더 이상 USB 이야기를 할 때 슬퍼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 현실을 인정한 걸까요? 여행이 중반을 넘어서고 날씨가 살짝 쌀쌀해질 무렵부턴 더 이상 USB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재밌는 일이 많고 볼 것도 많은데, 그깟 USB가 뭐 그렇게 대수였겠습니까. 그렇게 USB는 우리 기억에서 잊히는 듯했는데....
한국으로 돌아오고 난 후, 집에 오자마자 지갑을 찾으려고 서랍을 열었는데 젤 위에 떡하니 있는 유에스비. 정말 거짓말 1도 안보태고 집에 오자마자 열어본 첫 번째 서랍 제일 위에 올려져 있는 것입니다. 아직 외투도 벗지 않고 가방만 겨우 내려놓은 채 그 USB를 들고 서 있는 짝꿍은 기쁜 건지 황당한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귀신같이 나타난 USB덕분에 잃어버린 1년을 다시 되찾았다는 기쁨과 안도감에 더해 다시금 취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하는 이 현실을 깨닫게 해 주었기 때문이겠죠. (나중에 물어보니 기쁘기만 했다고 하네요. "사회에 들어갈 열쇠를 다시 찾았다!" 하고요)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지 50일 정도 지난 지금, 여행의 여운도 점점 희미하게 사라져 갑니다. 돌이켜보면 잃어버린 USB 덕분에 미련 없이 여행할 수 있었고, 다시 찾은 USB 덕분에 여행이 끝난 뒤의 후유증을 빨리 극복할 수 있었던 것 같네요.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힘을 얻은 만큼,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가 치열한 삶의 현장을 마주할 시간입니다.
(Cover Image by Sara Kurfeß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