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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감한여전사 Sep 04. 2021

벼락 거지가 되었습니다

집값 언제 올랐어요? 제가 야근할 때 올랐어요?

브런치에 가입하면서 나는 “벼락 거지된 썰 풉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연재하겠다 했다. 벼락 거지가 된 과정과, 그걸 탈피하는 과정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후자는 현재 진행형이라서 해피엔딩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고. 나도 모르는 결말을 시작하고자 했다.


그래 놓고 부동산에 가서 “엄마 따라다니지 뭐했냐”는 말을 듣고 집에 오는 내내 하루 벌어 하루 살기 바빴던 엄마 아빠를 생각하다가 엄마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그래 놓고, 매일 하얀 스크린 위로 검은 하소연들을 쏟아낸다. 차마 발행 버튼은 누르지 못한다. 피로하다.


쏟아내는, 아니 쏟아진 글을 보는 것은 나 하나뿐인데 그래도 위로가 된다. 나는 나에게 그래, 수고했다 말한다. 네 수고는 너만 알면 된다는 그 말이 떠오른다. 그렇게 나를 위로하다가도 문득 누군가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두 개의 부동산에, 상담 차 자산을 오픈했는데 사장님들은 흠칫 놀라며 “많은데요?”한다. ‘그렇죠? 맞죠? 많은 거 맞죠? 저 잘 모은 거 맞죠? 월급으로만 이렇게 모았으면 잘 모은 거 맞잖아요. 감사해요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하고 말한다. 물론 속으로. 겉으로는 그저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한다. 그들도 씁쓸하게 웃는다. 다른 사람들은, 이 보다 적은 돈으로 집을 사려고 했었나. 알고 있으면서 새삼스럽다.


“그니까 이렇게 대출을 받아서 저렇게 한 다음에 이렇게 저렇게 하면 안 돼?”

“응 안돼. 근데 예전에는 됐대. 80년 대생들은 다 그렇게 부자가 됐대.”

부린이인 나는 얼마 전 집을 산 동생을 붙잡고 질문들을 쏟아낸다. 묻는 것마다 틀리다. 아 내 친구들은 그렇게 부자가 됐구나. 새삼스럽다.


정책에 핑계를 대고 싶지는 않다. 억울한 마음도 들지만, 아니지. 또 어떤 날에는 이런 역차별이 어딨냐고 화도 냈지. 그렇지만 아무튼 잘못했던 건 나다.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일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작년에 나는 진짜 정말 열심히 일 했고, 이번에도 고과를 주지 않는다면 정말로 이직하겠다 생각했다. 고과와 연봉을 떠나서 동기부여가 필요했다. 차마 내 다짐까지는 말 하지 못 했지만 당당하게 “저 고과 주세요”라고 말했고 연봉이 조금 올랐다. 보너스도 받았다.


근데 내 보너스는 백만 단위였고 오른 월급은 십만 단위였는데, 우리 집은 억 단위로 올랐다. 야근하며 밤샐 시간에 부동산 공부 하나 더 할 걸. 외근 가는 길에 부동산이나 더 들릴걸. 연봉 몇 퍼센트 올리면 뭐하나, 내 전셋집은 100% 올랐는 걸?


며칠 동안 매매를 보다가 이렇게 초조하게 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오늘은 전세를 보러 갔다. 그래 전세 살면서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뷰가 좋다. 집도 너무 좋다. 근데 방이 하나다. 다용도실도 없네. 그럼 내 건조기 어디에 옮기지? 삶의 질을 바꿔준, 내 동생이 물려준 소중한 건조기.


“얼마라고 하셨죠?”

“4억 6천이요.”


내 전세금을 받고도 2억을 더 내야 한다. 내 전셋집은 비록 앞집 티브이가 보이지만 그래도 투룸인데. 방을 하나 없애고 오는데도 나는 2억을 더 내야 한다.


“그 정도 돈 있으면 그냥 사세요, 1.5룸은 매물이 없고 투룸 어때요? 투룸도 보여줄까요?”

돈 드는 일 아니니 보여달라 한다.


환호가 절로 나온다. 너무 좋다.

이런 집에 살면 진짜 성공한 커리어우먼 같은 기분이 들 것만 같다. 너무너무 좋다. 아 여기에 건조기도 둘 수 있겠다. 당장 오늘 여기서 자고 싶다.


“이건 얼마라고 하셨죠?”

“9억이요.”


2주 전에 7억에 팔린 집이 9억이란다.

9억… 9억이 몇 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지?

어지럽다. 물론 바로 매도는 못 하지만 2주 만에도 벌 수 있는 돈이었구나. 2억이. 내가 2억을 버는 데엔 몇 년이 들었지? 바닥 친 노동의 가치가 서럽다. 내 가치도 떨어지는 것 같아 슬프다.


삼천만 원에 시작했던 내 첫 자취집이 생각난다.

부모님이 내 첫 자취집을 보고 간 날, 엄마는 돌아가는 길에 울었다 했다. 딸이 다 커서 독립을 했기 때문이라 했지만 저 소녀 같은 엄마는 분명 또 미안해서 울었을 거다.


“회사 동기들도 이 동네에 사니? 빌라라 조금 위험할까 봐”

“아 남자 동기 한 명 살더라, 근데 내 친한 여자 동기들은 이 동네 말고 여기서 좀 떨어진 데 살아”

“왜 거기로 안 갔어?”

“걔네는 오피스텔로 전세 얻었더라고, 이쪽은 빌라촌이고.”


거기는 비싸서 안 된다고, 동기들은 부모님이 집을 구해줬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이미 엄마는 알고 있을 터였다. 동기들은 8천만 원짜리 시내 오피스텔에 살았고, 나는 3천만 원을 대출받아 3층짜리 빌라에 살았다. 나는 동기들의 집에 놀러 갔지만, 친구들이 내 집에 온 적은 없었다.


내가 두 번의 이사를 거쳐, 세 번째 오피스텔로 간 곳이 동기가 시작했던 오피스텔이었다. 분명 그 집에 놀러 갔을 때는 “너네 집 되게 좋다!”라고 외쳤던 것 같은데 그 사이에 나는 늙었고 집은 낡았다.


“집 사세요.”

사장님이 다시 한번 말씀하신다. 9억이 이렇게 쉬운 돈이었나. 7억이면 샀을 텐데 싶다. 아니 7억은 그렇게 쉬운 돈이었나.


정해진 것도 없이 일단 부동산을 나온다. 동네 되게 좋네. 이렇게 좋아서 올랐나. 근데 언제 올랐지? 일 년 전 오늘, 정말 바빴는데, 나 일하던 그 시간에도 오르고 있었나. 나는 언제 벼락을 맞았나.


오늘따라 이 동네는 번쩍번쩍하다. 내가 사는 동네인데, 오늘 나는 완전히 이방인 같다.


집이 없으니 이방인이 맞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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