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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감한여전사 Sep 08. 2021

괜히 열심히 살았다

너무 슬픈 말이지만, 정말로 괜히 열심히 살았다

백신 2차 접종은 오후 3시.

아침 시간을 이용해 부동산에 간다


어제는 임대인이 대출을 받아야 하는데 내가 주거하고 있어서 안 된다고, 퇴거 한달 전에 돈을 받고 서류상으류 전출해 줄 수 있냐는 중개인의 연락을 받았다. 임대인과 몇번의 문자 속에 감정이 상한 나는 싫다고 했지만, 사실 내년 3월 입주 예정인 분양권을 사고 싶은 나로서는 이게 밑지는 장사는 아니니까. 일단 부동산을 찾았다. 부동산 사장님은 내 임대인의 친구의 어머니시라 한다.


“그 때 집 사면 좋았잖아요”

“저희 부동산에서는 오피스텔이라 사지 말랬어요. 돈도 있었는데 살 걸”

“내 아들 친구들은 집 다 있어. 그게 처음이 어렵지 사면 된다니까?”

“그러게요 좋겠어요”

“걔네는 공부도 못 해서 연봉도 낮거든, 청약도 잘 되고 대출도 다 땡길 수 있고. 지금도 돈 없어서 대출 땡기느라 그렇게 부탁하는거예요”


내 연봉은 1억을 넘는다. 연봉계약서는 그렇지 않지만 원천징수로 1억이 넘어 생애최초 구매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10% 덜 대출을 받는다. 보금자리론, 디딤돌 이런 건 남의 얘기고. 청약? 그것도 남의 얘기.


공부를 열심히 했다. 형편상 학원을 다닐 수 없었다. 엄마아빠에게는 나는 독학이 좋다 했다.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 했을 때, 엄마는 학원을 보내지 못해서 미안하다 했다. 사실은 아빠가 한 말이라고 했다. 큰딸은 왜 학원을 안 다니냐고, 철든 딸이 속상하다고 하셨다 했다. 문제집을 사면 항상 두번 이상 풀려고 문제집에 밑줄도 그어 본 적이 없다. 물론 사달라고, 보내 달라고 하면 어떻게서든 해줄 엄마 아빠가 있었기에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었지만.


엄마 아빠 덕에 학자금 대출 없이 대학을 다녔다. 그래도 두 딸 보내느라 힘들었을테니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장학금을 항상 타 왔다. 전액은 아니었어도 반의 반값으로 대학을 다녔다. 등록금을 납부하러 간 은행에서 “따님이 장학금을 타셨네요” 하면 엄마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두 딸 모두 뒷바라지 하느라 분명 힘드셨을 거다.


서울로 학교를 다니려면 하루에 4시간씩을 지하철과 버스에서 보내야 했지만, 자취할 돈이 없어서 버텼다. 자취하겠다고 말을 꺼내본 적도 없다. 자취를 선언했던 동생은 나에게 혼만 났다. 우리 학교가 더 멀다며 타박을 했다.


회사에 와서도, 소득에 비해서 잘 쓰지 않았다. 소비가 적으니 항상 동기들 중 세금이 제일 많았다. 어릴 때 나를 낳은 부모님은 아직도 환갑이 안 되었고, 아빠는 계속 일하기 위해 한국보다 외국에 더 오래 있었다. 부모님께 돈은 내가 제일 많이 드리는 것 같은데 부양 가족은 없었다. 어떤 어린 작가가 아빠의 외로움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고 했었나? 나는 그 말을 들었을 때도 울었다. 그래서 나는 무엇도 “지르지 못 한다”


괜히 열심히 살았다. “괜히”라는 말을 붙이면 진짜 내가 살아온 시절이 부정될 거 같아서 참고 참았는데 정말 괜히 열심히 살았다. 내 연봉 곱하기 앞으로 일할 시간을 곱하면 저기 저 고층 오피스텔이 나보다 비싸다.


엄마가 1인 가구 청약에 대한 오늘자 기사를 보내왔다. 일단 나는 소득이 많으므로 자산 3.3억이 있으면 안 된다. 그럼 지금 매수하고자 하는 오피스텔도 사면 안 된다. 근데 만약 안 샀다가 2년 후에 또 오른다면? 청약이 영영 안 된다면?


 자산 3.3억에 대한 기준 밑에 “금수저 특공”을 제한하기 위함이라 한다. 금수저였나. 내가?


엄마가 딸들은 재난지원금 대상 아니지? 한다. 열심히  덕에 아니다.(재난 지원금에 대한 불만은 전혀 없다. 나는 이 돈이 나한테까지 오지 않았으면 좋겠. 분명 어려운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부모는 대상인데 딸들은 아니다. 그래도 나는 금수저로 분류된다.


다음 부동산에 간다.

“근데 진짜 대단하시네요, 어려 보이시는데”

마스크 덕에 어려보이나보다. 오는 부동산마다 이 말을 한다. 그리고 가는 부동산마다 돈이 좀 모자라다 하면 “부모님한테 잠깐 빌리세요”한다. 빌려드린 적은 있어도 빌린 적은 없는데. 여섯번쯤 들었다. 여섯번 모두 웃었다. 마스크 덕분인지, 탓인지, 나는 웃지 않고 무표정 했을 것이다.


친구를 만나 점심을 먹는다. “부동산 다녀왔어? 나는 회사 근처에서 자취할때 엄마가 집 사진 보여주길래 오케이 하고 집 보러 다닌 적도 없는데” 부럽다. “너도 혹시 대학 원서 쓸 때 엄마가 써줬어?”

친구가 맞단다. 나는 대학 원서를 부모님이 써준다는 것을 약 일주일 전에 알았다.


집주인에게 연락이 온다. 은행에서 전화가 가면 얘기가 됐다고 해달라 한다. 근데 저는 지금 집을 못 구했고, 생각해보니 저는 그 동안 세대주 자격을 어디가서 유지하죠?


임대인이 그동안 말을 막 한 걸 사과한다. 잘 생각해보시고 연락을 달라 한다. 그러면서 한마디 붙인다. “제가 이번 대출 못 받으면 돈 못 드려요.” 협박인가. 싸울 힘도 없다. 나는 그 돈 지금도 있는데.


백신을 맞기 위한 줄을 선다. 열이 많다고 대기하라고 한다. “오늘 많이 걸으셨나봐요” 부동산을 걸어 다니느라 너무 많이 밖에 있었나보다. “열때문에 코로나 검사 하고 가세요” 부동산 안 돌아다녔으면 오늘 백신 맞을 수 있었나.


코로나 검사를 마치니 부동산에서 전화가 온다.

“어제 알아보신 분양권이요.. 안 판대요”

“아 그래요…?”

“다른 물건 어떠세요?” 어제보다 일억 올린 값을 제시한다.


처음 일억 모은 날, 혼자 뿌듯해서 신나게 걷던 내가 생각이 난다. 삼년 걸렸었나. 그 날 발걸음 진짜 가벼웠는데.


엄마한테 문자가 온다.

“엄마 오늘 검진 통과해서 너무 기분이 좋아서 꽃 사가려는데 들고 가는 게 좀 쑥스럽네”

아 맞다. 오늘 엄마 정기 검진이었지. 중요한 것도 모두 잊었다. 내 나이에 엄마랑 아빠는 우리 키우느라 꽃을 사지도 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이번주에 집에 갈 때는 꼭 꽃을 사가야지 다짐한다.


집에 온 나는 엉엉 운다. 열심히 살았던 내 모든 게 부정 받는 것 같아서, 엉엉 운다. 내 집도 아닌 집에서 나는 엉엉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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