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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우 May 10. 2021

#26. 새로운 일상

생활공간이었던 집이 아침 9시가 되면 업무공간이 된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았던 사회는 사람과 사람이 대면하면서 교육받고 경제활동을 하면서 이뤄졌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 조직이 구성되는 게 우리가 알고 살았던 사회였다. 하지만 지구를 뒤덮은 역병으로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는, 단 한 번도 살아보지 못했던 사회가 갑자기 다가왔다. 출근하고 싶은데 극구 말리며 집에서 하란다. 학교는 일찌감치 폐쇄됐다. 올해 초등학교 입학이 예정돼 있던 8살 어린이들은 아직 학교생활을 하지 못했다. 올해 수능을 준비하는 고등학교 3학년생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학교도 학원도 갈 수 없기 때문이다. 회사와 학교뿐 아니다. 각종 협회와 단체, 조직 등 우리 사회 곳곳에서 사람이 모이는 것 자체가 엄격히 제한된다. 그렇게 한 번도 살아보지 못했던 세상이 갑자기 펼쳐졌다. 

아침마다 모든 팀원이 모여 회의와 기획을 하고 각자의 일과를 시작했었는데 이제 그게 없어졌다. 집에서 전화나 화상으로 회의하고 업무를 시작한다. 생활공간이었던 집이 아침 9시가 되면 업무공간이 되고, 저녁 6시면 다시 생활공간이 되는 건 너무 어색하다. 업무도 제대로 진척되는 것 같지 않다. 소통이 매끄럽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 얼굴 맞대고 자료 보면서 회의했었는데, 매일 보던 동료를 휴대전화나 노트북의 화상으로 대하는 건 어색하다. 특히 부장이나 이사 등 윗사람과의 화상통화는 직접 대하는 것보다 이상하게 더 불편하다. 그리고 집에만 있으니 너무 답답하다. 어서 빨리 회사에 가고 싶어진다. 

그런데 재택근무 시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눈 비비고 일어나 씻고 옷 입고 발걸음을 재촉해 지하철을 타던, 늘 똑같은 출근길이 사라졌다. 덕분에 아침잠을 좀 더 자고, 간단하게 아침 식사도 차려 먹는 여유가 생겼다. 출근 준비와 출근 시간까지 합쳐 약 2시간의 여유 시간이 생긴 덕분이다. 

보기 싫은 부장 얼굴을 안 보는 것도 좋다. 부장은 어차피 자기가 먹고 싶은 거 먹을 거면서, 늘 점심 메뉴 선택을 종용한다. 선배 잔소리도 없고 눈치 안 봐도 되니 마음이 한결 가뿐하다. 마시기 싫은 술을 억지로 먹이는 회식도 없다. 출근을 안 하니 교통비가 절감되고, 비싼 옷을 사 입지 않아도 되니 생활비도 덜 든다. 피부도 좋아진 것 같다. 화장을 안 하고 자외선에 노출되는 시간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퇴근도 없다. 지친 몸을 이끌고 만원 지하철을 타지 않아도 되고, 광역버스를 타기 위해 30분씩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이젠 앉은 자리에서 노트북을 닫으면 업무공간이 생활공간이 되는 마법이 펼쳐진다. 

재택근무라는 걸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우리는 처음엔 모든 게 불편하고 어색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재택근무가 익숙해졌고, 보이지 않던 재택근무의 장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자 출근하는 것보다 집에서 업무 보는 게 편해졌고, 급기야는 출근하고 싶은 생각이 사라지고 점점 출근하기 싫어졌다. 

회사 입장에선 재택근무는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만약 직원 중 한 명이라도 확진자가 나오면 업무가 마비되는 건 불을 보듯 뻔하니까. 그러니 지금 당장은 업무 속도가 늦더라도 재택근무로 전환해 업무가 완전히 마비되는 걸 막아야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사주 입장에서도 재택근무의 장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회사는 직원들이 모여서 일하는 공간 개념이다. 그런데 그 공간이 없어도 회사가 운영된다는 게 팬데믹 상황으로 입증된 것이다. 직원에게 공간을 제공하지 않는 건 회사 입장에선 비용을 엄청나게 줄일 수 있다는 뜻이다. 우선 건물 임대료를 내지 않는다. 당연히 전기세, 난방비 등도 없다. 책상과 의자를 비롯해 여러 직원의 업무에 필요한 물자도 굉장히 많이 줄일 수 있다. 더불어 여러 인력과 공간을 관리하기 위한 인력도 필요 없으니 인건비도 줄일 수 있다. 사주로선 언제나 비용 절감이 가장 골치 아픈 문제였는데, 재택근무가 가장 완벽한 솔루션이 된 셈이다. 

의도치 않았지만 팬데믹 상황 덕분에 그동안 우리가 해왔던 대면식 조직 구조가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됐다. 출퇴근으로 소모되는 시간과 비용, 에너지가 엄청나다는 걸 깨달았고, 무조건적인 인력 공간 제공도 비효율적이라는 걸 알게 됐다. 결과적으로 이제까지 사회와 조직은 공간을 공유하는 개념이었는데, 이제부터는 공간이 아닌 일정 시간에 인터넷상으로만 접촉하는 시간의 개념으로 변모하는 게 아닌가 싶다. 지금 당장은 비대면이 불편하고 비효율적일 수도 있지만, 시간의 흐름은 불편을 지우고 비효율을 효율로 전환할 것이다. 

<모터트렌드>를 비롯해 여러 부서가 모여 있는 가야미디어도 공간의 개념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공간을 구성하고 관리하는 과정에서 많은 지출과 충돌이 있지만, 회사가 운영되는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여기는 근대적인 방식과 구조 때문이다. 가야미디어뿐만 아니라 많은 회사가 이러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공간을 공유하는 대면 방식이 가장 비효율적인 회사 경영 방식이 될지도 모른다. 이미 트위터처럼 원하는 직원에겐 평생 재택근무를 허락하는 회사가 나오고 있다. 대면 공간의 제공이 직원이나 회사에게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질병관리본부는 “코로나19 이전의 세상은 이제 다시 오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급격한 변화는 우리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적응해야 하는 새로운 일상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살던 시대가 아닌 새로운 시대인데, 이전의 일상을 살고 있거나 이전과 같은 조직 구조와 생리를 고수한다면 그와 그 조직은 이미 시대에 뒤처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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