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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우 May 10. 2021

#27. 애달픔만 남았다

지금은 그 많던 해외 출장이 없다

이달 서인수 차장이 기획한 ‘인생 드라이브’ 원고를 쓰기 위해 과거를 회상해본다. 대충 계산해보니 대략 50~60번 해외 출장을 다녀온 것 같다. 대부분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 곳이었다. 시승회를 준비하는 자동차 회사는 시승자에게 최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길이 잘 닦이고 풍경이 멋진 곳을 시승 코스로 정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머릿속을 스치는 곳이 많다. 우선 아프리카 나미비아의 평원과 사막에서의 시승은 내 인생의 결정적 변곡점이 된 이벤트였다. 당시 사고로 죽을 고비에서 어렵게 돌아온 난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이라는 어려운 이름의 병으로 어둠 속에 발을 헛디딘 듯한 깊은 무력감에 휩싸여 있었다. 요단강 앞에서 발길을 돌린 것을 후회할 정도로 삶에 대한 의욕이 거의 없는, 그냥 살아서 사는 의미 없는 인생의 단편에 있었다. 그런 상태로 24시간을 날아서 나미비아 땅에 닿았다.

태어나서 이렇게 맑은 공기를 마셔본 적이 없다. 어디서든 지평선이 보이는데, 공기가 워낙 맑아 그 지평선 끝에 무엇이 있는지 다 보일 정도였다. 이토록 또렷한 파란 하늘도 처음이다. 눈이 시린데 계속 올려다보게 되는 하늘이었다. 기린, 코뿔소, 쿠드, 얼룩말, 코브라, 코끼리, 하마, 리카온, 치타 등 동물원에나 가야 볼 수 있는 짐승들이 아무렇지 않게 보였다. 밤이 되면 어둠보다 더 많은 별이 있었고, 밤새 그 별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차했다. 아프리카는 모든 게 새롭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게 경이로웠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행복했다. 그렇게 아프리카에서 열흘을 보내고 ‘살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다시 서울로 날아와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 선생은 그 어려운 이름의 병이 내 머릿속에서 없어졌다고 했다. 그렇게 나미비아에서의 드라이브는 내게 새 생명을 안겼다. 

스페인 마요르카섬의 햇살도 또렷하다. 이곳이 유럽인들이 즐겨 찾는 최고의 휴양지 중 하나인 이유는 아름다운 풍광과 사랑스럽다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을 햇빛 때문이다. 이곳이 좋았던 건 ‘생각의 단절’이었다. 살결을 간질이는 햇살과 눈을 희롱하는 파도의 일렁임, 초록빛 평온을 주는 자연경관을 즐기다 보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기 때문이다. 마요르카는 두 번을 갔었는데, 두 번 모두 생각을 비우고 여유를 채우는 시간이었다. 

가장 흥미진진한 드라이빙은 스웨덴 아르비스야우르였다. 4박 5일 동안 얼음 호수 위를 달리고 달렸다. 정확히 표현하면 미끄러졌다는 게 맞다. 스터드 타이어를 끼운 폭스바겐 골프 R로 눈보라를 일으키며 드리프트를 했다. 슬라이딩을 유지하기 위해 세심하게 가속페달을 밟는 연습을 하고, 드리프트 상태로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차체를 이끄는 기술을 익혔다. 실생활에서는 그다지 쓸 일이 없고 쓸 일이 있어서도 안 되는 것을 배우는 의미 없는 시간일지 모른다. 그래서 더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다. 우리는 눈밭에서 차를 던지며 운전할 수 없으니까. 더불어 눈보라를 일으키며 드리프트로 코너를 돌면 쾌감이 여간 아니다. 그 감각이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는 듯하다. 스웨덴은 내가 가본 곳 중에서 가장 추운 곳이었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뜨겁게 운전한 곳이었다.  

이외에도 이탈리아 바리, 스페인 말라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미국 유타,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등 ‘인생’이란 단어를 수식어로 사용해도 될 만큼 훌륭한 곳이 많았다. 내가 이렇게 멋진 곳에서 좋은 차를 타는 특별한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었던 건, 내가 잘해서도 아니고 운이 좋아서도 아니다. 그때는 그냥 그랬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모터트렌드> 막내 기자인 장은지 나이였을 때, 인터넷 매체와 유튜브 등은 아예 없었고, 신문과 TV에서도 자동차 시승기를 다루지 않았다. 따라서 글로벌 시승 행사 대부분에는 자동차 전문지 기자가 초청됐다. 한 달에 출장이 몇 건이나 되는 경우가 허다했고, 기자들이 세계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다가 마감 때나 만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나도 해외 출장을 한 달에 세 번 가면서 국제선을 14번 탄 적이 있다. 마지막 비행기에선 코피를 흘렸다.  

지금은 그 많던 해외 출장이 없다. 아마도 완벽한 백신이 나오기 전까진 글로벌 미디어 시승회는 열리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독자들도 생생한 출장 기사를 접할 수 없게 됐다(세계 모든 매체가 마찬가지다). 다행히 <모터트렌드>는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인 미국에서 기사가 생산돼 날아온다. 세계 모든 자동차 제조사들이 그곳에 있으니 놓치는 새 차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당분간(해외여행이 자유로워질 때까지) 미국 기사량을 늘릴 생각이다. 

편집장 입장에서도 아쉬운 부분이 있다. 출장은 고되지만 기자에겐 견문을 넓히며 제품을 깊이 있게 관찰하고 공부할 좋은 기회다. 그래서 <모터트렌드> 기자들이 더 넓은 세상을 유영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느꼈으면 했다. 그렇게 기자로서 역량을 키우고 그 역량을 고스란히 <모터트렌드>에 쏟아내면 매체 경쟁력이 높아질 테니까. 더불어 내가 생경한 곳에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얻고, 여유를 채우고, 열정을 불태운 것처럼 후배들도 그들 인생에 긍정적 변화를 주는 특별한 경험의 기회가 많아지길 바랐지만, 아쉬워졌다.

지극히 평범했던 몇 달 전 일상이 지극히 특별했던 순간처럼 아련하다. 비정상이 일상이 된 지금이라 평범함은 더욱 간절하다. 여행이 힘든 지금, 감성을 녹인 글과 시원한 사진으로 독자에게 대리만족을 주고 싶었으나, 그 반대로 애달픔만 남긴 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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