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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우 Oct 17. 2022

보모어와 애스턴마틴

싱글몰트 위스키와 본드카의 만남

보편적으로 자동차와 술은 가까이하면 안 될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자동차와 술을 깊이 대했던 입장에서 보면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자동차 회사와 알코올 회사는 마케팅 차원에서 꽤 많은 컬레버레이션을 한다. 영국의 자동차 메이커 애스턴마틴(Aston Martin)과 위스키 메이커 보모어(Bowmore)가 좋은 예다. 두 회사는 2019년부터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꾸준하게 스페셜 에디션을 선보이고 있다.


보모어는 스코틀랜드 아일레이(Islay) 섬에 위치한 증류소로 1779년부터 싱글몰트 위스키를 생산하고 있다. 아일레이(현지에선 ‘아일라’라고 한다) 섬은 스코틀랜드 서쪽 해안 이너해브리디스 제도의 최남단에 있다. 아일레이에는 많은 위스키 증류소가 있는데, 보모어 외에도 아드벡(Ardbeg), 라가불린(Lagavulin), 라프로익(Laphroaig), 쿨일라(Caol Ila), 브룩라디(Bruichladdich) 등 아일레이 특유의 맛과 향을 지닌 독특한 싱글몰트 위스키 증류소가 많다. 싱글몰트 위스키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아일레이는 ‘천국의 섬’이 아닐 수 없다.


아일레이는 섬 전체 인구가 400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 어떻게 싱글몰트 위스키의 성지로 불리게 됐을까? 우선은 아일랜드와 가까운 지리적 이점을 들 수 있겠다. 논란은 있지만 아일랜드는 위스키를 가장 먼저 제조한 국가다. 아일랜드의 증류 기술이 스코틀랜드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아일레이 섬이 스코틀랜드 본토보다 기술을 빨리 도입했을 것이라는 가설이 있다. 더불어 위스키를 생산하기에 가장 완벽한 자연환경도 아일레이의 장점이다. 세찬 바람과 같은 섬 기후의 특성과 깨끗한 공기, 오염되지 않은 물, 훌륭한 맥아의 질 등이다. 한편으로는 스코틀랜드 본토와 물리적으로 많이 떨어져 있어 밀주를 생산하기에 좋았다는 말도 있다.


블랙 보모어의 시작

보모어와 애스턴마틴이 협업해 출시한 이 특별한 위스키의 이름은 ‘블랙 보모어 DB5 1964’다. DB5는 애스턴마틴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자동차이고, 1964년은 애스턴마틴 DB5가 <007> 영화에 처음 등장한 해이기도 하다. 더불어 1964년은 보모어가 재래식에서 현대식 증류방식으로 전환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이전까지 보모어는 석탄 화로를 이용해 증류기를 가열했는데, 1964년부터는 증기를 이용한 현대식 증류방식을 사용하게 됐다. 따라서 1964년은 보모어와 애스턴마틴 두 회사에 모두에게 역사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다.

1964년 11월 5일, 보모어의 새로운 현대식 증류기에서 첫 번째 원액이 나왔다. 보모어는 이 원액을 일명 ‘월넛 셰리’라 불리는 가장 어두운 캐스크에 담아 숙성했는데, 보모어에 있는 여러 원액 저장고 중 1번 저장고는 해수면보다 낮다. 그래서 온도 변화가 거의 없어 위스키 원액의 숙성이 늦지만, 특별한 맛과 향을 지니는 특성이 있다. 1993년부터 이 특별한 캐스크와 저장고에서 숙성된 원액을 병입하기 시작하는데, 위스키의 색깔이 워낙 어두워 ‘블랙 보모어’라 불렀고, 이게 블랙 보모어 시리즈의 시작이 됐다.


본드카의 탄생

애스턴마틴 DB5는 100년이 넘는 애스턴마틴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차다. 이유는 바로 영화 <007> 덕분이다. 1964년 <골드핑거>를 시작으로 <선더볼 작전>, <골든아이>, <네버다이>, <언리미티드>, <카지노 로열>, <스카이폴>, <스펙터> 그리고 최신작 <노타임 투 다이>까지 총 9편의 <007> 영화에서 DB5가 본드카로 활약했다. 제임스 본드 역할 배우가 여러 번 바뀌었음에도 DB5는 계속 본드카로 남아있었다. DB5의 후속 모델인 DB6, DB7, DB9, DB11도 있지만 <007> 영화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DB5는 출시 당시 직렬 6기통 4.0L 엔진은 최고출력 285마력, 최대토크 39.7kg·m을 냈다. 최고속도는 시속 230km까지 낼 수 있었고, 0→시속 100km 가속을 약 8초 정도에 달렸다. 물론 당시를 생각하면 고성능 스포츠카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렇다고 세상을 뒤집어 놓을 만큼의 뛰어난 성능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차의 가장 큰 매력은 성능이 아니라 디자인에 있었다. 우아한 곡선이 차체를 휘감으며 만든 팽팽한 볼륨감이 DB5의 가장 큰 매력이니까. 한편으로는 단정한 영국 신사 이미지에 근육이 잔뜩 붙어 있는 DB5는 무언가 비밀을 간직하고 있을 것만 같은 것도 제임스 본드 이미지와 잘 맞는다.

사실 이 차는 007의 임무 수행을 위한 기관총 등의 비밀 무기 외에도 또 다른 비밀이 있다. 보디를 그냥 철판이 아닌 마그네슘 합금으로 제작했다는 것. DB5의 디자인을 맡은 이탈리아의 카로체리아(자동차 디자인 전문 회사) 투어링 슈퍼레제라(Touring Superleggera)는 마그네슘 합금 보디 제작 특허를 가지고 있었고, 덕분에 DB5는 차체 무게를 1468kg으로 줄일 수 있었다.


술과 자동차의 역사적인 만남

애스턴마틴은 그들 역사에서 가장 또렷하게 빛나는 DB5를 기념하고 기억하고자 보모어와 함께 아주 특별한 위스키를 선보였다. 블랙 보모어 DB5 1964는 마치 007 가방에 담긴 것과 같은 모습에서 제임스 본드의 비밀 무기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스코틀랜드의 크리스털 제작업체 글라스톰(Glasstorm)이 수제로 만든 병도 특별하다. 마치 엔진 피스톤에 병이 올려 있는 모습이다. 블랙 보모어 DB5 1964는 망고와 패션 푸르트, 아카시아 꿀의 강렬하면서 풍미에 담배와 커피 향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고 한다. 보모어의 설명이지만, 무언가 깊고 진하면서 그 향이 오래 지속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맛이 자못 궁금하긴 하지만 아마도 죽기 전에는 맛보기 어려울 것 같다. 이 특별한 위스키는 단 27병만 생산됐고 이중 25병만 판매됐다. 당시 판매 가격은 6만5000달러로 한화로 7000만 원 정도였다. 그런데 2년 뒤 이 특별한 싱글몰트 위스키가 시장에 나왔고 2억 7000만 원에 재판매됐다. 2년 만에 4배 가깝게 가격이 치솟은 것이다. 아마도 이 위스키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계속 가격이 오를 것이다. 1963~1965년에 1059대만 생산된 애스턴마틴 DB5의 가격이 지금도 계속 오르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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