휙. 보드랍고 도톰한 천을 들친다.
스르르르륵. 미끄러지듯 몸이 빠져 들어간다. 텁. 목 아래까지 보드라움을 끌어당겨 덮는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발을 이리저리 움직여 본다. 보들함에 녹아버리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반항해 보지만, 이미 발가락 끝 사이사이까지 점령당했다. 피부를 감싼 넘실거리는 부드러움에 이내 딱딱했던 마음은 흐물흐물해지고 만다. 이겨보겠다던 생각은 어리석었다. 이렇게 좋은 것을. 이렇게 행복한 것을.
끔뻑끔뻑. 여기가 어디지. 베개와 이불 귀퉁이가 보이는 걸 보니 이불 속이다. 누워있으려고만 했는데 잠이 들었나 보다. 황금 같은 휴일에 늦잠이라니. 안타까운 마음으로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 30분이다. 다행히 휴일은 아직 남아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즐겨볼까. 흐뭇한 미소를 걸치고 반쯤 몸을 일으켜 침대 옆 테이블에 아파트 단지처럼 높이 쌓인 책 중에서 몇 권 골라 다시 벌러덩 눕는다. 이불을 발 받침 삼아 다리를 편안히 하고 자세를 잡는다.
우선, 아껴둔 수필을 꺼내 든다. 수채화 같이 그려진 파리의 카페를 하나둘씩 방문한다. 함께 카페 의자에 앉아 카페의 분위기와 글의 분위기를 동시에 느낀다. 찻잔이 부딪치는 소리, 크고 작은 대화 소리, 이어지는 주인공의 한 숨소리. 그 소리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그녀의 추억을 공유하고 있다. 때로는 따듯하고 때로는 외롭다. 그녀의 말처럼, 비로소 내가 풍경이 된 모양이다. 풍경 속에서 그녀와 나란히 –천천히 나아가면 감질나고 힘차게 발을 구르면 위태로운- 그네 같은 시간을 보낸다.
수필을 덮고 소설을 집어 든다. 살금살금 뒤꿈치를 들고 주인공을 따라다니는 기분으로 숨을 멈추고 지켜본다. 수사물에서는 단연 내가 형사다. 어느 놈이 범인인지 찾기 위해 매서운 눈으로 인물 모두를 의심한다. 한 단어 한 단어가 모두 힌트이자 증거이다. 한때 범죄심리분석관을 꿈꾸었기에 단어를 씹어 먹을 기세로 읽는다.
꼬로로록. 무생물의 소리만 가득하던 곳에 생물의 외침이 울려 퍼진다. 아차. 식사 시간이 지났구나. 책을 잠시 덮고 이불 속에서 빠져나온다. 방을 나가 후다닥 간단한 요기 거리를 챙겨온다. 그중 식빵 하나를 입에 물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책을 편다. 흘린 빵 부스러기는 흩어져 있던 생각과 같이 나중에 쓸어 담으면 되니까.
어느새 어둑어둑하다. 이제 수채화 말고 선명한 그림을 감상해 볼까. 다시 반쯤 일어나 테이블 위의 최애 만화책과 동화책을 가져온다. 귀하디귀하게 여기건만 벌써 표지는 꼬질꼬질하다. 기분이 안 좋을 때 한 번씩, 기분이 좋을 때도 한 번씩. 너덜너덜하지만 표지를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다. 총천연색 장면들을 보니 흥분된 감정들이 소용돌이쳐 페이지도 빨리 넘어간다. 후루룩. 라면의 면치기 대신 종이 치기를 하며 그림 감상에 열중한다.
나의 리틀 포레스트는 방구석 침대 속이다. 포근한 침대에 누워 책을 쌓아 책의 키를 키우고 따끈한 신간을 골라 읽는다. 다음에 읽을 책들을 미리미리 골라 도서 구매 앱의 장바구니에 넣어둔다. 침대 안에서 보내는 나만의 시간은 우주 속을 여행하는 것만큼이나 방대하다. 포근한 이불을 거름 삼아 행복한 기억이 자라고 쌓인다.
해야만 하는, 책임감이 듬뿍 담긴 일에만 빠져서 몸과 마음의 어깨가 굳으면 이곳에서 긴장을 푼다.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있는 이곳에서만큼은 에너지 충전을 위해 오직 잘 쉬고 잘 즐기기만 하면 된다. 행복과 즐거움을 키우는 이곳은 나의 유토피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