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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eetish Jan 03. 2020

다시, 말레이시아 06_스콜에도 무심한 사람들

언젠가 비는 잦아들고 다시금 햇살이 비친다.

출처 : AFP via TODAY (SAYS)


많은 사람들이 누런 베이지색이나 남색의 얇은 점퍼를 거꾸로 입고 있었다. 막 말레이시아 땅을 밟아 수도의 이름이 쿠알라룸푸르인지 쿠알라룸프루인지 헷갈릴 당시에는(사실 지금도 가끔 헷갈린다. 그래서 그냥 KL이라고 부르는 편법을 쓴다) 더운 나라에서 왜 저러고 다닐까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동남아 사람들의 생활의 지혜였다. 


출처 : Unsplash


스쿠터나 오토바이를 타다 보면 바람의 저항을 맨몸으로 맞게 된다. 거꾸로 입은 점퍼는 바람이나 강한 햇빛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해주고 우기 때에는 비를 막아주는 역할까지 수행한다. 비 오는 날에는 스쿠터를 안 타면 되지 않느냐라는 말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말레이시아는 우기에 열대성 강우인 스콜 현상이 빈번히 발생하기 때문에 언제 비가 올지 예측하는 것이 쉽지 않다. 방금 전까지도 쨍하던 하늘에서 갑자기 굵은 물줄기 세차게 떨어진다. 그냥 맞고 있으면 살이 따가울 지경이다. 처음에는 우산도 없이 학교에 갔다가 수업이 끝날쯤에 갑자기 소낙비가 내려 난감해했던 적이 있었다. 집까지 뛰어갈까 고민도 했지만 빗줄기에 강도에 도저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은 나뿐이었다. 친구들은 망고주스나 마셔야겠다며 카페테리아로 갔다.


룸메이트에게 전화를 걸어 우산을 가지고 와달라고 해야 하나?

건물 차양 쪽으로 개구리 널 뛰듯 폴짝폴짝 뛰어가 볼까?


그칠 줄 모르고 퍼붓던 비에 대처 방법을 고민하는 동안 거짓말처럼 언제 그랬냐는 듯 비가 개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거짓말처럼 내가 좋아하던 쨍한 하늘이 나타났다. 나는 말레이시아 사람들의 행동에 묻어 나오는 느긋함이 아마 스콜의 영향은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해본다. 애써 무엇을 하려 하지 않아도 언젠가 비는 잦아들고 다시금 밝은 햇살이 나온다는 것을 그들은 아는 듯했다.





작년 초에 오랜 시간 계획하던 일이 어그러져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나의 하루를 설명하는 단어로 "무기력함" 하나면 충분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일, 밥을 먹는 일. 태어나서 한 번도 그 당위성을 의심하지 않았던 모든 행동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좋아하던 독서에도 시큰둥했다. 내 세상이 무너졌는데 저따위 활자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하루를 나폴리로, 하루는 도쿄타워 아래로, 어떤 날에는 호그와트로, 한밤중에도 나를 깨워 맨해튼으로 이끌어주던 책들도 나를 깊은 우울에서 끄집어내 주지 못할 것 같았다. 제3의 장소로 데려가기엔 너무도 깊은 우울 속에 나는 침잠해 있었다. 무기력함은 마치 늪과도 같아서 아주 작은 행동도 나를 더 깊이 가라앉게 만들 뿐이었다. 무언가를 하게 되면 또 실패를 하게 될 것 같았고 또 한 번의 실패는 내가 이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나를 부서뜨릴 것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를 더 힘들게 했던 것은 모든 게 다 내 통제력 하에 있어 현명한 태도와 선택을 취했다면 이와 같은 사태를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무익한 착각이었다. 생각해보면, 내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음에도 나는 나를 몰아붙이고 끝없이 책임을 물었다.


네가 더 잘 알았어야 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될 수도 있다는 걸 예상했었잖아?
네가 현명했어야지.


무기력하게 누워있으면서도 끝없이 머리를 굴렸다. 위기를 타개할 방법을 찾고 싶었다. 사실 그런 게 있을 리가 만무했다. 위기가 내 손으로 비롯된 것이 아니었으니, 해결책도 내 손에서 기인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것을 인정해버리면 정말 끝이 나버릴까 봐 나는 세상 가장 순진하고 무구한 사람인 체를 했다. 잘 될 거라 믿으면 잘 될 것이다라는 미신에 자발적으로 사로잡힌 것이다.


수개월이 지나고 교조적 신념에서 어렵사리 빠져나온 나는 갑작스러운 소나기에도 무심했던 말레이시아 사람들을 생각한다.


출처 : Unsplash


살다 보면 나의 의지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을 만나기도 한다. 갑작스레 내리는 비에 인간이 할 수 있는 대처라고는 우산이라는 대안을 찾거나 비가 멈출 때까지 기다리는 일뿐, 비 자체가 오지 못하도록 막을 수는 없다. 언제 비가 그칠지, 어떻게 이 비를 뚫고 나가야 할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우리가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비는 그친다는 것. 다시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이 나올 것이라는 것이다.


나를 무력하게 만들었던 이 빗줄기도 머지않아 그칠 것이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청명한 하늘도 고개를 내밀게 되겠지. 운이 좋으면, 무지개를 볼 수 있을지도. 비가 그치고 맑은 하늘 사이로 햇살이 비출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성취하지 못한 것들에 메어있기보다는 볕이 좋은 날에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생각하며 지내야지. 동동 구르던 발을 이제 그만 멈추고 망고 주스나 한 잔 마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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