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eni Jun Aug 28. 2023

29년을 전쟁에 묶여있던 한 사람의 이야기

영화 <오노다: 정글에서 보낸 10,000일>

여전히 세상 모든 영화를 찾아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이전보다 선택지의 폭이나 창구의 수가 늘어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거리 곳곳에는 극장의 문이 열려있으며, 집으로 돌아오면 IPTV가 우리를 기다리고, 넷플릭스나 왓챠 등의 OTT는 이제 우리 몸과 하나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런데 그 수많은 선택지 중 우리의 간택을 받는 작품은 과연 몇이나 될까. 창구가 늘어나며 스크린 독과점과 같은 승자독식 구조가 허물어지는가 했지만, 결국 OTT 시장에서도 메인에, 상위에, 순위권에 올라있는 작품으로 선택이 모이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소리 없이 공개되어 어느새 한 칸 두 칸 밀려나는 작품. 그렇게 누구에게도 닿지 못한 채 떠내려가 묻히고 마는 작품. 극장 개봉 없이 바로 VOD 서비스를 시작하는, 소위 직행했다고 표현되는 영화들에 있어 이는 지극히 예사로운 결말이다. 그야 재미가 미지수인 모험에 뛰어들기보다는, 박스오피스와 시청률로 증명된 길을 걷는 쪽이 훨씬 더 효율적일 테니까. 아무리 작품이 훌륭하다 할지라도 리뷰는커녕 관람평조차 찾기 어려운 판국에 무턱대고 모험을 종용할 수는 없는 법이다.



영화 <오노다: 정글에서 보낸 10,000일>(이하 <오노다>) 또한 그렇게 흘러 지나갔을지 모르는 작품들 중 하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필리핀 정글에 배속된 이후, 일본 제국 장교 오노다 히로오(엔도 유야/츠다 칸지)는 종전 사실을 믿지 않은 채 자그마치 29년 동안 망상 속의 전쟁을 계속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실화를 접했을 때, 만일 우리가 감독이었다면 이야기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했을까. 누군가는 전후 일본이 그러했듯 ‘마지막 사무라이’라며 영웅시했을 수도 있겠고, 혹은 필리핀 루방섬의 주민이 되어 그를 광기 어린 학살자로 기억했을지도 모른다.


익숙한 전쟁 영화 혹은 전기 영화가 될 수 있는 소재에서 <오노다>는 쉬운 길을 뿌리치고 기꺼이 도전을 선택했다.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 그를 충성스러운 군인이나 무자비한 전범으로 그렸더라면, 이야기의 깊이는 다소 얕아졌을지언정 필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적어도 해당 진영의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을 테다. 그러나 영화는 상반되는 두 해석을 모두 부정하지 않은 채,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라며 우리로 하여금 오롯이 인간 오노다의 선택을 지켜보도록 했다.



신문과 라디오 속 넘쳐나는 증거마저 조작이라 치부하고, 무장조차 하지 않은 원주민에게 총구를 들이밀던 그는 그야말로 전쟁광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되뇌며 자기 합리화로 정신을 연명하던 모습이 시각적 충격 이상으로 그와 우리 사이에 거리 두기를 이루었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영화는 그를 그저 평면적인 캐릭터로 규정짓지 않았다. 그는 장교로서 부하들을 돌보았고, 점차 그들과 전우 이상의 형제가 되어 함께 웃고 함께 울며 고독을 달래었다. 그는 분명 냉혹한 제국군이었지만, 동시에 우정에 미소 짓는 그 나이대 청년이기도 했다.


영화는 계속해서 모순되는 두 상황을 교차로 배치하여, 우리가 그를 재단하기 전 멈칫하게 되는 순간들을 일구었다. 논을 습격해 쌀을 훔친 날에는 담소와 함께 짚신을 만들었고, 라디오가 기만책이라며 의심한 날 저녁에는 뉴스를 반찬 삼아 밥 한 끼를 해치웠다. 그는 때때로 잔혹했지만, 때로는 또 순박했다. 궁지에 몰렸을 때 인간의 본모습이 나온다고 한다면, 과연 무엇이 오노다의 진짜 모습이었을까. 우리는 그를 전장에서 피어난 악인으로 기억해야 할까, 어쩔 수 없던 전쟁의 희생양이었다 기억해야 할까.



이 영화가 빛나는 순간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영화는 오노다에 대해 그가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 판결을 내리려 하지 않았다. 166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의 목적은 그에게 재판봉을 휘두르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가 지닌 모순까지 지긋이 지켜봐 온 우리가, 객관과 주관의 사이에서 그의 미래에 주목하기를 영화는 바라지 않았을까. 스스로 세운 망상의 벽을 허물고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 그가 과연 어떤 현실과 마주했을지. 마치 1998년 작 <트루먼 쇼>에서 미디어가 인간을 소비하는 구조에 집중했듯, <오노다>는 전쟁을 넘어 사회의 폭력이 남긴 자유의지의 상실과 개인의 도구화를 꼬집었다.


길었던 전쟁을 끝내고 정글을 빠져나온 오노다는 조국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었을까? 그를 찾아 데려가러 왔던 부하와 가족들은 오노다를 향해 소리쳤다. 이제 충분하다고. 정말로 수고했다고. 그러니 돌아와 편히 쉬라고. 그런데 설령 집으로 돌아간들 과연 그에게 평화가 허락되었을까. 온갖 괴담과 소문이 난무했으니 언론이 그를 가만두지 않았을 테고, 그를 어떠한 아이콘으로 이용하려는 손길 역시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상술했던 진영에 따라 한쪽은 그를 영웅으로, 다른 한쪽은 그를 광인으로 몰아갔겠지. 물론 어느 쪽이 되었든 그는 그저 광대가 될 뿐이었지만 말이다.



<트루먼 쇼>의 트루먼(짐 캐리)은 시청자들의 응원을 받으며 세트장 끝에 도달했다. 문 앞에 선 그는 언제나처럼 환하게 인사하며 현실 속으로 달려갔지만, 필시 그는 상처와 외면 속에서 웃음을 잃어갔으리라. 얼마간은 뉴스에 오르내리고 사람들의 관심도 이어졌겠지만, 결국 대중은 새로운 가십을 찾아 그를 잊어갈 것이 뻔했다. 오노다도 마찬가지다. 명령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을까 했겠지만, 단지 목줄을 쥔 주체가 군부에서 미디어로 옮겨갔을 뿐이다. 하나같이 입을 모아 진즉에 전쟁이 끝났다고들 말했지만, 타인을 도구로써 소비하는 자본주의의 폐단은 그 이전부터 흘러나와 지금 이 순간까지도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다시 한번 자신에게 질문해 보자. 조국으로 돌아간 오노다는 비로소 행복을 잡을 수 있었을까? 자신이 그리던 미래가 모두 허상이었다는 사실이 괴로웠던 건지, 어쩌면 그토록 기민하던 두뇌로 다가올 현실을 예측했기 때문인지. 헬기에 올라 일본으로 돌아가던 그의 표정에서는 약간의 기쁨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섬에서 멀어질수록 더욱 일그러져 가듯이 보였을 정도로 그의 얼굴은 기대와 안도보다 혼란과 불안으로 가득했다.



전쟁으로 인해 자유의지를 잃은 그가 돌아갈 세상은, 그의 재활을 도와주기는커녕 누가 먼저 그를 이용할지 경쟁하는 또 다른 전쟁터와 같으리라. 혹 그 안에서 행복의 기회와 맞닥뜨린다 할지라도, 실에 묶인 그에게 자유로운 선택이 허락되기나 할까. 영화 <오노다>가 카메라에 담고자 했던 것은 선악으로 낙인찍힌 주관 속의 오노다나, 실제 역사를 살아갔던 객관 속의 오노다가 아니었다.


영화는 우리가 화면 너머로 지켜본 인간 오노다를 통해, 한 개인이 맞닥뜨릴 사회의 병폐를 우리가 인지하고 바라보게끔 했다. 어쩌면 감독은 오노다라는 개인의 이야기를 넘어, 전쟁이 지나간 평화로운 사회에서도 누군가가 소외되고 있음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인상적인 소재를 살려 기분 좋게 선입견을 타파하는 그야말로 양질의 작품이었다.


어느샌가 조용히 공개되어 있던 이 작품에 대해, 이 글이 어떠한 입소문 효과나 소위 역주행 등의 반전을 불러오리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저 범람하는 콘텐츠 속에서 내가 찾은 이 빛이 다른 누군가에게도 빛이 될 수 있기를 조심스레 바랄 뿐이다. 때로는 조금씩 스크롤바를 움직여 평소와 다른 영화들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가 될 수 있음을 부족한 글로나마 이야기해 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