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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Dec 02. 2023

'서울의 봄'으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더 멀어졌을까

매년 12월이 되면 먹먹히 떠오를 영화 <서울의 봄>

말과 글을 조심해야 하는 혐오 사회를 살아가면서도, 나는 자신의 정치적 성향과 견해를 드러내는 데에 딱히 망설임을 품고 있지는 않다. 말하자면 정치란 사회라는 시스템을 어찌 굴려 나갈까에 대한 논의와도 같기에, 좋으나 싫으나 그 체계의 일부인 우리의 삶 역시 정치와는 결코 떨어질 수 없다. 때문에 비록 우리가 정치적 대리인을 세워 정치와 일상을 분리하였다 할지언정, 사회의 구성원이자 주권을 지닌 국민으로서 우리는 마땅히 정치와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은 이렇게 글을 적고 있으면서도, 평소 나 또한 누군가와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되도록 피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혹 나만의 정치관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지는 않을지, 반대로 타인을 부정하는 자신의 옹졸함에 나 스스로 상처 입지는 않을지, 나아가 이로 인해 소중한 인연까지 잃게 되지는 않을지. 이런저런 불안들을 떠안고는 다른 주제보다 더욱 입단속을 단단히 하며 매일 혼자 방구석 설전만을 거듭하고 있는 꼴이다.


이러한 걱정의 연장선상에서, 당연히 영화 <서울의 봄>에 대해서도 어떠한 코멘트를 남기지는 않으려고 했다. 내가 아무리 ‘영화’를 말하고자 할지라도, 이것은 분명 ‘실화’이자 ‘역사’이기도 하니까. 12.12 군사 반란은 재고의 여지도 필요도 없이 이미 내란이라 확정된 사건이었고, 그 주동자인 전두환은 좌우를 떠나 인간이라면 도저히 긍정해 줄 수 없는 지독한 악마였다. 우리가 역사를 알고 있으니 이야기는 결국 분노와 허탈감으로 끝날 것이 명백한데, 내가 여기에 과연 무슨 말을 더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웬걸. 영화 <서울의 봄>은 달랐다. 배경의 유사성으로 말미암아 <1987>이나 <남산의 부장들> 혹은 <화려한 휴가>나 <변호인> 등의 작품들과 유사하게 흘러가리라 예상했었는데. 영화는 이들과 완전히 다른 화법을 사용하며 우리에게 전두광(황정민)이라는 광인의 비상(飛上)을 보여주었다. ‘서울의 봄’이라는 제목보다 ‘하나회의 봄’이 더 어울릴 이 훌륭한 피카레스크 작품에서 전두광은 철저하게 악인이었지만 동시에 영웅이자 승자였다.


허황된 욕망이 그의 입을 거쳐 담대한 야망으로 변모했고, 위기 속 무모한 발악마저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의 결단이라 가려졌다. 간드러진 말본새로 사람들을 회유하던 그는 일견 작품 속 대사처럼 혁명가로 비치기도 했다. 10.26 사건 이후 어지럽게 격동하던 정국 속에서, 전두광은 혼란에 빠지기는커녕 이성을 꽉 붙잡고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과연 내가 이 혼란 속에서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그는 대한민국의 모든 정보를 쥐고 있는 현재에 취한 듯하면서도, 그 정보로 이루어낼 더 커다란 일을 탐하고 또 탐하였다.


그에게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위계적으로도 또 성격적으로도 필시 육군참모총장인 정상호(이성민)였을 것이다. 그야 그 역시 전두광과 마찬가지로 이성을 쥐고 있던 사람이었으니까.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정상호의 뒤에서, 전두광의 머릿속은 아마 이런 고민들로 가득했으리라. 내 속을 다 들여다보는 저 사람을 대체 무슨 수로 넘어설까. 설득도 겁박도 통하지를 않는데 어떻게 내 앞까지 끌어내릴 수 있을까. 오르지도 내리지도 못한다면, 방해되는 저 인간을 무엇과 엮어 처리하면 좋겠는가. 무엇을 숨기랴, 영화를 보며 마치 하나회의 일원이라도 된 양 주인공 전두광을 응원하던 내가 서서히 그와 멀어지기 시작한 지점이 바로 여기였다.



앞서 말했듯 그는 그저 권력욕에 발광하던 들짐승이 아니었다. 상황 상황을 이성적으로 바라보며 앞날까지 내다볼 수 있었기에, 그는 적어도 최소한의 합법적 절차를 밟아가고자 했다. 실제로 그는 뇌물과 청탁 같은 부정한 방법에 거리낌이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엄사령관에 순응하며 승인과 재가에 집착하는 등 모순적인 겉모습을 보여왔다. 왜? 비록 정의로움의 선은 진즉에 넘었을지라도 인간으로서의 선만큼은 넘지 아니해야 할 것을 그도 분명 알고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결국 그 또한 모델이 된 악한과 같이 마지막 선까지도 훌쩍 넘어가고야 말았다. 무장세력을 보내 참모총장을 납치했고, 수도를 향해서는 공수부대를 진격시켰으며, 기어이 신군부를 앞세워 대통령까지 압박했다. 어쩌면 두광은 두환과 다를지도 모른다는 내 기대는 잘못되었던 걸까. 꿈을 가진 자가 모든 힘을 쏟아부어 승리를 쟁취해 내는 것. 내가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해피엔딩이 펼쳐졌는데도 밀려오는 무력감에 도저히 기뻐할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그는 정상호의 일갈에 그만 멈추어야만 했다. 혁명이든 반역이든 전복의 꿈을 꾸었다면 우선은 멈춘 뒤 조금 더 기다려야만 했다. 그가 가진 장기짝에는 무력 외에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민주주의 국가에서 무력을 통해 얻은 권력에는 정통성 따위 존재하지 않기에, 최소한 저 멀리 오스트리아 출신의 독일인이 그러했듯 그에게는 국민의 선택이나마 받아낼 필요가 있었다. 결국 그는 쿠데타를 성공시켜 원수의 자리를 찬탈하기에 이르렀지만, 그와 대립했던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정우성)의 말처럼 그의 마지막은 인간으로서 자격 미달이었다.



영화는 이제껏 전두광에게 초점을 맞추어 그의 이야기를 풀어왔음에도 끝내 이 작품을 하나의 승전보로 만들지는 않았다. 하나회는 춤추고 전두광은 웃어댔지만, 영화의 엔딩에 경쾌함은 없었다. <서울의 봄>은 역사를 비틀어 그들을 심판하거나 반대로 그들을 미화하여 함께 축하하는 대신, 악역의 승리를 통해 사회를 되돌아보게 하는 피카레스크 장르의 본질을 살리기로 선택했다. 그렇게 한 명 한 명 극 중 인물과 실존 인물이 겹쳐지며 우리의 시선은 서서히 스크린 밖 현실로 이어졌고, 조심스레 돌아본 지금의 세상은 영화의 시작을 알린 전두광의 대사처럼 바뀐 것 없는 그대로와 같았다.


물론 이제는 전두광과 노태건(박해준), 아니 전두환도 노태우도 남아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세상은 여전히 차가우며 그 추위에 지친 사람들은 점점 더 정치로부터 고개를 돌려가고 있다. 그 시절의 악인들에 비할 수는 없더라도 많은 정치인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안위만을 신경 쓰고 있으며, 그들을 따라다니는 유사 정치인들은 광장 위에 갈라서서 맹목적 혐오를 쏟아내고 있다. 국민의 대리인이 아닌 정당의 대변인이 된 그들은 과연 진정으로 정치를 하고 있기나 한 걸까.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을 경계하기 전에, 우리가 귀 기울일 건전한 정치 환경부터 이루어져야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무리 사이가 가깝다고 할지언정 서로 간의 대화 속에 정치적 이슈를 끌어오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언제부턴가 정치는 싸움이 되어 버렸기에, 우리의 삶과 미래보다 누구를 지지하는지가 더 중요해져 버렸기에. 이런저런 이슈에 진영 논리가 덧씌워져, 해결책은 미뤄둔 채 손가락질만을 거듭하다니. 아군끼리 총구를 겨누었던 1979년의 12월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제자리걸음을 반복해 온 걸까. 만약 이대로 당파 싸움이 계속되고 그 무의미한 혐오에 신물이 나 사람들이 조금씩 등을 돌려 버린다면, 그 틈을 타 새로운 전두광이 또 한 번 야욕을 드러낼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영화 <서울의 봄>이 지금 우리를 찾아온 것은, 과거의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더 늦기 전에 우리와 저들 모두에게 경고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영화를 본 뒤 작품 속 그들에게 분노하는 것도 또 암울했던 과거에 허탈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겠지만, 한 걸음만 더 나아가 지금의 세상을 천천히 둘러봐 보는 건 어떨까. 그리고 보다 건전한 정치인이 일어설 수 있도록 권력의 감시자로서 저들을 지켜봐 보는 건 어떨까 싶다. 작품 속에서 자신이 맡은 바 책무를 다한 이태신과 같이 현실 속 국민의 대리인들이 하나둘 제자리를 찾아간다면, 언젠가는 분명 차가운 서울에도 봄이 찾아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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