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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Sep 05. 2024

또 한 번의 우화를 기다리며

<조커: 폴리 아 되> 기대평

지난 2019년에 개봉했던 영화 <조커>가 준수한 흥행 성적에도 불구하고 꽤나 많은 우려와 혹평이 뒤따랐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주 일차원적으로 생각해 보자. 주인공이 범죄자라는 캐릭터 설정의 시작에서부터, <조커>와 그 후속작 <조커: 폴리 아 되>는 어차피 호불호가 극명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우리는 질서로 유지되는 사회공동체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일생의 모든 순간들을 법과 윤리 등으로 짜인 심리적 울타리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애초에 사회라는 집단을 처음 만든 계기부터가 혼란과 위험이 가득한 자연상태로부터의 탈피였기에, 그것이 DNA에 새겨진 선천적 본능에 의해서든 혹은 사회화를 통한 후천적 학습에 의해서든, 우리는 대개 혼돈보다는 질서를 선호하고 택하게끔 진화해 왔다.


물론 이러한 울타리 덕분에 사회의 안정과 안전이 유지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따금 그 틀이 거대한 벽처럼 높아져 우리의 생각을 가로막고는 극 중 인물과의 교감을 차단하기도 한다. 이제껏 '조커'를 그린 많은 작품들 속에서 그는 단지 인지도가 높을 뿐인 한 명의 빌런과 다름없었다. 고담시를 지키는 히어로인 배트맨의 적, 아치 에너미. 잠시 이야기를 돌리자면, 개인적으로 나는 '히어로'와 '빌런'이라는 표현을 선호하지 않는다. 이 단어들은 너무나 간단하게 캐릭터를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기준으로 분류하고 낙인찍어 버리니까. 이전에 한 차례 던졌던 질문이지만, 과연 우리는 역사 속 위인들 모두를 히어로라 부를 수 있을까? 우리의 슈퍼히어로가 상대국의 입장에서는 슈퍼빌런이었을지도 모르는걸.



그렇기에 나에게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는 특별했다. 그는 빌런이었지만 동시에 히어로였고, 끝내는 그 모든 꼬리표를 떼고 혼돈이 되었다. 아서(와킨 피닉스)에게 있어 조커로의 각성은 단순한 복수나 광기 어린 기행이 아니라, 일종의 자아 해방과도 같았다. 비록 미디어는 그를 시위대의 상징으로 만들며 이런저런 정치적 어젠다를 덮어씌웠지만, 사실 그에게는 어떠한 의도도 없었으리라. 그는 그저 조크를 던졌을 뿐이었고, 사람들은 멋대로 그들 각자의 리액션을 보였을 뿐이었으니까. 때문에 나는 <조커>를 하나의 성장영화라고 생각했다. 가정과 사회와 시스템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비로소 환하게 웃을 수 있게 된 한 인간의 성장담이자, 날개를 펴지 못한 관객들에게 건네는 위로와 격려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다시 이야기를 돌리자면, 사회적 울타리 속 질서를 지켜가는 대중과 그 경계에서 벗어난 조커 사이에는 넘어가기 꽤나 힘든 장벽이 존재하고 있다. 그야 그는 우리가 피하고자 하는 혼돈 그 자체이니까. 그럼에도 영화 <조커>가 사랑받았던 이유는, 필시 관객들로 하여금 그 높은 벽에 뛰어들게 할 정도의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것이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달랐을 텐데, 나에게는 진득하니 그를 누르던 거울 앞의 음악과 그에게서 흘러넘친 새까만 그림자가 그와 시선을 맞추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온몸이 거부하는 그에게서 차마 못 본 체할 수 없는,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릴 수 없는 교집합을 찾고 말았기에, 나는 비로소 그를 마주할 수 있었고 이윽고 그를 추앙할 수 있었다. 아서는 끝내 그 자신이 되었다. 페니의 꼭두각시도, 머레이의 조롱거리도, 미디어에 의해 왜곡된 정치적 우상도 아닌 아서 플렉 자기 자신이 되었다. 이러한 그의 변화야말로 <조커>를 사랑하게 만든 가장 큰 요인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야기의 다음을 그리게 될 <조커: 폴리 아 되>에서,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게 되었다. 이제 그의 곁에는 할리(레이디 가가)가 서있고, 그의 주변으로는 광대 마스크를 쓴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아서는 기꺼이 그들의 우상이 되어준 걸까? 정녕 스스로 상징이기를 받아들인 걸까? 지지자든 추종자든 그의 곁에 모인 사람들은 어떠한 생각들을 품고 있을까. 혹시 조커가 세상이라도 바꿔주리라 믿고 있을까? 자신들의 분노를 대신하여 쏟아주리라 바라고 있을까? 1편의 조커에게 있어 남들의 생각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 그는 그저 코미디를 했을 뿐이었으니까. 그러나 2편의 그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자꾸만 올라온다.


조커는 말 그대로 혼돈이어야 한다. 쉽사리 마주할 수도, 단번에 공감할 수도, 또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어야 한다. 그렇게 그의 행적을 좇으며 끊임없이 고민한 끝에야 어지러운 혼돈 속에서 나 자신을 찾을 수 있게 되니까. 그전에 무어라 프레임을 씌워 버린다면 조커는 더 이상 혼돈이 아니게 되며, 우리에게 그는 그저 단순한 정치 사범으로, 또는 파괴적 분노의 대변인으로 비치게 될 뿐이 된다. 우리가 영화 <조커>에 호응했던 것은 단지 배트맨의 적인 조커가 탄생했기 때문만은 아니었지 않은가. 그토록 우리의 심장이 뛰었던 것은 분명 그가 이루어낸 성장과 해방을 함께하며 우리 자신도 변할 수 있음을 목도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벌써부터 해외로부터 호와 불호가 나뉘는 시사회 후기가 들려오고 있지만, 서두에서 언급했듯 이 작품은 오직 호평만으로 또는 혹평만으로 채워지기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다. 질서와 정면으로 맞서는 혼돈을 담고 있기에, 그로부터 도출되는 결괏값이 각양각색인 것도 당연지사이리라. 그러니 이 지극히 주관적이고 몹시도 상대적일 작품과 마주할 때, 재미가 있고 없고의 평가를 떠나, 내게는 과연 어떻게 다가올지에 한번 집중해 보는 것은 어떨까. 부디 곧 만나게 될 그가 자신을 재단하는 온갖 틀들을 걷어차기를, 그러며 피해자와 가해자를 넘나드는 한 명의 광대이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 한번 자아를 표출하며 진정한 초인(위버멘쉬)으로 거듭나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 그의 성장이 곧 스크린 너머 우리의 성장으로도 이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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