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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Sep 17. 2024

사이다의 늪에 빠진 우리에게, <베테랑2>

통쾌함 뒤에야 비로소 펼쳐지는 결말의 진짜 의미

범인을 찾는 추리극과 범인을 쫓는 추격극. 형사물을 구성하는 두 개의 큰 줄기 중, 작금의 대한민국 상업영화계에서는 후자에 방점을 두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빈번하다. 여전히 경찰들은 용의자를 찾기 위해 내사를 거치고 증거를 수집하지만, 그러한 과정은 대개 카메라가 비추지 않는 화면 밖 세상에서 이루어진다. 설령 그 일부가 화면에 담긴다고 한들 속도감 있는 편집을 통해 수사는 금세 흘러가고, 어느샌가 나도 몰래 범인과 공방을 펼치고 있는 것이 21세기 형사물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범인의 정체는 -적어도 관객에게 있어- 더 이상 미스터리가 아니다. 영화는 이제 범인의 얼굴 위에 음영을 씌워 실체를 감추지도, 서술 기법을 통해 관객의 오인을 유도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캐스팅 단계에서부터 선역과 악역을 공개하며, 그것을 하나의 마케팅 요소로까지 활용하고 있다. 이처럼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이미 주인공과 적대자가 공공연히 드러나기에, 자연히 우리의 기대 또한 누구를 잡느냐에서 벗어나 어떻게 잡아내는가로 옮겨가게 된다.



어떻게 잡느냐는 질문 속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담겨있다. 가령 어떻게 일개 경찰이 초법적 재벌에게 죄를 물을 수 있을지(<베테랑>), 해외에 근간을 둔 범죄조직에는 과연 어떻게 맞설 수 있을지(<범죄도시 시리즈>), 예상치 못한 북과의 공조에는 또 어떻게 대응하고 함께할 수 있을지(<공조 시리즈>). 추격이라 부른다고 하여 결코 달리기 시합만이 전부는 아니기에, 필시 개봉되는 영화들의 개수만큼 다양한 추격극이 펼쳐질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현실은 어땠는가. 자신만의 답을 찾고자 고민하고 도전하는 대신, 누군가의 흥행 공식을 베껴 와 그저 뻔한 아류작들을 찍어냈다. 당장 위의 세 시리즈를 떠올려보자. 분명 각각이 서로 다른 줄거리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모두가 액션 일변도에 다소간 코미디가 섞인 유사작들에 불과했다. 물론 해당 작품들이 나름 저마다의 특색을 지니고 있던 것은 사실이나, 극장을 나온 뒤까지도 머릿속에 남았던 것은 오직 서도철(황정민)과 마석도(마동석) 그리고 림철령(현빈)의 액션뿐이지 않았는가.


물론 이는 어느 정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2010년대에 들어 확산된 ‘사이다’라는 표현이 사회를 반지성적으로 양분해 버렸으니까. 내 마음에 들어 가슴이 뻥 뚫리면 사이다요, 내 뜻과 달라 답답하고 화가 나면 고구마니,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추리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빨리 답지를 열어 누가 범인인지를, 아니 정확히는 누가 맞아도 싼 나쁜 놈인지를 확인하고 싶어 했다. 결국 그러한 사이다식 기조가 주류가 되며, 캐릭터와 이야기는 더욱 단순해졌고 결말은 더욱 시원해졌으며, 그렇게 극한의 통쾌함만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들이 범람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문화적 배경 속에서 바라본다면, 전편으로부터 9년 만에 돌아온 <베테랑2>가 호불호의 중심에 있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다. 영화는 여전히 화려한 액션을 뽐내며 권선징악을 달성했지만, 전편과 달리 그 끝에 넘실대는 도파민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이 영화를 싱겁고 찝찝하다 받아들일 수도 있으며, 어쩌면 전편에 기반한 기대와의 차이로 인해 실망까지 느낄 수도 있으리라. 통쾌하다기에는 무언가 부족했고, 철학적이라기에는 어딘가 얕았던 것이 바로 <베테랑2>의 아쉬운 현주소다.


그런데 웬걸. 나름대로 영화의 강점과 약점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작품에 대한 평가들을 보며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당히 많은 수의 혹평들이 해치 서사의 공백을 지적했고, 대부분의 호평들은 이야기 바깥 액션과 연기에 치중되어 있었다. 그래, 실제로 해치의 동기와 신념은 작중에서 설명되지 않았고, 특유의 액션과 연기의 유려함은 누구나가 공감하는 사실이니까. 그렇게 충분히 이해하고 납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느낀 감정들을 전해보고 싶었다. 또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면 약점이 곧 강점이 될 수도 있음을 외쳐보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시작한 이 글은 <베테랑2>에 대한 나의 자그마한 변호다.



연쇄살인범 해치, 박선우(정해인)는 과연 정의로운 사람이었을까? 그가 정말 신념을 갖고 정의를 관철한 심판자였는지, 혹은 그저 명분이 필요했던 살인마일 뿐이었는지. 영화는 구태여 이를 확실히 하지 않은 채, 그저 살인은 살인이라며 그를 악인으로 내세웠다. 이제껏 슈퍼히어로를 다룬 많은 글들에서 강조해 왔듯, 적대자의 서사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빌런들의 철학이 공고해야만 작품이 일차원적 선악 구도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그래야만 관객인 우리까지도 사회와 자신을 새로이 돌아볼 수 있게 되니까.


그런데 오늘날의 한국 형사물 시장에서 과연 깊이 있는 인물상이 환영받을 수 있을까. 앞서 언급했던 세 시리즈를 떠올려보자. 그 속의 악역들 중 제대로 서사가 주어진 이는 몇이나 될까. 영화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나마 쥐고 있던 마이크마저 빼앗은 뒤, 그들을 악인으로 만들 자극적 장면들만 나열하기 바빴다. 그야 앞서 이야기했듯 이제 얼마나 시원한 액션으로 얼마나 통쾌하게 권선징악을 이루는가가 형사물의 핵심이 되었으니까.


우리는 캐릭터들의 이야기에 더 이상 이전만큼 관심을 갖지 않는다. 동기가 어떻고, 과거가 어떻고, 신념이 어떻고. 어쩌면 우리는 그저 절대적인 악이 절대적인 선에 의해 응징당하고 복수당하는 모습이 보고 싶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영화는 이제 현실을 담으려 하지 않는다. 의제를 끌어와 관객들에게 질문하지도, 함께 고민하자며 공론장을 세우지도 않는다. 언제부턴가 영화는 단지 스트레스를 잊기 위한 휘발성 재미의 수단으로 전락했기에. 그러니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베테랑2>에서 해치의 서사가 전무했던 것은 -분명 꿈보다 해몽이겠지만- 사이다의 늪에 빠진 우리에게 가하는 류승완 감독의 충격 요법이었다고 말이다.



개인적으로 <베테랑2>의 가장 큰 강점은 빗속의 사투도 배우들의 표정도 아닌 서도철의 내적 성장이라고 생각한다. 혹시 전편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조태오(유아인)의 공판 소식이 TV에서 보도되고 피해자의 가족들이 그 뉴스를 바라보며, <베테랑>은 뻔하지만 통쾌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러한 형식을 시리즈의 전통으로 삼고자 했던 걸까. 2편 역시 박선우의 체포 소식으로 이야기가 갈무리되어 갔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 영화는 1편과 정반대의 선택지를 택했다.


뉴스가 페이드아웃 되고 경쾌한 음악으로 이어졌던 1편과 달리, <베테랑2>의 마지막은 고요하고 어스름해 숙연함까지 느껴졌다. TV 속에서는 범인을 체포하는 쾌거를 이루었다며 총경의 브리핑이 흘러나왔지만, 서도철은 그와 함께 기뻐하는 대신 TV를 끄고 가족들을 돌아보았다. 필시 많은 관객들은 1편과 같은 통쾌함을 기대했을 텐데, 대중의 기대와 시리즈의 기조를 저버리며까지 영화가 카메라를 돌려 서도철을 비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이다가 주는 자극적인 쾌감은 극장을 나온 순간, 마치 탄산 거품처럼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고 만다. 그럼 우리는 또 금세 비워질 독에 다시금 사이다를 채우기 위해 더 큰 자극을 찾아 발걸음을 옮기겠지. 마치 미디어에 홀려 이리저리 이끌리는 좀비 떼와 같이 말이다. 만일 <베테랑2>가 전편처럼 악의 몰락만을 비추며 끝났더라면, 분명 잠깐은 그 시원함에 빠질지언정 결국 우리도 서도철도 그리고 영화 자체까지도 누구 하나 성장하지 못한 채 더 깊은 늪 속으로 잠겨갔을 뿐이리라.


아빠가, 생각이 짧았다.


서도철은 작품 끝에 가서야 자신을 돌아보고 아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가 누군가에게 가슴속 이야기를 꺼내놓은 것도, 그가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자 했던 것도. 말보다 주먹이 앞섰던 그였기에 어쩌면 이번이 처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큰 고민 없이 영화를 봐왔듯, 그 또한 그저 죄지은 놈을 향해 응징의 주먹을 날리기만 하면 됐었으니까. 대화를 통해 매듭을 풀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매듭째로 문제를 잘라내어 한 방에 해소하는 편이 더 쉽고 더 신났을 테지.



하지만 2편의 결말 속 그는 TV를 보며 웃음을 터트리지도 총경과 함께 환호성을 지르지도 않았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자 이번 사건을 해결한 주역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는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며 부족함을 인정하고 과거를 반성했다. 그 역시도 해치로부터 다소간 대리만족을 느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베테랑> 속 자신의 모습이 수많은 사람들을 사이다의 늪으로 끌어들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어둑한 식탁에서 홀로 끼니를 채우던 가장의 뒷모습은 죄책감과 자괴감을 떠안은 듯 잔뜩 짓눌려 보였다.


극장을 나와 며칠이 지난 지금도 그의 고백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래, 어쩌면 전편을 그저 통쾌함만으로 기억하고 있던 나 자신이야말로 생각이 짧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범인을 잡는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닌데. 통쾌한 사이다에 취하고자 엄벌을 외쳐댔을 뿐, 나는 기사 뒤편 피해자들에게는 눈길조차 보내지 않았었구나. 물론 죄인에게 몇 년을 구형했고 몇 년이 선고되었는지도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더 이상의 피해자가 희생되지 않도록 예방책을 논의하고 해결책을 궁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조금씩 처벌보다 치유에 힘을 쏟는, '인간의 얼굴을 한 법치국가'로 나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




서도철의 고백 이후 그의 곁은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아들과 아내까지 식탁에 둘러앉으니, 야심한 새벽마저 따스한 저녁처럼 느껴지더라. 짜디 짜다 불평하면서도 온 가족이 라면을 나누어 먹었듯, 나부터가 세상을 달리 보기 시작한다면. 비록 모든 것이 내 마음에 꼭 맞지는 않더라도, 서로를 이해하며 더불어 사는 사회를 향해 한 발자국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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