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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규리 Mar 11. 2024

퇴근에만 유연한 회사

직장인에게 정시 출퇴근은 매일매일 엄수해야 하는 회사와의 계약과도 같다.

다만 엄격하게 지켜야 하는 출근 시간과 달리 퇴근 시간을 넘기는 일은 유연하게 많다.


'자율출퇴근제', '주 40시간' 등의 제도가 우리 회사에도 적용돼야 하건만, 부서의 장에게 팀원의 정시퇴근은 불편한 것만 같다.


우리 팀의 경우 불가피한 야근이 많아 오전 10시가 정규적인 출근 시간이지만 10시와 11시 사이에 출근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자 하루는 팀장님이 단체방에 메시지를 남겼다.


“내일 오전 10시까지 다들 오는지 지켜볼 거야”


아니, 야근에는 관대한 팀장님이 출근에는 이리 엄격하다고? 다들 같은 마음에서였는지 답톡은 없었다. 다음날 팀장님은 9시 59분부터 초읽기를 하기 시작했다. 10시 01분부터 들어온 사람은 "누가 10시 넘어서 오래!" 하는 귀여운(?) 꾸중을 들어야 했다.


하루는 오후 7시가 되기 전 일어서니 팀장님은 시간을 보더니 "벌써 가나?"라고 이야기를 하셨다.

나는 뼈 있는 대답을 남기고 떠났다.

"일찍 와서 일찍 들어가요, 팀장님."


조직장 입장에서 조직원이 ‘워라밸’이라 이야기하면 일과 삶의 분리를 넘어 마치 일은 삶이 아니라는 경향으로 바라보는 듯하다. 하지만 나에게도 정규 근무시간 동안의 일은 삶에서 꽤 중요한 부분이다. 주어진 시간 안에서 밀도 높게 일한다. 밸런스의 한쪽엔 소중한 사람들과 휴식이 남아 있고 이런 시간이 없다면 밸런스는 무너진다.


팀장님에게 일은 곧 삶이다. 클라이언트에게 연락이 올까 싶어 점심도 자리에서 하신다. 팀장님과 나의 직장관은 결코 같을 수 없으리라. 하지만 그는 내가 중요시하는 일의 결과를 점수로 평가하는 권한을 갖고 있기에 그와 나의 선에는 조율이 필요하다.


작년 연말 평가시즌이 끝난 뒤에 있는 의례적인 면담이 기억에 남는다. 팀장님의 코멘트는 예상이 가능하면서도 예상 밖의 것이었다.


“일을 위해 개인적인 저녁 시간을 포기한 팀원들을 중심으로 좋은 평가를 줄 수밖에 없었다 “


야근을 많이 한 순으로 평가를 잘 주는 것이라면, 팀장의 역할은 AI로 대체가능한 일순위 직업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개인의 업무성과를 상대적으로 평가하는 일은 힘들 수 있지만, 팀장의 가장 중요한 권한인 평가를 저렇게 기계적으로 주셨다는 건 공정하지 않은 처사란 들었다.


업계에서 최고의 회사를 다닌다는 자부심으로 이직을 해서 일을 배울 수 있겠다는 희망감이, ‘조직은 어디든 비슷한 것일까’라는 회의적인 태도로 변할 때가 많다.


오랜 학교생활을 하는 동안 어느 조직이든 공정해야 한다는 도덕적인 관념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 하지만 사회는 공정하지 않을 때가 많다. 이미 태어날 때도,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각자가 다른 기준으로 평가받고 성공하는 모습을 많이들 보아왔지만 애써 기피했을지도 모른다.


야근을 하면 다음날 늦게 출근하는 게 공정할 수 있다. 오래 일한 사람보다 퍼포먼스 높은 사람이 좋은 고과를 받는 게 공정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정답대로 흐르지 않는 듯하다. 그럴 때도 있고, 그러지 않을 때도 있다.


직장인으로서 어른이 된다는 건 이래서 조금 더 쌉싸름한 맛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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