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나는 5년 간 지속해 왔던 정규 요가강사 일을 잠시 멈추기로 결정했다. 아니, 이것은 사실 내 결정만은 아니었다.
이것은 마치 소심한 학생이 큰맘 먹고 발표를 하기 위해 겨우 손을 들려고 마음먹자마자 선생님이 바로 그 학생을 선택한 것과도 비슷한, 숙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뭘 계산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발생한 일이며 뭐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은 한 일이 그냥 생겨버린 것이다. 속이 시원한 것도 아니고, 뭔가 그렇다고 아주 속상한 것도 아니었다.
사실 요가강사라는 직업은 내 삶에서 가장 많은 파이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다른 직업들도 있었고, 사실 그 직업들에서 조금 더 나은 수익을 얻고 있었다. 하지만 요가강사라는 직업을 놓기는 싫었다. 왜냐하면 그 직업은, 나에게 언제든 숨을 수 있는 은신처와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수련공간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마치 현실에서 입고 있던 모든 옷들을 벗어던진 목욕탕에 있는 말간 아이처럼 아주 깨끗하고 순수했다. 나는 거기서 느껴지는 뜨겁고도 나른하고 때로는 열정적인, 그 모든 것들을 아주 사랑했다. 수업이 끝나고 나면 나는 이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기쁨과 감사함으로 가득 차올랐다. 나는 그 기분을 계속 만끽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커다란 상처가 있었다. 나는, 체형이 많이 틀어져있는 요가강사였다. 그 말은 즉, 이렇게 공개적으로 얘기하기는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기본 요가 동작이 잘 되지 않았던 5년 차 요가강사였다는 말이다.
물론 내 체형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는 아주 많은 공부를 했고, 아주 많은 지식을 머리에 넣었다. 또 다양한 요가수련을 하면서 조금씩 변화를 맛보았으나 그 속도가 너무 느렸고, 나는 계속해서 좌절했다. 하지만 거기에 의문을 가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나의 정체성을 요가라고 정의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것으로 고칠 수 없다고 얘기하는 순간 나를 부정하는 것과도 같이 느껴졌다. 어떤 선생님들은 요가로 척추 측만도 고쳤다던데? 네가 열심히 안 해서 그런 거 아니야? 나는 계속 스스로에게 의심을 품었고, 무리한 수련으로 나의 근육들을 파열시켜 몇 달간 더 쪼그라든 햄스트링으로 살아야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나는 비뚤어진 치아를 바로 잡겠다고 잇몸에 피를 내면서 열심히 치실질을 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 현실을 받아들이자 나는 조금씩 요가와 멀어져 갔고, 기울어진 건물의 구조를 잡기 위한 몸의 교정운동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 8월 말, 교정운동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나는 내 몸이 얼마나 많이 틀어져있었는지 완전히 자각하기 시작했다. 운동 10년 차라는 타이틀이 주는 자만심에, 그동안 보지 않으려고 애써 무시하며 점점 더 기울어져간 나의 중심이었다.
난 그렇게 아주아주 쓴 약들을 달콤한 사탕도 없이 그냥 삼켜내기 시작했다. 아팠다. 하지만 기꺼이 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나라고 생각했던 무언가를 내려놓고, 역설적으로 내 중심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요가강사라는 직업은 앞서 말했다시피 내 삶의 은신처와도 같은 것이었다. 2018년, 회사생활을 하는 와중에 시작하게 된 요가강사. 이는 평일을 버텨내야 했던 나에게 휴식을 주는 숲의 쉼터와도 같았고, 추후 회사를 벗어나 프리랜서 생활을 하면서도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고향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이렇게 삶에서 은신처가 있다는 것은 분명한 안정감을 주기도 했지만, 나라는 작은 인간에게는 오히려 다른 것에 100% 헌신하지 못하게 하는 비빌 언덕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 비빌언덕이라는 것이 나로 하여금 "아, 이거 했다가 안되면 다시 요가강사로 완전히 전향하면 되지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라면서 내가 현재 하기로 선택한 일들에 완전히 헌신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나는 마치 쿨병에 걸린 사람처럼 게임에서 져서 속상한 데도 "It's good enough"라며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그렇게 나에게는 해가 지날수록 단점을 아주 정교하게 가릴 수 있는 스킬 같은 것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또 나는 언제나 요가를 사랑했으므로, 그 모든 게 합쳐져 내 수업을 사랑해 주시는 분들도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위안 삼아 바꿀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서도 어쭙잖은 명상 지식들을 늘어놓으며 아예 못 본 척 안대를 썼다. 그것도 몇 년간을.
나는 한 달간 체형 교정 운동을 거의 매일 같이 열심히 했다. 하지만 별 기대는 없었던 게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내가 그렇게 빨리 변화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말이다. 한 달 만에 사진을 찍고 나서 나는 놀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틀어졌던 체형이 불과 며칠 만에 중심선으로 성큼 돌아온 것이다. 대박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며 기쁘면서도 뭔가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알게됐다.
"삶에서 뭔가 멈춤이 있다는 건 이유가 있는 거야. 이는 기존의 믿음을 바탕으로 무작정 밀고 나가라는 것이 아니라, 저항에 대해서 잘 들여다보고, 시선만 살짝 돌려 다른 방향으로 시도해 보라는 뜻인 거지. 그리고 그러한 멈춤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때로 꼭 필요하기도 해."
그랬다. 저항을 다룰 수 있는 방법은 무시하는 것도 아니었고, 기존의 것을 고집하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이 저항을 갓난아기처럼 껴안고 이해하고, 필요하다면 새로운 방향을 살펴보는 것뿐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얼마나 고집쟁이었는 지를 알게 됐다. 물론 이 고집은, 제 딴에는 아주 많이 두려웠을 것이다. 두려워서 감히 새로운 곳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저항은 몸이었고, 요가를 고집하는 마음이기도 했다. 고집을 이해하고 내려놓으니 몸이 변하였고, 몸이 변화하니 고집이 내려 놓아졌다.
그렇게 정규적인 요가강사라는 직업은 잠시 사라졌다. 하지만 난 여전히 요가가 좋다. 그러기 위해 지금은 잠시 재정비하는 시간이라고 느껴진다. 보다 내 중심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진정한 요가를 나누기 위해서.
이렇게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는 중에 삶의 다양한 부분에서도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정리를 하며 이전에 썼던 글들은 하나하나 보내주었다. 특히 "나 잘났죠? 제발 나 좀 봐줘요. 나 잘났잖아요! 왜 나 안 봐요!" 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던 글들은 따뜻한 시선으로 작별인사를 했다.
그 와중에 먼지가 켜켜이 쌓인 서랍에서 정성스레 쓴 편지를 발견하듯 내가 얼마나 글을 통해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었는 지도 알게 되었고, 그 덕에 오랜 시간 방치해 두었던 브런치도 다시 재개했다.
브런치에 정기적으로 글을 연재해보고 싶다는 설렘이 가을낙엽처럼 슬며시 내 안에 가라앉았다. <몸의 노래>라는 매거진 이름이 떠올랐고, 지금 이렇게 날 것의 글을 쓰고 있다.
매일 몸을 움직이며 느끼는 것들을 나누며 사람들과 더 깊게 연결되고 싶다. 몸에서 느껴지는 모든 감각, 아픔, 쪽팔림, 고독, 사랑, 순수함, 열정, 감사 같은 것들을 날 것으로 공유하며 그대들과 더 깊게 연결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 내가 이곳에 쏟아부을 새로운 모양의 헌신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