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9일 이후로 브런치에 글쓰기를 멈췄다.
모야모야 병 진단으로 2번의 수술이 결정이 된 후 급히 회사에 휴직계를 냈고, 첫 번째 수술이 끝난 지 한 달 반쯤 지난 시점이었다. 1년의 무급휴직이 주는 부담감이 꽤 컸지만, 나의 이혼으로 깨져버린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새로 지으며 아직은 작고 어린 내 소중한 딸아이에게 준 마음의 상처를 돌보기에 집중하는 시간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깟 돈이야, 다시 벌면 되지.' 싶기도 했다. 게다가 한 해에 개두수술을 두 번 받아야 하는 내게 충분한 휴식과 요양은 필요하기도 했다.
그렇게 첫 번째 수술이 끝나고 체력을 회복하고 있던 어느 날, 나의 브런치 글을 보고 출간제의가 왔다. 사기는 아닌가 싶었지만 고심 끝에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본격적으로 집필을 시작했다. '크리스천 이혼'에 관한 에세이. 내가 겪은 일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간접적 경험이 되고, 위로가 되기를 바랐다. 브런치에도 '이혼'이 흔한 소재가 되었고, 이혼문학이 성행하며 심지어 '돌싱글즈'나 '결혼지옥'과 같은 TV프로그램이 인기 순위에 항상 있을 정도로 예전보다 이혼은 다소 사람들에게 받아들이기 쉬운 일이 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 사회는 여전히 보수적이기도 해서 이혼을 쉬쉬하는 분위기가 남아있는 곳도 있는데, 나의 직장이 그러했다.
책을 쓰게 되면서 직장 상사에게 불가피하게 나의 이혼에 대해 알릴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불씨가 되어 나의 휴직이 퇴사가 될 위기에 놓이게 된 것이었다. 가만 생각해 보면 나는 늘 그랬다. 솔직하지 않아도 되는 걸 알면서도 늘 솔직하려 했고, 쉬운 길로 갈 수 있으면서도 좀 더 어려운 길을 택하곤 했다. 제 아무리 익명으로 책을 낸다 한들 크리스천이 이혼을 드러내 놓고 책을 쓰는 것은 그 누구도 '선뜻' 하지 않는 길이었다. 이미 나는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굳이 하려고 해 보겠다고 달려들었다. 모험하기를 선택한 것은 나였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어쩌면 되지도 않는 바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선택을 응원해 주길 바라는 그런 희망말이다. 어렸을 적 엄마의 이혼으로 꽤 불안정하고 힘든 삶을 살았다. 물론 친아빠와 함께 살았다 한들 그 삶이 풍요롭고 행복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결손 가정에서 살아가면서 내가 자연 체득했던 것은 세상은 그리 녹록지 않다는 것, 특히나 이혼한 여성에게는 꽤 따가운 시선과 수군댐이 따라붙는다는 것이었다. 그것과 더불어 한 가지 더 알게 된 사실은 그 모진 세상과 불안정한 삶이 주어지더라도 자식을 지켜낸 부모의 태도나 양육 방식에 의해서 분명 자녀의 미래는 달라진다는 것이었다.
나 또한 이혼의 길을 선택하면서 수차례 고민했다. 딸아이가 없었다면 하지 않았을 고민이었다. 단칼에 잘라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와의 관계에 발목이 잡힌 건 순전히 딸 때문이었다. '내가 나의 엄마처럼 내 아이를 혼자서 잘 길러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사로 잡혔지만 그보다도 하루하루가 지옥인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이에겐 더 고통일 것 같아서 결국 이혼을 택했다.(물론 이 조차 나의 합리화일지도 모르지만.)
요즘 즐겨보는 TV프로그램 중 금쪽같은 내 새끼에는 종종 이혼가정 혹은 이혼에 준하는(?) 가정, 불화가 심한 가정들이 나온다. 문제가 있는 아이들을 상담하는 프로그램인데 어찌 문제는 부모에게 더 있는 것 같다. 내 어린 시절의 경험과 현재 내 경험이 자꾸만 그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관심을 갖게 만든다. 나는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었기에 교실 내에 있는 아이들의 가정에 결손이 생겼을 때, 그 아이들이 갖는 생각과 마음에 대해 한층 더 공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내가 경험해 보았기에. 더불어 부모들에게도 격한 공감과 이해를 해줄 준비가 되어있다. 나도 이미 해본 일이기에. 나는 그 일을 하고 싶었다. 무너진 가정에 아주 작은 도움을 주는 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이 겉핥기식으로 주는 위로와 공감이 아닌, "맞아. 나도 해보니 그렇더라."와 같은 진심 어린 공감과 이해에서 오는 위로를 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은 하려고 드는 사람들이 잘 없다. 왜냐면 꽤나 모험이기 때문이다.
결국 휴직은 퇴사로 이어졌다. 무급휴직이었는데 백수가 되었다. 나는 교실 속에 가정의 결손으로 마음 다치고 닫힌 아이들을 어루만져주고 싶었는데 아직은 시기상조였던 것 같다. 상사분들의 입장도 이해가 된다. 되레 그분들께는 내가 금쪽이 같이 보일 거다. 쉽고 안전한 길을 가고, 능력대로 맡겨진 일만 잘 해내면 되는데 문제를 일으키고 모험을 하겠다고 달려드니 말이다. 우리 부모님께도 마찬가지다. 내가 어떤 삶을 살든 나를 응원해 주실 부모님이시지만, 좋은 대학 나와 공부시켜 놨더니 행복을 찾아 싱글이 되겠다고 하질 않나, 제 비루한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모험을 하겠다고 하질 않나, 그로 인해 서른일곱에 백수가 되질 않나... 현실적으로 한숨 나오는 딸이다. 그러니 내가 바로 금쪽이다.
책을 쓰면서, 권고사직을 가장한 퇴사, 그리고 두 번째 수술까지 다 해내느라 자발적 금쪽이가 되어 브런치를 돌볼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시원하게 백수가 된 마당에 체력관리는 해야 한다면서 PT도 끊고, 잘 먹어야 한다며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닌다. 누가 봐도 금쪽이다. 모험심 강한 자발적 금쪽이는 언젠간 해내고 싶다. 비루하고 내세울 것 없는 나의 그 삶의 경험들이 반드시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도움이 되는 그 일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