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rketer 정민 Apr 15. 2024

I Feel Like Dancing

딱 하루, 라스베가스에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 살 수 있다면?

빨간 수영복을 입은 매력적인 금발 여성이 풀파티에서 비치볼을 주고받으며 놀고 있다. 그녀는 한 남자와 시선을 교환하며 스쳐 지나간다. 동일한 여자가 마술쇼가 열리고 있는 바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성큼성큼 걸어간다. 스포티한 흰 자켓과 시크한 가죽 바지를 입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금발이 아니라 뱅 헤어스타일의 파란색 긴 머리이다. 그녀는 바텐더로부터 가면을 건네받는다. 장면이 바뀌어 그 가면을 쓰고 얼굴을 반쯤 가린 채로 가면무도회에 참가한 여성은 고혹적인 블랙드레스를 걸치고 있다. 계단을 오르다가 매력적인 남성과 마주치자 잠시 가면을 벗어 의미심장하게 시선을 교환한다. 다시 장면이 바뀌어 똑 떨어지는 흑발의 단발머리를 하고 나온 여성은 블랙 수트 차림의 남자 2명과 함께 신나게 춤을 춘다. 장면이 또 바뀐다. 이번엔 높은 포니테일을 하고 나타난 그녀는 유명한 락스타 같다. 신나게 춤을 추다 아예 소파를 뛰어넘어 그 곳에 이미 자리하고 있던 남성과 나란히 앉는다. 그와 인사하며 대화를 시작하는 여성의 위로 한 문장의 자막이 나타난다.


Be yourself or anyone else.

당신 자신이 되거나, 아니면 다른 그 누구라도 되어보세요.


그 누가 되더라도, 어떤 짓을 하더라도, 다 용서될 것만 같은, 라스베가스(VisitLasVegas.com)의 유쾌하고 생동감 넘치는 광고 캠페인이다. 같은 시기에 제작된 다른 에피소드에서는 ‘What happens here stays here’(이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이 곳에만 남는다)라는 광고 카피가 붙어있어서 더 흥미로웠다. 어떤 모습으로 놀더라도 그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기 때문에 재밌게 즐길 수 있는 곳이라니. 지금까지 수많은 도시 브랜딩 사례를 접했지만, 라스베가스의 메시지는 가장 발칙하고 임팩트가 있었던 것 같다. 카지노와 호텔이 즐비한 마법 같은 도시이기에 이런 유니크한 메시지를 이야기할 수 있구나 싶었다. 누구든 라스베가스에 방문하면 사회에서의 모습을 벗어 던지고 터부시되었던 모든 흥을 분출할 수 있을 것 같아 흥미진진하게 봤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럽게 ‘도파민 중독’이었던 내 과거에 대한 기억으로 이어졌다.


대부분의 일생을 성실하게 살아왔던 나이지만, 그런 내게도 모든 게 시시하게 생각되었던 흥부자 시절이 있었다. 대학 3학년 때까지 독서실, 도서관에 살며 일탈을 참아왔던 나였다. 언제나 4.0을 넘겼던 학점이 내 우직함을 증명해줬다. 하지만 한국과 달리, 교환학생으로 갔던 시드니에서는 학생들이 오지게 공부를 안 했기에 좀만 해도 Pass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날씨가 좋고 바다가 예쁜 곳에서는 사람들이 저절로 여유로워진다는데. 하교 후엔 바로 본다이 비치에 가서 발라당 발라당 눕는 룸메들을 보며 생각했다. 이것은 어쩌면, 다른 사람으로 살아보라는 신의 계시? 그래서 호기심이 많았던 나 역시 공부와는 담을 쌓고, 캥거루 코알라 친구들과 함께 동물적 삶을 살기 시작한다. 물 만난 고기처럼 바다에서는 스쿠버다이빙을, 하늘에서는 날다람쥐처럼 스카이다이빙을 했고, 구미호 같이 눈을 번뜩이며 밤을 즐겼다.


내면의 흥이 폭발해 놀러 다니던 중 자연스럽게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에 관심이 생겼고, 여러 디제이의 음악들을 찾아봤다. EDM이라고 다 같은 음악이 아니었다. 트로피컬 하우스에는 캘리포니아의 해변이 연상되는 청량함이 있었고, 딥 하우스는 어두우면서도 서정적인 감정선이 느껴졌다. 기승전결 흐름으로 빌드업을 하는 프로그레시브 하우스도, 솔직히 내 스타일은 아닌, 시작부터 끝까지 아주 시끄러운 빅룸 하우스도 있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여러 디제이를 디깅하며 공부한 결과, EDM의 세부 장르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일레니움, 갈란티스, 마틴 개릭스, 시갈라, 조나스 블루, 디미트리 베가스, 마시멜로 등 좋아하는 디제이도 여럿 생겼다. ‘일렉 좀 들을 줄 아는 여자’라는 작고 귀여운 일렉 부심은 신입사원이었던 나를 클럽으로 이끌었다.


한국의 클럽은 시드니와는 달랐다. 호주 사람들은 노래를 듣고 춤을 추는 데에 제 1의 목적이 있는 느낌이었지만, 한국에서는 그보다는 잿밥에 더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노래도 꽤나 별로였는데, 가장 크고 유명하다는 이태원 라운지 바에서 틀어주는 노래는 너무나 올드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평소 주변에서 눈 씻고 찾아봐도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아, 사람 구경하는 데에 꽤나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두리번 두리번하며 예쁜 이성을 찾는 미어캣 형, 팔 전체가 용이나 식물 타투로 도배된 팔토시 형, 자기 잘생기고 몸 좋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올테면 와봐라 형, 신체의 일부를 영혼까지 끌어 모은 영끌녀 등. 여러 유형들을 보고, 대화를 섞어본 결과, 이들 중 진지하게 누굴 만나러 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그냥 깃털처럼 가볍고 신나게 놀다 가자.


‘무슨 일 해요?’

‘저희는 레지던트에요.’

‘어머 그러세요~? 저희도 레지던트에요~ 호호호호호’

‘하하하하하’


우리도 레지던트라고 하면, 마치 보이스피싱인 것을 걸린 ‘검찰청’인 마냥 당황하는 사람들을 보는 게 재미있었다. 말하자면 누가 더 바보같이 구는지 대결하는 듯했다.


한 번은 친구를 따라 뭣도 모르고 나이트에 간 적도 있다. 들어선 순간 갑자기 웨이터들이 내 팔을 끌고 요리조리 다니기 시작했는데 이게 바로 부킹이라 했다. 합석하고 싶은 사람을 자기가 고르는 게 아니라 끌려 다니며 웨이터의 중매에 따라 앉아야 한다는 사실. 여기서 역설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가 얼마나 중요한 건지 알 수 있었다. 또 자유연애가 아닌 정략결혼을 당했던 과거 사람들의 고충도 체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부익부 빈익빈 정글에서 누구의 선택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은 오히려 이득인 곳이겠구나. 몇 년 전 <결혼 상대는 추첨으로>라는 일본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 책에서도 모든 비혼 남녀를 대상으로 국가가 강제적 맞선을 시행해 결혼시킨다. 이 때 살면서 이성과 데이트를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오히려 이 법에 우호적이었던 점이 기억났다. 아무튼. 의식의 흐름은 그만하고... 여기는 아무래도 잘못 들어온 것 같다. 나가자.


90년대와 00년대 노래들이 나오는 감성주점에 몇 번 가보기도 했다. 밤과음악사이, 일명 '밤사'에서는 소찬휘의 Tears, 듀스의 여름 안에서처럼 누구나 아는 레트로풍 노래들이 나왔고, 분위기 전환이 필요한 순간엔 동방신기의 미로틱 같이 섹시한 노래를 틀어 주기도 했다. 감성주점에서는 정말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었는데, 이는 바로 '한국인이 하나되는' 경험이다. 동성, 이성 할 것 없이 사람들과 떼창하고 안무를 따라 추고 나면 인류애가 샘솟았다. 그로 인해 잠시나마 인간의 본원적 외로움까지 잊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마주친 사람들 중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건 노래가 바뀔 때마다 모든 노래의 안무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소화하는 남자 듀오였다. 아 저 사람들은 정말 춤을 즐기러 왔구나. 멋지다 리스펙! 그렇게 넋을 잃고 그들을 구경하던 중 회사 사람을 발견했다. 그 순간 아버지를 만난 것처럼 가슴이 철렁해 놀 기운이 다 사라졌다고 한다.


여기까지. 사실 민망해서 급하게 마무리를 하는 것 같지만 지금은 클럽에 다닐 체력도, 의욕도, 그리고 자유도 없는 게 사실이다. 평생의 놀 기운을 다 썼던 그 시절, 아이러니하게도 재미있게 놀수록 다음날 아침 공허함과 외로움은 더 커져 있었다. 스스로 내면을 채우는 게 아니라 외부의 쾌락과 자극에만 집중하며 시간을 보냈기에. 그 시절의 나는 아무런 약속도 없으면 우울감에 빠졌던 의존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주말에 약속을 3개씩 잡고 그랬던 나날들이 있었다. 나 자신과 잘 지내지 못했기에 집 밖으로 나돌았던 어린 날의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다. 시간이 많이 흘러 지금의 나는 재미보다는 안정감과 깊은 관계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일생 동안 후회하지 않을 만큼 놀아봤고, 그 순간만큼은 아이처럼 순수한 즐거움을 느꼈으니, 완전히 의미 없던 시간은 아닌 듯하다. 클럽에는 확실히 일상의 규범이 적용되지 않는, 그 안에서만 허용되는 문화가 있다. 분명 그곳에서 습득한 자유로움도 다채로운 내 모습을 이루는 하나의 조각이 되었다고 믿는다.


*인용한 광고 : Las Vegas Commercial, Be Yourself or Anyone Else in Vegas (2018)


매거진의 이전글 최선의 선택이라는 게 과연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