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이유로 이 곳을 찾는다. 파랑을 눈에 한가득 담고 싶을 때, 수영장의 찰방대는 물로는 충분하지 않을 때, 탁 트인 하늘과 바다가 빚어내는 커다란 화음이 필요할 때. 해운대는 다정하고 활기차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태양의 변화에 따라 만들어지는 바다의 그 우연한 색상이 좋다. 한낮에 본 바다의 완전무결한 파랑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저녁의 짙은 남색과 같을 수 없고 늦은 밤 주변 불빛들과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검은 빛과도 같을 수 없다. 어쩌면 이렇게 시시각각 달라지는 찰나의 인상을 지켜볼 수 있는 여유로움을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매일 같은 풍경 속에서 다름을 포착해내 하나의 긴 스펙트럼으로 연결하는 게 우리의 삶 아닐까. 날이 좋은 한낮의 구름은 풍성한 생크림 같았고, 그 위에는 파란 도화지에 두꺼운 붓으로 무심하게 터치한 듯한 흰 색 선들이 펼쳐졌다. 천사가 존재한다면 분명 저런 이상적인 하늘 속에 있을 것이다. 일렁이는 물결의 반짝임을 지켜보니 나중에 딸을 낳게 된다면 꼭 윤슬이라 이름 짓고 싶다고 생각한다.
12월의 어느 추운 겨울날, 나는 부산에서 태어났다. 고향이 부산이라 하면 사람들은 너가? 하며 놀라곤 한다. 6살 때 서울로 올라왔기에 엄연히 따지면 자란 곳은 부산이 아니지만, 우리 아빠는 억양까지 완벽한 부산 사람이다. 엄마는 나를 가졌을 때 에메랄드가 눈부시게 빛나는 신비로운 태몽을 꿨다. 큰엄마는 그 에메랄드가 원석인지, 셋팅되어 있는 보석인지 물었고 엄마가 원석이었다고 답하자 ‘그럼 아들이야’하고 말하며 호호 웃었다고 한다. 그 당시 서울에 계셨던 친할머니는 둘째 아들의 둘째를 보러 부산행 표를 끊었지만, ‘또 딸’이라고 하자 실망해서 표를 취소했다. 하지만 100일 잔치 때 자신과 똑 닮은 손녀를 처음 본 이후 죽는 날까지 그녀를 사랑했다. 비록 에메랄드 태몽에 걸맞게 세상에 이름을 날리며 살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 시절 아기 정민의 이야기를 듣는 건 언제나 재미있다.
이번에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한 일은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바다에 뛰어든 것이었다. 그렇게 물개처럼 해수욕을 하는 딸을 보며 엄마는 웃었다. 수영을 좋아하는 나와 마찬가지로 어릴 적의 아빠 역시 부산 송도 앞 바다에서 매일 수영을 했다. 그런 자유로움을 가지고 자란 아빠는 대학 시절 전국으로 무전여행을 다녔다. 생판 모르는 남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다니, 지금 생각하면 기겁할 만한 일이지만 그 시절에는 인심이 좋아 가능했다고 한다. 서울로 올라온 후 아빠는 바다 대신 산으로 마음을 채웠고 아직까지도 쉬는 날마다 등산을 다닌다. 가끔 보면 아빠는 꼭 자연 같다. 회사에서 마음을 다쳐 돌아온 나와 언니한테 그는 말하곤 했다. ‘원래 실력 있고 나쁜 놈들이 이기는 게 사회야. 하지만 남한테 피해 안 끼치고 살면 마음은 편해.’ 그를 처음 봤을 때 엄마는 해맑게 웃는, 욕심이란 없을 것 같은 그 얼굴이 좋았다고 한다. 나는 그런 아빠의 환한 웃음을 물려받았다.
나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수십 년 전 북한에서 넘어왔다. 함흥의 외과의사였던 할아버지는 6.25전쟁이 터지자 어느 날 갑자기 군의관으로 징병되어 트럭에 태워진 채 남쪽으로 실려왔다. 같은 의과 대학에서 간호사로 있던 할머니도 마찬가지로 차출되어 남한으로 보내졌다. 잦은 폭격을 목격하던 중 할머니는 이러다 진짜 죽겠다는 생각에 과감하게 그 곳을 탈출해 도망쳤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할아버지의 소식을 들었다. 전쟁이 끝날 때 즈음 할아버지는 낙동강 전선의 포로가 되었고, 할머니는 거제 포로 수용소에 있던 그를 만나러 갔다. 그녀는 신여성답게 그에게 프로포즈하며 남한에 남자고 했다. 그 시절 포로 석방 시엔 국적에 따라 일괄적으로 본국으로 돌려보낼 것인지, 아니면 포로 개개인의 의사에 따라 선택권을 줄 것인지를 두고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양측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승만 전 대통령이 예외적으로 몇 만 명의 북한의 포로들을 집단 탈출시켰다. 그렇게 탈출에 성공한 그들은 제주까지 도망다니며 세기의 로맨스를 찍었고, 14살 나이 차를 극복하고 결혼에 골인했다. 잠잠해진 이후 그들은 나의 고향인 부산에 자리잡았다. 전후의 혼란스런 시절에는 빈 집들이 워낙 많아서 그냥 하나 차지하고 들어앉으면 자기 집이 되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외과를 개업했고, 할머니 말에 따르면 바로 그 날부터 돈을 벌었다. 엄마는 종종 내가 그런 화끈한 이북의 피를 물려받았다며 놀리곤 했다. 사람들은 흔히 엄마 아빠 중 누구를 더 닮았냐는 질문을 던지지만, 나의 경우 외모와 성격 모두 할머니를 가장 많이 닮았다며.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며, 이해할 수 없었던 시어머니를 마음 깊이 이해했다.
엄마와는 평소 뮤지컬이나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자주 보러 다녔지만, 함께 전시를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서울에서 놓쳤던 <어노니머스 프로젝트> 전시가 마침 부산에서 진행되고 있었기에 냉큼 보러가자는 제안을 했다. 전시는 이름 모를 평범한 이들이 각자의 필름 속에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담은 일상 사진으로 구성되었다. 바깥에 널어놓은 빨래 아래로 숨어 빼꼼 카메라를 올려다보는 여자아이, 반려견에게 카메라 렌즈를 보라고 저 멀리 손가락을 가리키는 노년의 부부, 어깨동무를 한 채 캉캉댄스를 추는 포즈를 함께 취한 9명의 젊은 여성들. 모두의 사연은 다르지만 사랑이라는 공통의 언어와 정서로 묶인 사진들을 다른 누군가가 아닌 엄마와 함께 본 건 정말 행운이었다. 추억이 흠뻑 담긴 그들의 사진 앞에서 옛 생각에 몇 번이나 멈춰 섰다. 나에게는 내 유년 시절을 담은 세 권의 두꺼운 앨범이 있다. 유치원 학예회 때 하얀 쫄쫄이를 입고 티아라를 쓴 채로 백조의 호수 공연을 하던 나, 예쁜 꽃무늬 패딩을 입은 채로 엄마에게 달려오던 나, 눈 오는 날 아빠의 양팔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언니와 나. 사진을 찍던 중 아기였던 내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도 많았나 보다. 언니와의 투샷에서 찡그린 채 울고 있는 나를 가리기 위해 그 버전 바로 위에 이와 똑같은 구도의 웃는 언니와 나의 모습을 오려 붙인 재미있는 사진도 있다. 딸들의 앨범을 꾸미는 건 그 시절 30대의 엄마에게 있어 커다란 즐거움이었나 보다.
“이렇게 해운대에 높이 솟은 호텔과 아파트들이 생길지 누가 알았을까. 예전엔 동백섬 근처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거든.”
세월이 변했다는 엄마의 말을 들으면서 이탈로 칼비노의 문장이 떠올랐다. ‘매번 새로운 도시에 도착할 때마다 여행자는 자신의 과거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더 이상 그 자신이 아닌 혹은 더 이상 소유할 수 없는 것의 이질감이, 낯설고 소유해 보지 못한 장소의 입구에서 여행자를 기다리고 있다.’* 세상이 변하고 사람들도 변했다. 어린 시절 개구장이 같이 명랑했던 아이는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세상의 모든 불편한 소음을 거부하는 내가 되었다. 사춘기를 지나며 20대까지 우선순위는 자연스럽게 가족이 아닌 친구들에게 먼저 향하곤 했다. 그러다 30대가 되니 그 시선은 다시 가족에게 돌아왔다. 신나게 밖순이로 놀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부모님의 머리가 하얗게 세어 있다. 나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람들은 부모님이 환갑을 넘기니 자식으로서 그들을 향한 보호본능이 생겼다고 말한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친척들과 만나는 순간들도 뜸해졌다. 부모님의 집에서 독립한 딸들의 방은 빈 둥지처럼 비어있다. 어린 시절에 누렸던 북적북적하고 정다운 순간들이 영원한 것이 아님을 이제는 안다.
모래 위에 앉아 넘실대는 파도를 맞으며 생각한다. 수많은 계절, 수많은 감정, 수많은 대화의 선율들이 이 바다를 지나왔을 것이다. 흘러가는 도중에 무슨 일이 생기든, 어떤 것을 만났든 간에 결국엔 아름다운 바다에 가 닿았음을.** 그 시간들은 결코 분절된 게 아니며 하나의 연결된 선 안에서, 그리고 나라는 사람 안에서 두터운 서사로 쌓여왔음을 안다. 그래서 이제 그 시간의 궤적들을 기록하는 기록자가 되기를 자처한다. 그건 나의 임무이자 그리움이고, 자랑이며 슬픔이기도 하다. 나는 계속 내 안에 존재하는 뿌리와 그 뜨거움의 흔적들을 기억하고, 존경하고, 감사하고, 또 사랑할 것이다.
*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 민음사
**팀 보울러, <리버 보이>, 다산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