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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원 Jun 07. 2018

이리도 염소 같은 것들

마이클 키간의 <백조의 호수>


<백조의 호수> photographed by Production Upton


“무엇을 들었니 내 아들아 무엇을 들었니 내 딸들아

나는 비오는 날 밤에 천둥소릴 들었소 세상을 삼킬 듯한 파도 소릴 들었소

성모 앞에 속죄하는 기도 소릴 들었소 물에 빠진 시인의 노래도 들었소

소낙비 소낙비 소낙비 소낙비 끝없이 비가 내리네”


소낙비 - 이연실 中



 얼마 전 발생한 홍대 몰카 사건을 보며 복잡한 심정이 들었다. 검거의 '속도'가 여성이 피해자인 사건일 때와는 매우 큰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다. 사건에 대한 조속한 해결과 피해자의 회복을 진심으로 빈다. 그러면서 똑같은 행동일지라도 주체가 누구인지, 어떠한 맥락으로 발화되는지에 따라 그 위상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최근 국내 무대에도 올랐던 무용극 <백조의 호수>는 극의 시작 전부터 염소 울음소리가 극장 안쪽에서 퍼져 나온다. 입장한 후에야 이것이 녹음된 울음소리가 아닌, 목줄을 맨 채 벌거벗고 무대 위를 돌아다니는 한 남성이 내는 소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기이한 음악이 시작되면서 그는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의 몸짓에 둘러싸여 붙잡힌다. 날카롭던 울음소리는 점차 멎고, 그는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어느 순간 이야기의 내래이터가 된다. 그는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처지를 알려준다. 처음 소개되는 인물은 지미다. 

  

<백조의 호수> LG아트센터 제공


 지미는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추억이 깃든 집을 정부정책으로 인해 잃게 된다. 실의에 빠진 그가 호숫가에서 자살을 시도하던 중 갑자기 네 마리의 백조가 나타난다. 여기서 또 내래이터는 이들을 소개한다. 그들은 피놀라와 자매들로, 마을의 성직자 로트바트가 맏언니 피놀라를 성추행한 후 이 사실이 발각될 것이 두려웠던 그가 피놀라를 포함한 자매들에게 말을 못하게 하는 저주를 내려 백조가 된 것이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내래이터는 어느 순간 로트바트가 되어있다. 성직자는 자신이 가해자인 사건을 회상하고 재현하며, 지미와 행복하게 어울리던 피놀라를 납치한다. 더욱 상실감에 빠진 지미가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성직자는 지미를 귀찮게 하는 기자로, 공권력을 동원해 그를 검거하려는 정치인으로, 결국 검거 과정에서 목숨을 앗아가는 경찰로 순간마다 역할을 변모한다.


  지미, 피놀라와 그의 자매들이 한마디도 하지 않을 때 이 남성은 스토리 전개의 핵심적인 역할을 맡는다. 동시에 집을 빼앗는 국가와 의회를, 성폭력을 저질러도 누구에게도 도전받지 않는 종교를, 목숨까지도 좌지우지하는 공권력을 대변한다. 그는 누가 말할 수 있는지를 정하는 존재이며, 이 사회의 주체이자 ‘남성들’이다.
  

 작품은 이 주체들이 어떠한 권력을 가지고 행동하는지를 보여준다. 행동의 일부로서 말은 다양하게 또 다르게 말해진다. 그러나 세상은 그 모든 ‘말’들을 들으려 하지는 않는다. 이 사회에서 주체들은 말할 자유를 가지지만 주체가 되지 못한 이들은 그저 가만히 있어야만 한다. 아이러니하게 작품에서조차 남성으로 대변되는 주체들만이 주요하게 발화하는 과정을 통해 이러한 진실을 드러낸다.


<백조의 호수> LG아트센터 제공


 극 중 지미의 생일파티에 갑자기 등장한 로트발트. 그는 사회를 보던 지미의 엄마가 ‘자발적으로’ 건넨 마이크로 노래를 부르며 납치했던 피놀라를 바닥에 내팽개친다. 넋을 잃은 채 공포에 질린 피놀라와 어쩔 줄 몰라 발만 동동 구르는 지미. 신부의 노래는 국내에선 소낙비라는 이름으로 리메이크된 밥 딜런의 A Hard Rain's A-Gonna Fall, 아들의 음식에 독을 탄 어머니가 독의 약효를 보고자 여러 질문을 하는 내용의 곡이다. 이 장면은 ‘말’이 가진 단면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등장했던 인물들이 모두 나와 행복한 표정으로 함께 깃털을 휘날리는 마무리 장면은 오히려 모든 것이 부질없는 시대상을 드러낸다. 사회의 지배 아래에서 사람들은 매우 무력한 존재다. 누가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가를 질문하는 것조차 금지된 <백조의 호수> 속 세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지금의 현실에서,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처럼, 우리는 '염소'나 '벌레'와 같이 '하찮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고 작품은 얘기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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