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원 Jul 18. 2018

저지르는 관계, 그렇기에 관계

렛미인과 더 랍스터, 크리스피 스튜디오의 경우


 찝찝함, 렛미인(Let the Right One In, 2008)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느낌이다. 분명 영화적 완성도나 표현의 세련미가 주는 찝찝함은 아니다. 다른 것보다 작품이 말하는 무언가가 낯설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처음 볼 당시 감상을 따로 정리하지 않아, 낯섦은 파악되지 않았고 찝찝함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영화의 주요한 인물들은 영원히 소녀로 사는 뱀파이어 이엘리와 인간 소년 오스칼이다. 작품은 이들이 이웃에서 친구로, 나아가 연인으로 관계가 이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뱀파이어 소녀를 위해 목숨을 걸고 헌신하는 호칸, 소년을 괴롭히다 목숨을 잃게 되는 패거리, 생존을 위해 살육당한 주민들도 함께 목격하게 된다.


영화 <렛미인> 스틸컷


 극중에선 이름 한번 언급되지 않은 채 이엘리를 위해 희생되는 호칸의 존재는 그 이전의 ‘호칸들’을, 뱀파이어의 새 파트너가 된 오스칼은 앞으로의 ‘호칸들'을 짐작게 한다. ‘빛이 지면 너에게로 간다’고 하는, 어찌 보면 아름답고 다르게 보면 조건부인 사랑을 곱씹어본다. 이들의 관계에 생존과 사랑 중 과연 무엇이 우선되는 걸까.


 최근 개봉작 ‘킬링 디어’의 감독인 지오르고스 란디모스는 그의 작품 더 랍스터(The Lobster, 2015)에서 비슷한 결의 찝찝함을 선사한다. 제도적으로 ‘사랑’이 강제되는 사회와 이에 저항하지만 마찬가지로 파시즘적인 독신주의 집단 사이에서, 어느 곳에도 구애받지 않는 듯한 사랑이 꽃피운다. 그러나 이 관계에서 발견하게 되는 어둡고 솔직한 이기심은, 그럼에도 이어지는 이들과 막강한 구조의 질서는 절대적 사랑이라는 판타지를 재고하게 만든다.


 기존의 사랑 영화는 마냥 밝고 달달한 로맨스물이 주류를 차지해왔다. 거기에는 결혼을 사랑의 온전한 완결로 둔 가부장적 서사가 기반해있다. 그러나 다른 한켠에서는 또 다른 색감을 지닌, 불안정하고 혼잡한 관계들도 등장하고 있었다. 규정되지 않는 다양한 사랑과 그 방식을 다룬 이야기가 점차 늘어난 것이다.


영화 <더 랍스터> 스틸컷


 비록 이성애 중심적인 한계가 있지만, 모바일 영상 제작소인 ‘크리스피 스튜디오’도 그 예시로 볼 수 있다. 이곳의 대표적인 예능 콘텐츠 ‘취중젠담’은 ‘커플’을 비롯하여 ‘헤어진 연인’, ‘남/여사친’, ‘비밀 커플’, ‘형제/자매/남매’ 등 다양한 관계의 남녀노소가 등장한다. 이들은 여러 질문이 적혀있는 젠가를 하면서, 질문에 대답하거나 못할 시엔 술을 마셔야 한다. ‘오늘도 무사히’ 와 같은 연애물의 경우, 결혼에 대한 고려보다 직장과 연애 등 현재의 관계에서 겪는 고충이 더 비중 있게 다뤄진다. 크리스피 스튜디오는 고정적이지 않은 관계의 가능성을, 쉽게 공감이 가는 경험과 감정으로 풀어낸다.


 관계의 불확실성과 현재성이, 이전과는 달리 보다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시대가 되었다. 사랑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넘어서는 사유는 낯설면서도 낯익은 관계성을 포착한다. 사실 주변으로 눈길을 돌리기만 해도 이해가 된다. 사랑하는 벗이나 썸타는 이와의 관계를 보더라도, 그 관계에 더 애를 쓰는 주체가 때에 따라 다르다. 어떨 때는 사랑의 확신이, 다른 때는 증오가, 행복과 짜증이 그 사이를 오간다.
  

 물론 특정한 감정이 관계 전반에 걸쳐있을 때가 많다. 그러나 관계의 매 순간들에 단 하나의 마음만이 경유하지는 않는다. 다소 복잡한 경험과 관념 속에서, 관계는 구성되고 유동적으로 유지된다. 사람과 사람, 인격과 인격 사이는 그렇기에 확정적이지 않고, 그렇기에 헤어짐 또한 가능하다.


<취중젠담> - 헤어진 연인 편 썸네일 이미지


 다시 렛미인으로 돌아오면, 이엘리에게도 인간 파트너는 의지하고 함께하고 싶은 애정과 생존을 위해 이용하고 싶은 이기심이 공존하는 대상으로 보인다. 렛미인은 사랑과 관계가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정의내리기 복잡한 성질을 가지고 있음을, 그로부터 발생 가능한 어떤 참혹함의 존재를 보여주고 싶은 것 아닐까.  


 오래전 느꼈던 낯섦과 찝찝함은 어느 한쪽의 확실성도 담보하지 않는 이 영화의 서사 때문이었다. 이들의 관계가 어디로 향할 지에 대한 답은 마지막 장면 속 아직 어느 곳에도 도착하지 않은 기차처럼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러나 여전히 질주하고 있어 불안정한 동시에 설레이는 사랑은 저질러지기에 그 의미가 있다.

작가의 이전글 이리도 염소 같은 것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