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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용숙 Jul 07. 2021

까이가 뭐야?

까이가 뭐야?


가득하다 – 유승도


산도 지우며 눈이 내린다

개의 짖음도 흑염소의 울음소리도 지우며 눈이 내린다

돌담도 지우며 눈이 내린다

날아가는 까치도 까치가 앉았던 살구나무도 지우며 눈이 내린다

방 밖으로 나서는, 아이의 목소리도 지우며 눈이 내린다


하늘도 지우며 눈이 내린다

방금 내린 눈까지 지우며 눈이 내린다 


 십일월에 폭설이 내렸다. 예년보다 빠른 시기에 마을을 습격하듯 종일 눈이 내린다. 혼자 집을 보는 오후, 창문에 떨어지며 스러지는 눈발에 내 고요를 얹는다. 눈으로 뒤덮인 온통 희기만한 세상, 발뒤꿈치를 들고 거실로 들어오는 어지러움조차 감미롭다. 나는 가끔 어릴 적 눈에 홀려 앞으로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던 때를 생각한다. 비탈진 눈밭에서 오빠들을 쫒아가다가 그만 뒤쳐진 채 한 자리서 맴돌던 그 아득한 시간, 다시 돌아 온 오빠의 “응애야” 부르는 소리가 어제처럼 생생하다.


 그 겨울, 홍천군 내촌면 답풍리 논골 마을에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언제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을까, 들판의 경계가 사라지고 뿌연 세상에 보이는 건 허공에 떠 있는 나뭇가지뿐이다.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릴 때면 오빠들과 아재들은 아침부터 바쁘다. 눈이 쌓이기 전에 마당의 눈을 쓸어야한다. 어른들이 마을로 난 작은 길을 눈삽으로 치우면 오빠와 아재들은 싸리비로 눈을 쓸었다. 그러나 한밤중 기습적으로 폭설이 내리면 당할 재간이 없다. 모두 눈 치우기를 포기하고 마냥 집에만 머문다.


 며칠 째 눈이 내리다말다 하던 어느 날이었다. 바깥에서 놀지도 못하고 작은 외갓집 사랑방에서 빈둥거리고 있을 때 넷째 사촌이모가 삼선대에 있는 친구 집에 간다고 한다. 밖에는 눈송이가 천천히 내리다가 바람에 몰아치기도 하면서 산도 지우고 개의 짖음도 닭의 울음도 지우며 내리고 있다. 오빠와 아재들이 썰매 타면서 지르는 아우성조차 멈춘 지 오래다. 심심해서 좀이 쑤시던 막내 난이이모와 나는 넷째 이모를 졸라서 함께 길을 나서기로 했다. 새침하고 깍쟁인 중학생 넷째 이모가 코흘리개 동생들을 데리고 갈 리 없지만,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눈발 덕분에 같이 가기로 한 것이다.


 눈길을 걸어가면서 나는 앞서간 발자국 속에 발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걸음 폭이 달라서 걸을 때마다 몸이 휘청거린다. 몸이 흔들릴 때마다 몰아치는 눈발이 얼굴을 더 때렸다. 들에 쌓인 눈은 희지만 허공은 잿빛이다. 하늘에는 눈발이 검정깨처럼 날아다녔다. 중학교 때, 책 <폭풍의 언덕>을 몸을 떨면서 읽은 적이 있다. 눈보라 치는 밤 히스클리프가 ‘캐더린’을 부르며 울부짖던 장면에서 나는, 어린 날 삼선대 가는 길에서 보았던 까만 눈발을 떠올렸다. 마치 그 눈발 속에서 히스클리프가 미친 듯 절규하며 캐더린을 부르는 거 같았다. 


 눈의 아이러니다. 순백의 순수성과 히스클리프의 고통스러운 영혼의 통점이 눈송이 하나에서 느껴지니 말이다. 눈보라 속 히스클리프의 광기가, 온 세상이 하얀데 검은 화살처럼 쏟아지던 삼선대 눈발이 내게 공포였다는 걸 깨닫게 한다. 사춘기 내내 나는 눈에게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지만 눈의 이중성을 뼛속까지 느꼈다. 어쨌든 여섯 살에 길이 보이지 않는 눈 속을 걷는 것은 두려움과 호기심을 동반한 모험이 되었다.


 손과 발이 몹시 시렸다. 이모가 ‘다시는 너희들 안 데리고 다닐 거야!’ 할까봐 나는 씩씩한 척 이모 뒤를 따랐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온몸이 젖은 채 이모 친구 집에 도착했다. 방안에는 이미 여러 명의 친구들이 모여 있다. 자기들끼리 약속이 있었나보다. 이모 친구들이 나와 난이 이모 겉옷, 양말을 벗기고 아랫목 이불 속에 우리를 집어넣는다. 얼었던 몸이 녹자 들판 한가운데서 일어나던 현기증이 밀려오면서 잠이 쏟아진다. 


 갑자기 손뼉을 치고 깔깔대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눈을 뜨면 안 될 것 같다. 속닥속닥 하는 중에 가장 많이 들리는 말이 ‘까이’다. “ㅇㅇ의 까이가 제일 멋있어”, “ㅇㅇ는 까이가 있어” 한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일어났다.


“까이가 뭐야?” 하고 물으니

“크면 알게 돼” 한다.


 나는 한동안 ‘까이’를 생각했다. 그리고 새끼손가락을 까닥거리며 그들끼리 은밀히 주고받던 웃음도 골똘히 생각해봤다. 아마 ‘까이’는 비밀스럽고 달콤하고, 간직하고 싶은 무엇일 것이다. 동시에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고 부러움을 사고 싶은 어떤 것이라 짐작했다. 사춘기를 겪으면서 ‘까이’는 좋아하는 남자친구를 지칭하는 거라고 결론지었다. 


 눈이 하염없이 내린다. 하늘도 지우며 눈이 내린다. 방금 내린 눈까지 지우며 눈이 내린다. 날아가는 까치도 까치가 앉았던 살구나무도 지우며 눈이 내린다. 온 세상이 사라지며 가득 차는 이 순수한 모순! 두려움과 ‘까이’가 연결되었기 때문이었을까? 중학생 이모와 같은 나이의 시절, 나는 사랑스런 ‘까이’를 만나보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 형용모순이 두렵지 않다. 그리고 정정당당하게 물을 수 있다.


“순옥 이모! 까이가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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