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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용숙 Jul 31. 2022

칠월이 지나간다

칠월 – 반기룡

   

칠월 반기룡     


길가 개똥참외 쫑긋 귀 기울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토란 잎사귀에 있던 물방울

또르르르 몸을 굴리더니

타원형으로 자유낙하한다

텃밭 이랑마다

속알 탱탱해지는 연습을 하고

나뭇가지 끝에는

더 이상 뻗을 여백 없이

오동통한 햇살로 푸르름을 노래한다

옥수숫대는 제철을 만난 듯

긴 수염 늘어뜨린 채

방방곡곡 알통을 자랑하고

계절의 절반을 넘어서는 문지방은

말매미 울음소리 들을 채비에 분주하다      

    

칠월의 마지막 날이다. 일주일 단위로 집을 떠나 있다 보니 칠월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느낌이다. 시를 읽으며 칠월의 끝자락을 잡는다. 절반의 계절을 넘어서는 칠월 속에 쥐방울 참외, 토마토, 오이, 호박, 풋고추들이 텃밭 이랑마다 탱탱하게 익어간다. 해 그림자는 짧아지고 더 이상 뻗을 여백 없이 자란 나뭇가지에는 참매미 말매미 누구랄 것도 없이 생의 절정을 향해 울음을 토해낸다.. 칠월의 손길은 그다지 섬세하지 않다. 앞으로 내달리도록 등짝을 후려치는 매운맛이 있다. 그래서인지 저 절규는 버릴 것 없어 목숨을 내놓은 자의 마지막 외침 같다.      


그 매운맛을 지난주 제대로 맛보았다. 제주 올레길 트레킹을 7박 8일 다녀왔다. 하루 평균 18km 걷는 여정이다. 숙소는 정하지 않고 야영 우선이다. 배낭 무게가 7kg 정도여서 내심 겁이 나고 친구한테 폐 끼칠까 봐 걱정되었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칠월 한가운데 산을 오르고 길을 걷는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베테랑 친구의 속삭임에 그만 연초에 약속을 해버렸다. 떠날 날짜가 다가올수록 마음이 무거웠다. 무엇이든 새로운 걸 도전하자는 게 새해 목표였기에 중도에 포기할까 봐 가장 염려되었다.     


추자도 나바론 하늘길이 첫 코스다. 멀리서 봐도 높아 보여서 배낭 메고 산을 오르기가 두렵기도 하다. 친구는 텐트와 여벌 장비까지 메고 가는데 겨우 내 짐 무게를 감당 못해 투덜거릴 수는 없다. 천천히 숨을 고르면서 산에 오른다. 나바론 하늘길은 해안절벽이 나바론 요새와 닮았다 하여 등산객들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다. 나바론 절벽은 직벽이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파도가 밀려와 하얗게 부서진다. 포말이 절벽 위로 튕겨져 올 것만 같다.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가 시원하다. 가늠할 수 없는 물의 깊이는 공포감을 준다. 비경을 바라보는 이중적 감정이 낯설다. 재촉하는 마음이 없으니 어느새 정상에 이른다. 한 발 한 발이 모여서 이렇게 산을 올랐구나. 숨이 가쁘고 땀이 비 오듯 하지만 배낭을 내려놓고 물 한 모금 들이키니 살 것 같다. 산 정상에서 등대까지 다시 오르막이 이어진다. 그곳을 거칠 수밖에 없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선두 뒤꽁무니를 바짝 따라잡는다. 나, 아직은 괜찮아. 모진 리 해수욕장에서 삼십여 년 만에 야영을 했다. 얏호! 이 자유!   

  

15코스 걷는 날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큰비가 아니다. 옷이 젖을 만큼, 눈을 뜰만큼 내린다. 짐을 쌀 때 무게 줄이려 제주 날씨를 보고 또 확인하면서 웬만한 비는 걸으면서 맞기로 하고 우산과 비옷을 뺐다. 1g이라도 줄여볼 양이다. 비를 맞는다. 얼마 만인가? 미치지 않고서야 우리 나이에 비를 맞고 걷다니. 심각한 사연이 있거나 우울증이 있는 사람으로 비칠 것이다. 옷 속으로 빗물이 스민다. 한 차례 장대비가 지나가면서 여미었던 옷깃을 풀어헤쳐 놓는다. 걸음을 멈추고 둥실둥실 춤을 춘다. 소리도 지른다. 스틱으로 허공을 휘젓는다. ‘너, 나와!’ 남편을 업어치기로 메치는 상상을 하며 춤을 춘다. 그동안 남의 눈을 참 많이 의식하며 살았다.  

     

해안도로를 걷는데 검은 바위 가장자리에 해파리가 보인다. 왜 떼를 지어 육지 가까이 와 있을까? 어떤 해파리는 속이 주황색을 띤다. 문어라도 삼킨 걸까? 차로 다니면 보이지 않을 사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무언가 눈길을 잡아당기면 멈추어 서서 들여다보면 된다. 자세히 볼 수 있는 특권이 걷기에 주어진다. 서식하는 꽃들을 사진 찍어 바로 꽃 사이트에 올린다. 궁금증을 오래 가질 필요가 없다. 해안가 어딜 가나 즐비하게 피어있는 보라색 꽃이 순비기나무다. 처음 본 꽃이다. 새로운 걸 보고 듣고 알아가는 맛이 달다.  

   

천천히 때론 속도를 내서 걷는다. 배 시간 맞추는 것 외에는 자기 속도로 걸으면 된다. 혼자서. 둘이서 혹은 셋이서 뒤서거니 앞서거니 걷는다. 말이 필요 없다. 각자의 상념 속에서 자기와 대화 나눈다. 배낭 무게 때문일까? 날씨 탓일까? 시간이 지날수록 현재 걷는 일에만 집중한다. 얼마나 더 걸어야 중간 지점이 나올까? 시원한 물 한 모금만. 아이스커피 파는 데라도 있을까? 그늘만 나오면 잠시 쉬어야지. 지금 쉴까? 삼십 분 더 걷고 쉬자고 할까? 나만 힘든 걸까? 뒤처지면 도착 시간이 늦어지겠지. 야영할 곳 찾기가 힘들 거야. 조금만 더 걷자. 손에 잡힐 듯한 고민 외에 아무 생각이 없다.   

  

과거든 미래든 지금 걷는 데선 의미가 없다. 오늘 하루 도착 지점에 무사히 도착해서 땀을 씻고 쉬고 싶을 뿐이다. 현재 내가 별 탈 없이 걷고 있는 게 중요하다. 친구 한 명이 급기야 오른발에 물집이 잡혀서 고통을 호소한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는 없다.    

 

7, 8월엔 제주 올레길에 사람이 없다. 너무 더워서 사람들이 걷지 않는다. 제주 공항을 중심으로 서쪽 코스는 나무가 없는 코스가 많다. 도로의 지열과 내리쬐는 태양열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숨을 막히게 한다. 언덕코스라도 나타나면 죽음이다. 길 표시를 잘못 봐서 30킬로 이상 걸은 날이 있다. 15코스에서 14코스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길이 어긋난 것이다. 지름길 같아 보이는 길들이 여러 번 나왔다. 작은 오름을 넘으면 바로 14코스와 만날 것도 같았다. 폰 맵에는 자동차 도로만 선명할 뿐 올레길 도보가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봐서 안다. 이 길로 저 길로 의견이 분분하지만 길을 잃었을  때 필요한 건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돌고 돌아 땡볕에 10킬로를 더 걷고서야 14코스 입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날 작은 맹세를 했다. 기억이 왜곡되어 실수를 하더라도 모든 걸 용서하기로. 그래도 지구는 멸망하지 않을 테니까.    

 

12코스까지 무사히 마쳤다. 마지막 날엔 걷는 게 힘에 부쳤다. 발가락 하나에 생긴 물집이 몸 전체 균형을 깨뜨린다. 먹을 게 줄어든 배낭이 가벼워져야 하는데 더 무겁게 느껴진다. 제주 흑돼지에 생맥주 한 잔이 그간의 피로를 씻어준다. 새로운 도전의 일차 관문을 통과했다. 칠월이 지나간다. 더위를 덧칠한 칠월의 매운맛을 오랜만에 맛보았다. 창밖으로 말매미 울음소리가 지리지리 하게 들린다. 바야흐로 금지된 것들을 무너뜨릴 무더위가 밀려온다. 그 자율은 오롯이 어린아이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지만 지금의 결핍을 동심으로 채운다면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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