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울가 남색 달개비 잎에 민달팽이 한 마리 뿔을 뻗어 이리저리 흔들며 아침을 맞고 있다. 은빛 비단을 풀어놓은 개울물 옆에서 달팽이의 심연과 나의 마음은 같은 깊이로 여름 아침을 감응하는 것 같다. 어제와 다른 물소리 때문만은 아니다. 봄 내내 가뭄이 계속되더니 올 들어 처음으로 비다운 비가 내린다. 비 맞은 민달팽이 느린 발걸음이 초여름 풀벌레들을 부드럽게 깨운다. 풀잎도 기쁜 듯 낮은 높낮이로 고개를 젓는다.
앞마당 돌 화단 구석에도 이끼가 돋고, 빗물 흐르는 길마다 녹색 모래가 쌓인다. 요란하지 않은 비 때문인지 가느다란 물길이 더 선명하게 마당에 수놓아진다. 화단 꽃들 사이 거미줄에 명상 중인 거미가 꼼짝 않고 비를 맞고 있다. 밤새 비바람이 휘몰아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둥지 속 새알들과 둥지 없는 작은 새들도 안심하고 아침을 맞겠지. 청개구리가 고인 빗물에 발을 담그더니 풀 속으로 뛰어든다. 생명이 있든 없든 태초에 물에서 태어나서 그런지 모두가 오랜 가뭄 끝 비님을 겸손한 마음으로 영접하는 것 같다.
이른 봄에 심은 작은 살구나무에 살구가 서너 개 달렸다. 가느다란 몸통에 곁가지조차 가늘어서 도무지 열매가 맺힐 것 같지 않았다. 새로운 환경에 뿌리내리고 싹을 틔워 가지를 뻗고 열매를 맺다니, 그 어린것이 사계절의 성장 속도를 알고나 있는 걸까? 여린 뿌리로 땅 속 물을 퍼 올려 목마름을 견뎌 냈으니 나뭇잎 하나하나 나무껍질 속속들이 물기가 스며들 것이다. 계절만큼의 시간을 온전하게 살고 있는 살구나무 아래서 풍뎅이 쇠똥구리들은 비 오는 날 고단한 몸을 쉬고 있겠지.
그칠 줄 모르고 비가 내리는 날에는 계획이 무너지고 언어가 사라진다. 그토록 울어대던 새들도 침묵하고 마당을 기어 다니던 곤충들도 발길을 멈추었다. 생뚱맞은 그리움이 가슴 가득 차오른다. 사랑했었던가? 사랑했었지? 아마 사랑이었을 거야. 비 섞인 안개 때문인지 기억에서 사라진 형체 없는 멜랑꼴리 한 조각이 충만한 기쁨을 가져다준다. 이렇게 하염없이 비가 오는 날에는 죽도록 사랑하다 문득 헤어진 사람들은 어떻게 지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