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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용숙 Apr 10. 2022

가장 여린 것은 가장 힘센 것에서 탄생한다.

감나무 새순들- 정진규


눈 뜨는 감나무 새순들이 위험하다

알고 보면 그 밀고 나오는 힘이 억만 톤쯤 된다는 것인데

아기를 낳은 여자, 그 죽음 직전,

직전의 직전까지 닿아 있는 힘과 같다는 것인데

햇살 속에 반짝이는 저 몸짓들이 왜 저리 연하디 연할까

다를 게 없다

가장 힘센 것은 가장 여린 것을 겨우 만들어낸다

억만 톤의 힘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처음부터 라야 완벽하다

위험하다



  뒷 베란다 선반 맨 아래쪽에 검은 비늘 봉지에 싸여 있던 무 두 개에서 파란 싹이 나온다. 살겠다고 꽤 악다구니를 내는구나 생각하곤 무심히 겨울을 보냈는데 고것이 무꽃을 피웠다. 봄바람이 먼저와 무 코에 바람을 넣었나 보다. 꽃대궁이 빳빳하게 올라와 무속은 텅텅 비었다. 먹지 못하는 대신 장다리꽃이 보란 듯이 올망졸망 폈다.


 꽃대궁을 잘라서 작은 도자기 컵에 놓았더니 제법 운치가 있다. 심심해서 건들거리는 장다리가 아닌, 햇빛도 없는 검정 비닐 안에서 자기 몫을 다하고자 처절하게 용을 쓴 장다리꽃이다. 제자리에서 제 몫 다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꽃으로 완벽하게 피어나 무꽃이 된 것이다. 햇살 속에 드러난 몸짓이 여리디 여리다. 마치 갓 태어난 햇애기 배냇짓 미소 같다.


명주바람 타고 온 햇살이 닿는 나뭇가지마다 새순이 돋는다. 지지난 해 이맘때쯤이었다. 둘째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여의도 성모병원으로 갔다. 임신 7개월라째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전날 입원하기 전  양수가 많이 새서 위급한 상태였다. 지금이 될지,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분만대기 상태에서 하루가 지나갔다. 둘째는 양수의 양이 줄어서 링거로 들어가는 수액 대비 새 나가는 양수 양을 줄이기 위해 24시간 움직이지 말고 누워 있어야 했다. 아기가 정상으로 태어나려면 적어도 8개월은 지나야 한다. 가장 중요한 폐 성숙 역시 8개월이 돼야 정상적으로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둘째가 하루 이틀 안정을 찾으면서 태아도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의사 말로는 딸과 같은 임산부가 입원해서 견딜 수 있는 기간은 많아야 한 두 주 정도라고 했다. 만약 지금 태어나면 아기는 평생 미성숙된 내장기관을 안고 살아야 한다. 둘째는 결혼 오 년 차였지만 결혼생활을 막 시작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유학 중 남편과 떨어져 지냈고 한국에 들어와 함께 산지 일 년이 채 안되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위험한지 무슨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잘 모른 채 의사가 시키는 대로 먹고 움직이지 않고 하루하루 위태롭게 버티고 있었다. 선머스마처럼 활동하기 좋아하고 잘 웃고 수다스러운 딸이 태아한테 좋지 않은 영향이 있을까 봐 꼼짝 않고 기도시간을 가지곤 했다.


  봄빛이 초롱한 일요일 사위와 교대를 하고 한강변에 나왔다. 사월이 이미 시작되었고 벚꽃이 만개하여 성모병원 뒷길, 한강 둔치 쪽으로 벚꽃 터널이 눈부시게 열려있었다. 화사한 옷을 입고 벚꽃 그늘 아사람들이 웃으며 지나간다. 난, 염주를 손에 쥐고 벚꽃 하나에 지장보살 한 번을 외우면서 오체투지 하는 마음으로 걸었다. 내 아이를 키울 적에도 이토록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 본 적이 없었다. 직장 생활한다고 내 생활에 바빠 아이들을 세심하게 살펴본 적이 별로 없었다. 아이들에 대한 부모의 책임 총량의 법칙이 있다면 어릴 적 둘째에게 못 해준 보살핌을 지금 하고 있는 거 같았다


  3 주를 버틴 어느 날 주치의가 미국 출장 가고 바뀐 담당의가 오늘 수술을 하던가 아니면 담주 월요일 수술을 하자고 한다. 그날이 목요일이었는데 주말에 하면 수술 준비나 간호사 대기 등 주중보다 못하다는 거였다. 오일을 엄마 뱃속에 더 있다가 나오면 그만큼 아기한테 좋지만 감염의 위험도 생각해야만 했다. 의사는 아기가 태어나는 건 신의 영역이라 예측대로 잘 안되니 신앙이 있으면 기도하라고 했다.


  사람이 어떤 경우를 선택하는 순간 고려하는 정보의 우선순위와 앞으로 일어날 결과에 대한 예측치를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다면 실수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 오히려 사람보다 인공지능 AI가 훨씬 정확도가 높을 것이다. 우리는 아기가 엄마 뱃속에 더 있기를 선택했다. 그런데 토요일 아침 약간의 죽을 먹었는데 양수가 터지고 응급상황이 벌어졌다. 주말 담당은 또 다른 의사가 맡고 있었다. 수술하려면 금식을 했어야 했고 수술 준비에 따른 마취나 응급상황에 따른 준비가 돼 있어야 했다. 아무것도 준비 안 된 상황에서 딸은 한 시간이 넘어서야 수술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기는 숨을 안 쉬고 뇌에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감염된 상태로 태어났다.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살아오면서 알고도 짓고 모르고도 지은 죄 참회하고 아기 건강을 기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기적처럼 아기는 건강을 회복해갔지만 전두엽 부근 손상된 뇌는 돌이킬 수 없었다. 그냥 두면 평생 뇌성마비로 살아야 한다. 인큐에서 6주를 있다가 퇴원하자마자 재활치료를 시작했다. 손바닥 길이보다 더 작은 아기에게 4시간마다 ‘보이타’라는 지압을 해 주어야 했다. 손상된 뇌를 대신할 뇌를 활성화시키는 작업이다. 시간을 맞추기 위해 자다가도 새벽에 깨어 보이타를 해야만 했다. 아기는 그것을 할 때마다 죽을 듯이 울어댔고, 딸은 용을 쓰면서 아기 재활을 돕다가 두 손목이 손상되고 몸은 만신창이 되어갔다.


  아기가 고개를 세우고, 뒤집고, 배밀이하고, 기고, 앉고, 서고, 한 걸음 떼기까지 건강한 아기면 저절로 되는 동작들을 만들어내기를 이 년, 드디어 거침없이 걷게 되었다. 지난주 첫 손주는 어린이집에 입학했다. 아장아장 걸으며 봄빛에 눈까지 찡그리며 뒤뚱댄다. 나무의 겨울눈들이 혹한을 견디고 새순을 틔우듯 손주도 공포의 재활치료를 견뎌내고 두 발로 땅을 힘차게 딛는다. 죽음 직전까지 갔던 딸과 사위의 눈물겨운 아기 투쟁기가 완벽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경이롭다. 딱딱한 땅속에서 억만 톤의 힘으로 밀고 나온 여린 새순들이 생글생글 웃어가고 햇살과 바람과 비와 우주의 기운을 받은 작은 행성 하나가 우리 집에서 자라나고 있다. 가장 여린 것은 가장 힘센 기운을 받아야만 겨우 탄생할 수 있다. 검정 비닐 안 장다리꽃 역시 제 몸을 녹여 죽음 직전의 직전까지 가서야 겨우 싹을 틔운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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