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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모임 로칸디나 Sep 28. 2018

로디즈가 만난 영화 <살아남은 아이>

진실에서 비롯되는 살아남은 자들의 삶 <살아남은 아이>, 나선혜

<살아남은 아이>, 2018, 신동석


   새로운 벽지를 바르다.


   누군가 묻는다면, <살아남은 아이>는 새로운 벽지를 바르는 과정을 그대로 옮겨놓은 영화라고 소개하고 싶다. 어쩌다가 벽에 얼룩이 생기게 된 건지에 대해 영화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새로운 벽지가 얼룩을 잘 가렸을지에 대해서도 확실한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벽지를 바르면서 그 안에 스며 들어간 ‘속죄, 용서, 애도’의 감정을 천천히 꺼내 보여줄 뿐이다. 원인도 결과도 아닌, 과정을 응시하면서 그려낸 세 가지 감정. 이 감정들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본 글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작품에 대한 글쓴이의 주관적 생각을 바탕으로 한 감상임을 밝힙니다.)


진실에서 비롯되는 살아남은 자들의 삶 <살아남은 아이>


진실은 속죄의 실마리가 된다.


   기현은 살아남은 아이이다. 성철과 미숙의 아들인 은찬이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기현을 살려냈다. 그러니 성철과 미숙이 기현과 가까워지고자 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기현에게 아들 은찬이의 마지막 뜻이 깃들어 있다고 볼 수도 있을 터이니. 그렇게 성철과 미숙은 기현을 통해 아들을 잃은 슬픔을 치유해가고, 기댈 곳 없는 기현은 성철과 미숙으로부터 안정을 찾고자 한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진실을 바탕으로 서 있는 내용이 아니다. 살아남은 아이였던 기현은 실은 은찬이의 죽음에 가담한 가해자였으며 그날의 사건이 미궁 속에 빠지도록 만든 결정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진실을 고백하기 전까지의 기현은 줄곧 어딘가가 불편한 표정이다. 


   자신에게 다가온 평온이 거짓 위에 놓여 있음을,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모든 것이 망가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 표정 말이다. 그럼에도 그는 상처와 얼룩이 그대로 배어나는 도배를 계속 이어간다.


   그러던 기현은 점차 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 결정적인 순간은 소풍을 마친 기현이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구토를 하는 장면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다음 날 기현은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날의 진실을 밝힌다. 진실이란 무엇인가. 


   진실은 사실과는 다르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거는 행위이다. 지금까지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이 무너질 것임을 알면서도 기현은 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이 지점에서 기현은 여타 아이들과는 구분되며, 속죄로 나아갈 수 있는 실마리를 얻게 된다. 



속죄는 용서의 여지를 만든다.


   아들의 죽음에서 오는 상실감을 각자의 방법으로 견뎌내는 와중에 성철과 미숙은 기현을 만난다. 아들의 빈자리를 채워줄 기현과 점차 가까워지는 사이, 그 날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부부는 아들을 잃는 과정을 다시금 겪게 된다. 


   은찬이의 죽음의 진실을 알게 된 후 겪게 되는 고통은 진실을 알기 전의 고통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다. 아들이 의사자라는 사실에 기대며 아들의 죽음을 버티던 성철은 갑작스레 버팀목을 잃는다. 점차 마음의 문을 열면서 기현을 가족의 일원으로 맞이하려 했던 미숙 역시 마찬가지이다. 희망적 존재였던 기현은 일순간에 그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하지만 기현이 진실을 토로했다고 해서 나락에 떨어진 성철과 미숙을 구원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날 사건에 가담했던 아이들은 자신들이 아는(혹은 안다고 믿고 있는) 사실만을 반복적으로 진술할 뿐이다.


   아이들의 부모는 자신의 아이들을 범죄 혐의로부터 감추기에 급급하고, 교사는 그 날의 일을 의로운 사건으로 마무리 짓고자 한다. 성철과 미숙에게는 한 줄기 희망이었을 검사도 이내 사건을 포기한다. 누구를 미워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순간, 부부의 원망이 멈추는 곳은 당연히도 ‘기현’이다.


   그렇게 그들은 기현을 불러낸다. 그리고 인간이라면 느낄 수밖에 없을 증오와 살의를 전면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기현을 향한 증오와 살의를 드러내는 순간, 이는 곧 용서로 치환된다. 당연한 일이다. 기현은 속죄의 실마리를 간직한 아이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진실을 기현은 마주했고, 자신이 저지른 행동의 무게를 알기에 목을 조르는 성철에게 자포자기로 목숨을 내주려 했다.


   진실을 말하는 자, 속죄하는 자를 그 누가 쉽게 단죄할 수 있을까. 성철이 끝내 기현을 죽일 수 없었던 이유, 미숙이 잠자코 숨죽이며 앉아있을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하여 진실을 똑바로 응시했던 기현의 속죄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잠재우고, 응어리진 증오를 풀어낸다. 죽이고자 하는 마음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변화시킨다. 무엇보다, 용서의 단초가 된다.



속죄와 용서는 애도로 이어진다.


   살아남은 자들 사이에서 속죄와 용서가 이루어질 때, 이는 곧 진정한 의미의 애도로 이어진다. 영화는 이 순간의 애도를 특별한 방식으로 그려낸다. ‘속죄하는 자와 용서하는 자가 함께 죽은 이의 죽음을 추체험하는 것’, 이것이 영화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애도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속죄하는 인물인 기현은 속죄를 실현하고자 주머니에 돌멩이를 잔뜩 넣은 채 강물로 뛰어든다. 기현을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된 미숙과 성철도 기현을 살리기 위해 뒤따른다.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강물의 중간 지점. 어쩌면 은찬이 사망했던 곳일지도 모르는 지점. 그 지점에서 그들은 한데 엉켜 몸부림치며 은찬의 마지막 순간을 추체험한다.


   속죄하는 자와 용서하는 자가 뒤엉켜 죽은 자가 겪었을 순간을 추체험하는 이때, 비로소 죽은 자의 죽음에 대한 완전한 애도가 가능해진다. 


   그리고 속죄와 용서를 통해 이루어진 죽은 자를 향한 애도는, 곧 살아남은 자를 위한 작은 희망이 된다. 얼룩을 완전히 드러내야만 새로운 벽지를 바를 수 있고, 물속에 들어가서 발버둥을 쳐야만 주머니의 돌멩이들을 흘려보내고 물 위로 떠오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덧 1. 이제 와서 진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한지에 대해 의문을 표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실을 밝힌다고 죽은 은찬이가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느냐고. 그렇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고, 산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석연치 않은 죽음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진실을 찾는다. 진실에서 얻은 동력으로 하루를 더 살아가기 위해, 진실에서 얻은 교훈으로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덧 2. 애도 방식의 차이를 다루는 점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성철과 미숙은 동시에 아들을 잃었으나 그들이 애도를 표하는 방법과 기간은 달랐다. 하물며 부부간에도 애도의 방식에 간극이 존재하는데, 사회 속의 타인들이 각자의 애도 방식을 지닌 것은 당연할 터이다. 혹시 우리는 너무도 쉽게 타인의 애도에 대한 존중을 거두었던 게 아닐까. 아직도 애도하고 있을 누군가에게 ‘이 정도면 됐다, 그만해라’라는 말을 함부로 건넸던 것은 아닐까. 나 자신을, 그리고 나를 둘러싼 사회를 돌이켜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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