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여도 좋지만 제물로서는 바칠 수 없는 존재, <죄 많은 소녀>, 김영찬
<죄 많은 소녀>가 드디어 개봉했다. 아쉽게도 독립영화라는 점과 여러 이유들로 많은 영화관에서 상영되고 있지는 않지만, 한국 영화에 관심이 있거나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직접 찾아가서 볼 가치가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본 리뷰에는 영화 <죄 많은 소녀>의 스포일러가 강하게 담겨있습니다.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는 단어가 있다. <죄 많은 소녀>에 대해 말하는데 갑자기 이상한 이야기라고 생각되겠지만, 영화를 보고 나와서 가장 먼저 이 단어가 머리에 스쳤다. 이탈리아의 현대 철학자 조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이 고대 로마의 텍스트들에서 다시 발굴해 낸 개념인 호모 사케르는 그 단어만 보면 ‘신성한 인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호모 사케르는 드러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아감벤은 그의 저서 <호모 사케르>에서 이 단어를 ‘제물로서 희생양으로는 바칠 수 없으나 죽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개념은 고대 로마 시절 최초의 호민관법에서 범죄자에 대해서는 살인이 용인되는 일종의 면책특권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끝난 이후로 우리는 국가 권력이 존재하는 시대에 살게 되었다. 사람들은 국가 권력으로부터 보호받기를 기대하고 이는 곧 규약, 그리고 법이라는 제도로 가시화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권력이 법을 통해서 정의롭고 공평하게 사회의 질서를 확립한다고 믿고자 했다. 그러나 아감벤은 국가 권력이 기본적으로 호모 사케르를 만드는 방식으로 작동해왔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국가는 법 내부에 존재하지만 법 외부에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호모 사케르는 이렇듯 양가적인 특징을 지닌다.
말로만 들으면 어렵지만, 우리는 이러한 사례를 많이 보아왔다. 나치는 국가 권력으로서 유대인들을 기생충적 존재로 정의했고 이들을 수용소에 분리시켰으며 결국은 학살하기에 이른다. 이는 히틀러를 필두로 한 권력자들이 유대인을 호모 사케르로 분류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나치가 국민의 투표로 선출된(법 내부) 권력이지만 법의 외부에 존재하는 잔혹한 일을 자행했다는 부분이다. 한국 또한 그러한 일들이 존재해왔다. 유신정권 아래 벌어진 참극들과 가장 가까이는 용산 참사 등 국가가 공권력의 수행을 이유로 주권자인 국민을 호모 사케르로 만들어 버린 일들은 수 없이 많다. 아감벤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문제는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와도 연결된다고 보았다.
그의 저서에는 이후 어떠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으나 본 리뷰에서는 그 지점까지는 다루지 않을 생각이다. 무엇보다도 이 글은 영화 <죄 많은 소녀>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첫 시작에서 물음을 던지며 시작한다. 사건을 미리 보여주지 않은 채 영희(전여빈 분)의 수화와 경민 어머니(서영화 분)가 텐트를 구매하고 운전하는 롱테이크를 보여준다. 의문을 남긴 채로 영화는 과거로 돌아간다. 영희와 한솔(고원희 분) 그리고 경민(전소니 분)이 화장품 가게에서 만나고 지하철 플랫폼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눈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지하철 소리에 가려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나서야 관객은 경민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경민 어머니는 왜 자신의 딸이 자살을 선택했는지를 알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경찰은 학교를 찾아간다. 여기서 영화의 첫 번째 중요한 순간이 발생한다. 교장선생님과 담임선생님(서현우 역)을 비롯한 학교의 직원들은 경민이 어떤 이유로 자살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순히 학교의 평판을 떨어뜨리지 않을만한,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내는 데 몰두한다. 학교에 찾아온 경찰은 경민과 같은 반 학생들을 면담하며 정확한 이유를 찾아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희의 면담부터 그 분위기는 달라진다. 이전의 학생들이 원 샷으로 경민에 대해 한 마디씩을 남긴 것에 비해 영희가 면담을 위해 불려 가는 과정은 비교적 길고 고통스럽게 보인다. 영희가 면담을 위해 들어간 순간부터 관객은 김형사가 이미 영희를 의심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면담 씬 이전에 교무실에서 경민의 어머니와 형사들 그리고 담임선생님이 경민과 영희가 키스를 한 CCTV 영상이 경민의 마지막 모습임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면담을 시작한 순간 이미 영희는 공권력으로 대표되는 경찰과 사회로 대표되는 학교 그리고 경민 어머니로부터 호모 사케르로 정의된 것이다. 영희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영희가 경민을 자살로 몰고 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희의 추방을 혹은 죽음을 바랄 뿐이다.
면담하는 동안 담임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영희의 책상과 가방을 포함한 반을 뒤져 경민의 물건을 찾으라고 한다. 그 모습을 본 영희는 자물쇠로 잠긴 자신의 사물함을 열고 찾아보라며 악을 쓴다. 학교는 호모 사케르인 영희에 대해 교묘하게 인격적 살인을 시작한다. 경민의 어머니 또한 영희의 행적을 뒤따라가며 자신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꾼다. 학생들은 더욱 직접적으로 행동한다. 유리(이태경 분)를 필두로 한 학생들은 영희의 집에 찾아가 물리적인 폭력을 가한다. 영희는 호모 사케르가 된 자신의 처지를 벗어나고자 발버둥 친다. 누구보다도 죽고 싶지만 누구보다도 살고 싶은 사람으로 변한다. 영희는 공권력에, 사회의 압력에 저항한다.
그러나 영희는 이것이 불가능함을 깨닫는다. 경민을 추모하는 많은 학생들을 본 순간, 경민의 어머니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자 했던 순간, 김형사와 담임선생님에게 제지당해 장례식장 밖으로 끌려 나오고 그들에게 뱉어댄 말들이 끝끝내 영희에게 폭력으로 되돌아오는 순간 영희는 자신이 호모 사케르임을 인정하고 죽음을 선택하고자 한다. 영화가 이 과정에서 경민을 보내는 굿 장면을 넣은 것은 매우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경민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희생양’이 되어 신성한 사람이 되고 영희는 이를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과 직면하는 일련의 논리를 표현해냈기 때문이다. 결국 영희는 부조금 봉투를 찢어 글을 갈겨쓰고(너희가 틀렸어. 경민이는 내가 죽인 게 아니야) 화장실에 가 자살을 시도한다.
영화는 여기서 두 번째로 중요한 지점을 맞이한다. 영희가 선택한 그의 죽음이 실패로 돌아간 순간 영화의 이야기는 완전히 변화한다. 호모 사케르로서 죽음의 실패는 영희에게서 목소리를 앗아간다. 영희의 비참한 모습은 학교의 사람들로 하여금 영희를 경민의 자리에 대체시킨다. 이제 호모 사케르는 진정으로 ‘신성한 자’가 되었으며 심지어는 살아있는 권력으로 변화하게 된다. 학생들은 영희를 욕하지 않고 영희의 편을 든다. 얼마 전까지는 영희를 욕하던 사람이 이제는 영희를 위해 친구들의 위로 영상을 촬영하고, 담임선생님을 모함하는 거짓 탄원서를 적는다. 영희가 한 번의 죽음을 맞이하고 권력을 얻게 되자 사람들은 또 다른 호모 사케르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영화의 이 지점은 아주 독특하다. 호모 사케르가 죽음을 이겨낸다면 권력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감벤 본인도 고려한 바 없으나 적어도 영화 내에서는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그러나 영희와 경민의 어머니만큼은 변화하지 않는다. 영희는 친구들이 찾아와도, 심지어 한솔이 영희에게 경민이 자살한 날 있었던 일을 고백하는 와중에도 바뀌지 않는다. 영희는 자신의 죽음을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고, 경민의 어머니는 영희의 주변에서 물리적, 심리적으로 배회하며 그를 압박한다. 영희의 수술비는 경민의 보험금이라는 것, 학교에 경민의 이름으로 장학금을 만들고 싶다는 것, 영희에게 경민이 입던 옷을 가져다주는 일 등 경민의 어머니는 영희에게 경민이라는 희생양이 영희 이전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각인시킨다. 그러나 경찰은, 그리고 학교는, 심지어는 경민의 아버지마저 장례식이라는 제의가 끝났기에 경민은 잊혀져야 한다고, 우리는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모두가 새로이 등장한 신성한 자-교탁에 돌아온 영희를 바라본다.
드디어 영화는 오프닝 때 보여준 장면으로 돌아온다. 끔찍한 모습으로, 그리고 무언가 권위 있어진 모습으로 영희는 친구들에게 수화를 한다. 오프닝 때는 알지 못했던 의미가 비로소 드러난다. “나는 여러분 앞에서 가장 멋지게 죽음을 완성하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의미를 이해한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를 떠나 이 수화 이후에 반 친구들의 박수는 마치 영희를 숭배하는 의식처럼 보인다. 이제 유리는 영희에게 속죄하는 의미로 새로운 호모 사케르를 찾아 바친다. 영희는 그 학생을 때리다가 이내 안아준다. 다른 학생들도 어떻게든 영희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또는 환심을 사기 위해 – 또는 죄책감을 씻기 위해 영희의 주위를 맴돈다.
이사 중에 경민의 유서가 발견되었음에도 경민의 어머니는 영희를 놓아줄 생각이 없다. 그리고 영희는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고 생각한 순간, 한솔과 함께 경민 어머니의 회사에 찾아간다. ‘딸이 찾아왔다’는 연락에 미친 듯이 달려왔지만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영희와 한솔. 경민 어머니는 식사를 하자며 경민이가 항상 오자고 했지만 한 번도 오지 못한 식당으로 그들을 데리고 간다.
영화의 결말은 매우 강렬하다. 식당에서 경민 어머니가 꺼낸 이야기에 영희는 ‘왜 경민이가 죽었는지 알고 있다’며 ‘오로지 나만 말릴 수 있었는데’라고 이야기한다. 분노한 경민의 어머니에게 ‘한 번 죽어보니 알겠어요. 내일이면 내가 왜 죽었는지 사람인지 물어보겠죠. 그때 대답이나 잘 해주세요’라고 본인의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경민의 어머니는 식사용 칼로 가슴을 찍어대며 이에 대응한다. 이 지점에서 특히 좋았던 것은 처음에는 힘겹게 이야기하던 영희가 마지막 문장을 내뱉을 때는 낮지만 본인의 온전한 목소리로 돌아왔다는 점이다. 영희는 경민과 입맞춤했던 굴다리를 혼자 걸어간다. 그렇게 영희는 호모 사케르로 고통받았던 자신의 시간을 복수, 또는 완성하고자 한다.
영화에서 권력은 공권력, 기성세대, 또래집단 등 다양한 형태로 드러난다. 하지만 영희는 자신을 죽음으로 내몬 권력에게 정면으로 대항한다. 살짝 언급하자면 아감벤은 ‘하지 않음을 하다’라는 문장과 함께 대안적 정치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마치 영희가 자신을 대체할 호모 사케르를 찾을 수 있음에도 찾지 않았던 것처럼, 또 죽지 않을 수 있음에도 죽음을 택하는 것처럼. <죄 많은 소녀>는 우리 모두가 영화 속 누군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우리 모두가 언제든지 영희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영희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경민의 어머니 또한 자식을 잃은 피해자이다. 그러나 동시에 자식을 잃은 슬픔을 해소할 방법이 없어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어 낸 사람이기도 하다. 관객마다 각자의 경험과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영화의 내내 누구에게 감정을 이입해야 할지 혼돈스러울 것이다. 아픈 것은 경민의 어머니일까, 영희일까.
++ 리뷰를 적는 동안 배우 키키 키린의 별세 소식을 접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 <죄 많은 소녀>의 배우진은 정말 좋다. 전여빈, 서영화 배우님부터 고영희, 이태경, 전소니 배우님까지. 이외에도 출연하신 모든 배우님들이 영화의 밀도를 꽉 채우는 느낌이다. 이태경 배우님은 <졸업>에서, 전소니 배우님은 <72초 TV>에서 본 이후로 팬이었어서 등장할 때마다 좋았다. 그냥 배우님들 다 정말 좋다.
++++ 아감벤의 책을 절대 내가 다 이해해서 적은 게 아니다. 앞으로 더 읽어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단지 독특하지만 사회적 이슈들에서 자주 보이는 철학적 개념이 영화 속에서 선명하게 보였다고 생각해서 내가 이해한 방식대로의 호모 사케르를 가지고 왔다. (만약 오독한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선명하고 직설적인 이미지들이 사람을 매우 힘들게 하는 지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오면 힘든 만큼이나 생각할 거리도 많다.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