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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모임 로칸디나 Sep 10. 2018

로디즈가 만난 영화 <어느 가족> 2

공간을 그리워하는 순간을 이야기하는 영화, <어느 가족>, 김영찬 


본 리뷰는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어느 가족>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이하 ‘히로카즈’) 감독은 2013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로 칸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2018년 <어느 가족>으로 다시 칸에서 황금 종려상을 수상한다. 해외에서 동양권의 영화가 수상할 때는 언제나 흥미롭다. 일반적으로 나에게는 수상한 영화가 보편타당한 주제를 다루고 있거나, 완전히 다른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 흥미를 유발했다거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게 된다. 그러나 <어느 가족>은 어느 한쪽에 속하는 영화는 아닌 듯하다. 이는 영화가 ‘가족’이라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동시에 일반적인 가족의 개념에서 벗어나고자 하기 때문이다. 본 리뷰에서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어느 가족>이 이야기하는 ‘가족’이라는 관념에 대해서 다뤄보고자 한다. 


 글에 앞서 영화가 아닌 다른 이야기를 잠시 해 볼까 한다. 우리나라의 드라마들, 특히 일일 연속극이나 주말 황금시간대에 방영되는 드라마들은 가족에 대해 다루는 것을 선호한다. 아니, 적어도 2010년대 초반까지는 선호해왔다고 할 수 있다.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들과 <응답하라> 시리즈, 또는 <아내의 유혹>을 필두로 하는 많은 막장 드라마들까지도(그 내용의 자극적인 정도와는 관계없이) 가족 내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 드라마들의 ‘클리셰’라고 하면 우리는- 사랑에 빠진 연인이 알고 보니 잃어버린 남매인, 재벌 남자가 가난한(심지어는 엄청나게 비참한 상황에 놓이는...) 여주인공과 사랑에 빠지고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지만 무지막지한 시집살이에 힘들어하는- 이런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드라마들의 결말은 언제나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와 같이 이해하기 힘든 동화로 끝난다. 


 한국 방송통신위원회는 가족 드라마를 ‘시청자에게 가족의 소중함과 가족 간의 사랑과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중요한 요소(더해서 실제로 발생할 수 있거나 가상의 현실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재미있는 일들을 극대화하는)’라고 정의하고 있다. 자세한 이야기는 차치하더라도 기본적으로 한국의 드라마들은 가족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가지고 있고 이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또한 한국 영화들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으며 평론가들이 비판하는 신파적 요소와 연결되기도 한다.   


 이 리뷰에서 다루기로 한 히로카즈 감독의 두 영화는 본질적으로 가족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물론 이 두 영화를 제외하고도 히로카즈 감독은 ‘유사 가족’에 대해 많이 다루고 있다.) 이러한 히로카즈 감독 영화의 특징은 그의 영화로 하여금 보편적인 감정을 유발하는 좋은 효과를 불러온다. 그러나 여기서 굳이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어느 가족> 두 영화를 다루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 가족을 만드는가?라는 질문에 서로 다른 대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시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아이가 여섯 살이 되던 해 산부인과에서 아이가 바뀌었음을 알게 되고 너무도 다른 두 가족이 각자의 혈연을 되찾기 위해 만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다.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료타(후쿠야마 마사하루 분)의 가족이다. 그러나 영화가 사랑하는 것은 유다이(릴리 프랭키 분)의 가족으로 보인다. 이는 가족끼리 보낸 시간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료타는 일 중독자로 보일 정도로 자신의 성공에 집착하며 아들인 케이타(니노미야 케이타 분)에게도 엄격한 삶을 강요한다. 반면 유다이는 집과 붙어있는 전파상을 운영하며 료타에 비해 경제적으로는 문제가 많지만 가족과 보내는 시간은 많은 사람이다. 

산부인과에서 아이가 바뀌었음을 확인하는 순간, 아내를 닮았다고 생각했던 케이타의 성격에 대한 아쉬움은 다른 피에 대한 확신으로 바뀐다.


 영화는 결과적으로 가족을 만드는 것은 구성원들과 보내는 시간이며 심지어는 이것이 혈연을 넘어선다고 말한다. 료타는 산부인과에서 아이가 바뀌었음을 아는 순간부터 케이타의 행동들이 모두 자신의 핏줄이 아니기 때문이었다고 아내인 미도리(오노 마치코 분)에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료타와 유다이의 가족이 처음 만났을 때, 영화는 유다이와 (자신의 혈육이지만 유다이의 아들로 자란) 류세이(황 쇼겐 분)가 마신 음료의 빨대를 보여준다. 유다이가 빨대를 씹는 버릇이 있듯 류세이의 빨대에도 잇자국이 남아있는 장면을 통해 히로카즈 감독은 료타의-그리고 핏줄을 중요시하는 일반적인-생각을 부정한다. 또한 고의적으로 아이를 바꾼 간호사를 찾아간 료타를 막아서는 사람이 간호사의 의붓아들인 장면도 이러한 히로카즈 감독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영화는 이외에도 다양한 연출을 통해 ‘시간성’을 표현한다. 케이타를 데리고 유다이의 집에 가는 차 안의 시간, 케이타가 유다이의 집에서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보내는 시간, 케이타가 찍은 료타의 자는 사진들을 보는 순간 등을 보여주며 진정한 의미의 가족이 혈연으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영화의 결말 부분에서는 료타가 케이타를 다시 데리러 가지만 케이타가 이를 거부하고 료타는 케이타에게 사과하며 긴 갈림길을 걷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료타는 “제대로 못해줬지만 6년간은 아빠였어”라는 대사를 통해 시간을 부정하고 혈연을 신뢰했던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갈림길의 끝에서 두 사람은 화해한다. 


 그 뒤에 료타와 케이타는 유다이의 집으로 돌아오고 두 가족은 함께 유다이의 집으로 들어가는데, 이 엔딩은 아주 중요하게 보인다. 히로카즈 감독은 영화 내에서 두 가족을 서로 비교했지만 가치판단을 내리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다이의 집을 오랫동안 보여주는 결말에서 이 두 가족이 일종의 공동체로서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가며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읽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두 가족이 함께 찍는 가족사진. 두 가족이 보여주는 자세의 차이는 곧 각자가 공유하는 분위기와도 직결된다.


<어느 가족>과 공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 비해 <어느 가족>은 ‘공간성’에 대해 집중한다. 한 가지 명확하게 짚고 넘어갈 부분은 <어느 가족>이 시간을 아예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 비해 영화가 공간을 보여주는 것을 중요시한다는 의미이며, 이미지의 구성과 연출 또한 그렇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영화는 어느 슈퍼마켓의 입구에서부터 시작된다. 먼저 공간이 보이고, 그 뒤에 쇼타(죠 카이리 분)가 걸어 들어온다. 이는 <어느 가족> 1의 리뷰에서도 다루어졌듯이 프레임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집중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는 왜 그 공간을 보여주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이후 영화의 전개도 비슷한 맥락을 보여준다. 쇼타와 오사무(릴리 프랭키 분)는 밖에서 혼자 있던 유리(사사키 미유 분)를 집으로 데리고 온다. 그 공간은 연금을 받아 생활하는 하츠에 할머니(키키 키린 분)의 집이다. 도둑질로 생필품을 조달하는 쇼타와 오사무, 세탁 공장에서 일하는 노부요(안도 사쿠라 분), 거짓말로 연금을 받고 가끔씩 바람 난 남편의 또 다른 자식들을 찾아가 돈을 받는 하츠에 할머니와 할머니의 사연을 알게 되고 호주로 유학 간다는 거짓말을 해 집을 나와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아키(마츠오카 마유 분), 그리고 유리까지. 이 집의 구성원들은 모두 사회가 정한 ‘일반적’인 기준에 편입되지 못한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공간은 서로의 온기로 가득하게 비친다. 카메라는 이 가족이 머무른, 지나간, 살아가는 공간을 비춰준다. 쇼타와 오사무가 주차장에서 스위미에 대해 얘기하는 장면은 부감으로 촬영되어 두 사람의 움직임보다 공간에 집중하게 만든다. 아무것도 없는 곳이지만 조그맣게 보이는 두 사람과 그들의 소리는 그 공간을 따듯하게 만든다.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불꽃놀이의 장면 또한 이러한 특징을 보여준다. 불꽃놀이가 보이지는 않지만 소리를 듣고 있는 가족. 그들의 모습을 부감으로 보여줌으로써 구성원이 있는 공간을 강조하며 그들이 함께 있기 때문에 허름한 집은 아름답게 보인다. 

영화 <어느 가족>의 중국 포스터. 불꽃놀이 장면을 일러스트로 아름답게 표현했다.


 하츠에 할머니의 죽음 이후 영화는 전환점을 맞이한다. 연금을 계속 받기 위해 할머니를 집에 묻을 때, 그동안 아름답게만 보였던 공간은 어두워진다. 구성원 간의 사랑과 신뢰가 기반이었던 공간에서 하나의 연결고리가 단절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연쇄적인 단절로 드러난다. 아키는 연금을 받기 위한 거짓말에 괴로워하고, 쇼타는 살아가기 위한 도둑질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게 된다. 영화의 후반부에 밝혀지듯이 일부러 잡힐 도둑질을 한 쇼타의 사건 이후 오사무와 노부요는 경찰 조사를 받게 된다. 두 사람의 공간은 그때부터 중요해지지 않는다. 이후 카메라는 조사를 받는 오사무와 노부요의 얼굴에 집중한다. 그리고 이는 잃어버린 공간을 그리워하는 자들의 모습과 대비된다. (아키는 완전히 버려진 하츠에 할머니의 집에 찾아가고, 유리는 원래의 가족에게 돌아갔지만 다시 마주하는 폭력에 두려워하고 시바타 가족과 그들의 공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사건 이후 노부요는 감옥에, 쇼타는 고아원에, 아키와 유리는 원래의(혈연의) 가족에, 오사무는 어느 작은 집에서 살아간다. 노부요는 면회를 온 쇼타에게 그를 데리고 온 장소, 시간을 알려주며 원한다면 진짜(혈연)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에 대한 쇼타의 대답은 오사무의 집에서 하루를 보낸 뒤 버스 창가에 기대어 그를 ‘아빠’라고 부르는 것으로 대체된다. 영화의 결말은 유리가 쇼타와 오사무를 만났던 장소에서 ‘가족’으로부터 배운 노래를 부르며 놀이를 하다가 밖을 바라보는 것으로 끝이 난다. 쇼타와 유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들이 보낸 시간이기도 하지만, 그들과 함께한 공간이기에 유리는- 린은 자신을 처음 만난 그 장소에서 다시 가족을 기다리는 것이다. 



+

 유리는 집에서 머리를 자르고 린이라는 이름을 선택한 순간부터 더는 유리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핏줄로부터 행해진 잔인한 폭력에서 벗어나 스스로가 삶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유리는 이제 린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들과 함께한 공간과 시간들을 그리워하면서


++


쇼타가 오사무에게 말 해준 스위미 이야기는 레오 리오니의 동화 <스위미>의 내용이다. 작은 물고기들이 모여 거대한 참치를 물리친 내용인데, 영화 전체의 내용과 맞물리며 독특한 느낌을 준다. 개인적으로는 시스템과 공동체에 대한 은유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의 히로카즈는 ‘맹자 같은’(이 말은 내가 아버지와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덕을 통해서 변화할 수 있다고 믿는가의 여부를 이야기할 때 장난 식으로 사용한다.) 모습을 보인다. 사회 시스템의 문제보다는 료타와 유다이의 가족에 대한 문제제기로 영화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로카즈 감독은 <아무도 모른다>부터는 개인에 대한 문제보다는 사회의 구조에 대해 물음을 던지기 시작했고, <세 번째 살인>에서부터는 시스템의 얼굴을 등장시키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스위미 이야기는 더욱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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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안도 사쿠라가 연기한 노부요라는 인물이 경찰 조사를 받을 때, 아주 천천히 클로즈업되면서 시스템의 얼굴인 경찰들에게 물음을 던지는 장면은 앞서 말한 스위미 이야기와 밀접하게 관계된다.


이 장면에서 안도 사쿠라의 연기는 감탄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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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론적으로 히로카즈 감독은 피로 이어진 가족에 대해 반발하며 이를 유지하고자 하는 시스템 자체에 노부요의 입을 빌려 질문을 던진다. 구성원 간의 사랑과 믿음이 있다면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것으로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사실 놀라운 것이 아니다. 근대사회가 도래한 이후 매매혼 등이 사라진 소위 ‘문명국가’들이 사회를 유지시켜온 결혼이라는 제도가 이 근본적인 물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물론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이전하고자 하는 생물로서의 기본적인 욕구라는 과학적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그에 반하는 사례는 영화 속이 아니라 현실에도 존재한다. 과연 가족은 무엇으로 이루어지고 완성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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