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왜 죽어야 했을까? <공포분자>, 황다빈
<공포분자>, 1986, 에드워드 양
(본 글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작품에 대한 글쓴이의 주관적 생각을 바탕으로 한 감상임을 밝힙니다.)
환상과 현실
영화 초반 타이틀이 올라가고 영화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는가(1966)>의 포스터가 클로즈업으로 등장한다. 마이클 니콜스가 감독을 맡은 이 영화는 에드월드 올비의 원작 희곡을 바탕으로 한다. 그의 대표작인 이 작품은 환상과 현실의 문제 사이에서 실존적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와 동일하게 <공포분자>는 현실과 환상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제시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아내는 소설가이며 남편은 병원에서 일하는 현실적인 직장인이다. 우연히 걸려온 소녀의 장난전화를 통해 아내는 남편의 외도를 의심하고 그를 떠난다. 카메라를 든 소년은 우연히 촬영하게 된 소녀에게 마음을 뺏긴다. 그 뒤 다시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소년은 그 소녀에 대한 환상에 빠져 산다. 그리고 소설가인 아내는 이 일들을 바탕으로 소설을 완성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번복되는 영화의 결말은 어떤 괴상한 의문까지 밀고 나간다. 과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아내의 소설인 것일까?
영화에서 유일하게 내레이션이 존재하는 장면은 아내가 소설을 쓰는 장면들이다. 그리고 그 내레이션들은 마치 아내가 이 영화의 내용을 관망하는 듯한 생각이 들게 한다. 아내가 자신이 썼던 소설들을 지우는 장면에서 내레이션은 현재형이 아니라 소설처럼 과거형의 어구로 말해진다. 그것은 현재 일어나는 행동에 대한 설명이 아닌 소설의 재현이다.
영화는 소설과 현실을 계속해서 뭉그러뜨린다. 아내가 과거의 남자를 만나 책을 보여주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그 장면은 정말 이상하게 짜여있다. 아내가 창문 바깥을 보는 장면 다음 과거의 남자가 보고 있는 책이 클로즈업이 된다. 그리고 책을 다 넘기자 아내의 그림이 표지에 그려져 있다.
통상 그다음 장면으로 그 책을 읽고 있는 남자의 리액션 쇼트가 등장할 거라 예상되지만 영화는 절대 그러지 않고 바로 창밖을 보는 아내의 장면으로 등장한다. 책 속의 글들 다음에 등장하는 그림은 무언가를 골똘히 바라보는 아내의 정면 초상화다.
그다음 장면에 창밖을 바라보는 아내의 뒷모습은 마치 책과 현실을 이어 그 구분을 모호하게 한다. 그 장면에서 더 인상 깊은 점은 마치 책을 접듯 창문을 열자 오른쪽 건물 외벽을 닦는 인부가 창문 유리에 비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장면에서 인부의 모습은 빛이 반사된 착시이며 실제로는 반대편의 건물을 닦는 장면이 다음 쇼트로 등장한다. 그렇게 영화는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환상인지에 대한 구분이 점점 없어진다.
영화가 중후반쯤 이르렀을 때 아내가 쓴 소설이 영화에서 보여준 현실을 기반으로 썼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뒤 등장하는 아내의 인터뷰 장면은 기존의 쇼트들과는 결이 다르게 tv화면을 통해 분리된다. 이 장면은 영화 전반적으로 가장 이질적인 장면이다. 그 인터뷰 장면들만은 다른 장면들과 확실히 구분하기 위해 찍힌 듯 말이다. 이제 그 장면을 제외하고 등장하는 다른 모든 장면들에서는 이런 구분이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는 소설이 현실의 내용과 일치함을 알게 되면서 이 둘, 소설과 현실의 존재를 의식하지만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소설인지 더욱 구분할 수 없다. 영화는 이를 통해 환상이 현실을 얼마나 쉽게 가릴 수 있는지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한다.
영화에서 또 환상을 꿈꾸는 자는 카메라를 든 소년이다. 소년은 우연히 찍은 소녀에게 반해 자신만의 환상을 가진다. 그 뒤 소년의 환상은 벽에 붙은 거대한 소녀의 사진으로 변한다. 그리고 사진 속 주인공인 소녀는 그 사진을 마주하고는 기절 하 듯 쓰러져 버린다. 그것은 마치 환상과 다른 현실의 충돌에서 오는 당혹감처럼 느껴진다. 둘은 사랑을 나누지만 곧바로 소녀는 본색을 드러낸다.
배신을 당하고 자신을 떠나가는 소녀를 보며 소년의 환상은 깨어진다. 그다음 벽에 붙어있던 소녀의 사진이 바람에 날리면서 이미지가 점점 사라지는 듯한 장면은 소녀에 대한 환상의 소멸을 의미하면서 이미지적으로도 너무나 인상 깊은 장면이다.
소년은 카메라를 들어 대상들을 바라본다. 사람들을 따라다니는 소년의 카메라 시점 쇼트의 움직임은 영화 속의 카메라와 일치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소년이 소녀에게 그래 왔던 것처럼 환상이 현실을 왜곡되는 행위가 영화에서도 쉽게 이루어짐을 떠올리게 한다.
이는 이 <공포분자>가 갖는 소설의 환상성을 너머 영화라는 매체의 환상성을 직면한다. 영화라는 허구 속의 허구(소설)를 떠올리며 무엇이 현실이고 소설(환상)인지에 대해 구분은 더욱 모호해진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영화든 소설이든 현실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이 영화 속 남편(리리종)의 죽음과 뉴웨이브 이전 세대의 대만영화들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의 죽음
대만의 영화사를 돌아보자면 식민지 해방 이후 국민당은 1949년 1 당체제의 계엄령을 발효하였고 엄격한 검열 하에 대만영화는 공산당에 맞서는 정치선전 도구일 뿐이었다. 그 당시 국민당은 영화정책의 일환으로 무협영화와 애정영화가 주로 만들어졌는데 그 이유는 권선징악 중심으로 하는 영웅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우월성과 정통성을 강조하고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애정영화를 통해 사회의 우울감을 없애 국민들이 국가건설에 동참하도록 유도하였다. 60~70년대에는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국민당의 엄격한 검열 속에서 대만영화는 돈벌이 수단으로써의 오락영화 그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80년대에 들어 자유화, 민주화의 바람이 불면서 당시의 젊은 예술가들은 이데올로기 관점에서 벗어나 대만의 현실에 집중하였다. 그 뒤 1987년 계엄령이 해제되고 대만 뉴웨이브의 선언이 있었다. 그리고 그 대만 뉴웨이브가 있을 수 있게끔 당시에 젊은 대만 영화감독들을 모아 같이 공부를 하였던 이가 에드워드 양이다. 그들은 국민당의 엄격한 검열에 맞서 그동안의 대만 상업영화를 배제하고 대만의 현실을 그대로 담는 것을 운동의 명제로 삼았다.
여기까지 대만의 영화사를 돌아보았다. 이제 우리는 이 영화의 제작연도를 보자. 1986년. 그것은 계엄령 해제와 대만 뉴웨이브가 공식적으로 선언되기 1년 전의 시간이다. 그전까지 80년대 초반에는 에드워드 양을 비롯한 몇몇의 감독들이 국민당의 검열과 돈벌이 수단으로 만들어진 저질스러운 영화들 틈에서 대만 뉴웨이브의 시작을 알리는 소수의 영화들을 만들었다. 그런 그들에게 이전 세대의 대만영화들은 국민당의 검열과 영화 정책안에서 실재를 가리는 환상이었다. 대만의 현실과 문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방해하고 사람들을 국가의 틀 안에서 움직이게 이용하는 환상 말이다.
마지막 두 개의 결말을 상상해보자. 첫 번째 결말은 리리 종이 자신의 인생을 파국으로 치닫게 한 자들을 찾아 복수하는 서사이다. 그것은 아내가 쓴 소설의 내용을 그대로 실행하는 서사다. 그 결말은 무고하고 불쌍한 리리종이 자신을 배신하고 망가뜨린 자들을 심판하는 자경단이 된 듯한 인상을 준다. 또 관객들이 일종의 복수의 쾌감을 느끼게 만든다. 리리종이 복수를 실행해 나가는 내용에선 어떤 상투적인 교훈마저 느껴지는 듯하다.
그 복수의 끝에 리리종이 비극의 시작이라고 믿는 소녀를 찾으러 가는 장면에서 그는 할리우드 영화들의 대형 포스터 앞을 걷는다. 그중 대표적으로 눈에 띄는 영화 <컬러퍼플>의 포스터. 이 <컬러퍼플>이란 영화는 너무 지나치게 낭만적인 엔딩으로 현실의 문제가 갖는 본질을 해한다고 비판받은 적이 있다. 그것은 이전 세대의 대만영화들을 떠올리게 한다.
만약 여기서 영화가 끝이 났다면 그것은 환상의 승리이다. 리리종은 아무런 비판의식이 없고 무기력하게 순응하며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으로 리리종은 결백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것이 바로 영화라는 환상을 이용해왔던 자들의 목적이다. 그들은 현실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자들이다. 과연 한통의 장난전화로 그의 인생이 끝나버린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승진하기 위해 자신의 동료를 모함하였고 결혼생활 내내 아내의 소설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다. 그는 그런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한통의 장난전화가 자신의 인생을 망쳤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환상의 서사 끝에 도달하는 것은 본인을 향한 총구. 말도 안 되는 통쾌한 복수의 서사를 꿈꾼 자의 최후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내가 만든 소설(환상)의 탈출이기도 하다. 이 복수 시퀀스의 마지막 쇼트가 문을 뚫어버리는 쇼트라는 점에서 탈출의 의미를 곱씹게 한다.
벽에 빨간 피가 튀는 쇼트는 바로 앞의 결말을 향한 총성 같기도 하다. 그것은 첫 번째 결말의 죽음으로도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대만 영화사에 꾸준히 존재해왔던 오점을 이제는 끊어버리자는 제스처로 보인다. 이는 암울했던 이전 세대 대만영화의 종식일 것이다. 그렇게 기존의 서사를 뒤집어버리며 주인공의 죽음 뒤에 등장하는 아내의 입덧은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는가.”의 연장선이다.
그 장면은 더 나아가 새로운 세대의 탄생을 위한 외침처럼 보인다. 이 영화가 나오고 1년 뒤 대만은 38년 만에 국민당 1 당체제의 계엄령이 해제되었으며 50명의 영화인들이 대만 뉴웨이브 운동을 선언을 했다. 그렇게 그의 죽음은 예기치 못한 것이 아닌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