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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모임 로칸디나 Aug 02. 2018

로디즈가 만난 영화 <어느 가족>

인물을 품에 안는 카메라 <어느 가족>, 표국청

<어느 가족>, 2018, 고레에다 히로카즈  

   

   글을 쓰기에 앞서 솔직해질 필요가 있겠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201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했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보면서 였다. 당시 영화과 신입생이었던 필자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얼어붙을 것 같은 담담함에 가슴 아팠고 단숨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에 빠져들었다.

     

   영화제에서 돌아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들을 찾아보기 시작했고 2015년 <바닷마을 다이어리>, 2016년 <태풍이 지나가고>, 2017년 <세 번째 살인>까지 총 3편의 영화를 개봉에 맞추어 극장에서 만났다. 앞서 솔직해질 필요가 있겠다고 이야기한 것은 2018년 <어느 가족>이 도착하기 전까지 필자에게 있어서 히로카즈 감독의 최고작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였기 때문이다.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으나 미루어 짐작해보았을 때 감독을 처음 만난 작품이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였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중심으로 그 이후의 작품들이 이전의 작품들보다 개인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던 점도 한몫했던 것 같다.

     

   전작들이 개인적으로 그렇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 한 이유에 대해서는 일단 이야기를 보류하고, 어찌 되었든 이제는 명실상부 세계적 거장으로 거듭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어느 가족>으로 2018년에 필자에게 다가왔다.

     

(본 글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작품에 대한 글쓴이의 주관적 생각을 바탕으로 한 감상임을 밝힙니다.)


인물을 품에 안는 카메라, <어느 가족>

     

   영화의 원제는 <万引き家族>(만비키 가족)으로 좀도둑질을 뜻하는 ‘만비키’라는 단어가 강렬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느 가족>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하였으며 영화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글을 쓰는 동안 감독의 전작들을 되짚어 보는 것은 되도록 지양할 생각이지만 이 문단에서만 한 번 같이 떠올려 보도록 하자, 감독의 전작들 또한 ‘여느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감독이 가족을 다루는 모습이 그렇게 낯설지 않은 것은 감독의 카메라가 다양한 형태의 많은 가족들을 이미 다루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영화에 보다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다. 이번 글에서는 이토록 친숙한 감독의 가족 영화에서 카메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나아가 전작의 가족을 다루는 카메라에서 무엇이 변화했는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보여주지 않는 것의 활용법

     

   영화를 처음 마주하면 등장하는 첫 번째 샷은 초점이 맞지 않는 텅 빈 공간에 쇼타가 걸어 들어오는 샷이다. 프레임 인은 이제와 새롭다고 이야기하거나 영화문법의 진화라고 부르기에 너무 친숙한 이름일 수 있다. 하지만 감독이 첫 번째 샷에서 이 프레임 인을 사용한 것은 영화가 앞으로 보여주지 않는 것에 조금 더 관심을 기울 일 것을 인식시켜주는 것만 같다. 

    

   여기서 보여주지 않는 것은 카메라의 프레임 밖 외화면을 뜻한다. 첫 번째 샷에서 외화면을 통해 등장하는 인물은 내화면 외의 세상이 존재함을 새삼 일깨워준다. 그리고 앞으로 이야기할 카메라의 작동원리에서도 이 외화면은 중요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카메라는 가족 이외의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물론 가족 이외의 인물이나 사물, 공간이 프레임 안에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것은 가족을 보여주기 위해 지나가는 단계 혹은 가족을 보여주는 동안 프레임을 지나쳐가는 인물들이다.  

   

   영화 속에서 인물이 걸어가는 순간을 떠올려 보자. 카메라는 걸어가는 가족을 중심에 두고 함께 이동한다. 멀리서 인물이 걸어가는 것을 관찰하거나 너무 가까이 달라붙어 인물의 움직임에 얹혀가는 것이 아닌 인물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태도로 함께 걸어가는 카메라가 영화에 등장한다.  

   

   인물이 멈춰 있을 때 혹은 카메라가 멈춰 있을 때 카메라의 거리는 조금 더 다양하지만 가족들을 지켜보는 카메라라는 점에서는 변화가 없다. 그래서 카메라가 가족에게서 거리를 두는 순간이 중요하다. 카메라는 가족에게서 절대로 한 번에 멀어지거나 다가오는 법이 없다.  

   

   유리가 도둑질에 가담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쇼타를 오사무가 설득하고 함께 집에 돌아가며 주차장에서 ‘스위미’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차에서 나온 인물들을 카메라는 따라간다. 그리고 어느 정도 거리를 함께 걷고 나서야 거리를 벌려 부감으로 인물을 바라본다.


   주차장에서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묘사된 이 장면에서 비롯하여 카메라가 가족들에게서 멀어지는 장면들은 그들이 누구의 간섭도 없이 추억을 쌓을 수 있도록 외화면의 경계를 가족들에게서 멀찌감치 떨어뜨려주는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결국 카메라는 가족을 바라보고 가족을 사회와 분리시켜주며 동시에 가족 이외의 것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가족을 품에 안고 있게 된다.

      

   거리감 이외에도 카메라는 심도를 통해 가족 이외의 것을 보여주지 않으려 노력한다. 심도라는 것을 관심도라고 표현해보자. 카메라가 현실을 재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여주는 방법은 어떠한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즉 카메라가 바라보는 모든 것을 깨끗하게 볼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감독은 의도적으로 불순물을 섞는다. 이는 카메라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만을 보도록 유도하는 것이며 동시에 다른 것에 대한 시각적 재현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재미있는 지점은 카메라가 바라보는 대상, 그 거리, 심도는 모두 가족에게 맞추어져 있지만 딱 한 가지 가족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다른 곳을 훑어보는 영화적 장치가 하나 있다는 점이다. 

    

   소리다. 그리고 이 소리가 존재하는 곳은 외화면이다. 

    

   카메라가 보여주는 것은 가족이다. 보여주지 않는 것은 가족이 아닌 것이다. 조금 더 비약하자면 가족을 둘러싼 사회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외화면을 적극 활용한다. 처음에는 가족들 안에서 외화면의 작동을 느끼게끔 해준다.  

    

   ‘유리’(배역의 이름이 네이버 영화 기준 유리로 표기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린’이라고 부르고 싶다.)에 대한 이야기를 가족들이 나눌 때 카메라는 유리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외화면에서 가족들의 말소리가 화면 안으로 침범한다. 단순한 보이스 오버를 넘어 외화면의 존재가 내화면의 존재를 대하는 방식에 대해 설명한다. 

    

   그리고 다음에는 가족들을 대하는 외화면이 등장한다. 영화에서 때때로 마치 가족을 남기고 모든 사람들이 사라져 버린 것만 같은 순간이 나오는데 이때마다 외화면에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제시한다. 바다에서 물놀이를 하는 가족들의 모습과 할머니인 하츠에의 모습을 카메라가 바라볼 때 외화면에서 즐겁게 웃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외화면의 존재들은 가족들에게 직접적인 질문을 던진다. 형상들의 질문을 받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시퀀스에서 외화면의 존재들은 가족들의 본질을 건드리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진다. 

    

   특히나 노부요에게 던지는 질문은 마치 날카로운 파편처럼 다가와 노부요를 그리고 관객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 불편함에 기어코 노부요가 눈물을 흘리고 말았을 때 카메라는 감독의 카메라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굳건히 노부요의 얼굴을 보여준다. 심지어 아주 천천히 노부요에게 다가가면서 말이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외화면과 내화면(가족) 간의 관계 형성을 토대로 사회가 품고 있는 질문들을 관객에게 던진다. 폭력으로까지 느껴지는 노부요의 클로즈업에서 관객들은 그 폭력을 고스란히 받는다. 영화 내내 내화면에 존재하며 우리의 시각을 훔쳐갔던 존재가 누군가의 공격을 받을 때 우리는 몰입되었던 감정에 의해 함께 상처받는다. 그리고 돌아서서 깨닫는다. 우리는 외화면에 앉아있다는 것을.  

   


훔치는 것과 주워오는 것의 사이에서     


   영화의 서사에 있어서 개인적으로 중요하게 느껴지는 지점을 하나만 짚고 넘어가고 싶다. 영화의 시작부터 인물들이 보여주는 기본적 행위는 훔치는 행위이다. 재미있는 지점은 이 훔치는 행위를 대하는 가족들의 태도이다. 가족들은 기본적으로 훔치는 행위에 대해서 ‘주워오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훔치는 것과 줍는 것의 공통점이라고 하면 ‘무언가를 취하는 것’이다. 차이점은 ‘어떻게 취하느냐’이다. 훔치는 것은 누군가에게 강제로 무언가를 가져오는 행위이고 줍는 것은 주인이 없는 것 혹은 주인이 불분명하거나 모두가 주인인 것을 선점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가족들은 마트에 있는 물건은 아직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알고 있다. 마트에 있는 물건의 주인은 마트다. 좀 더 정확히 하자면 유통을 담당하기 위해 생산자로부터 물건을 사들인 조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은 물건의 주인이 없다는 이유로 본인들의 행위를 합리화한다. 유리를 데려온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유괴가 아닌 보호라는 명목을 내세운다. 이유는 몸값을 요구하거나 감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또다시 알고 있다. 어찌 되었든 가족들은 유리를 유괴한 것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결국 사회를 유지하는 어떠한 틀 안에서의 인식이다. 가족의 행위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은 맞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는 행위가 결과적으로 가족을 결속하는 하나의 끈이 되어준다는 점과 동시에 그 피해를 입은 사람은 과연 정말로 피해를 입었는가에 대한 부분이다.     


   마트가 도둑질로 인해 회생불가의 피해를 입었는가, 유리의 부모가 유리가 사라짐으로써 정말로 피해를 입었는가에 대한 부분은 비약적이지만 이 가족의 형태가 단지 사회와 맞지 않기 때문에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닌가에 대한 의문으로 넘어간다. (물론, 이 또한 함부로 누군가 답을 내릴 수 있는 질문은 아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가족의 해체는 사회의 기준으로 이루어진다. 진심으로 가족들에게 감사하고 있던 하츠에의 죽음은 연금을 위한 부부의 살인으로 추정되고 유리는 폭력이 만연한 본래의 집으로 돌아간다. 쇼타 역시 시설로 들어가 학교를 다니게 된다.     

 

   이 일련의 흐름은 결국 사회적으로 바라보았을 때 비정상인 가족을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한 과정으로 보인다. 이 과정이 옳은지 혹은 사회적으로 ‘정상’이라 불리는 것만이 과연 유효한 상태인지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이 과정 속에서 쇼타는 오사무를 처음으로 아빠라고 부르고 유리는 집 밖의 베란다에서 턱을 넘어 밖을 바라보다 나가고자 하는 아주 미세한 움직임을 보이기 때문이다.      


   훔치는 것에 대해 가족들의 기준을 동의할 것인가 묻는다면 시원하게 대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가족들이 주워온 것을 대하는 태도는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워온 것(훔친 것)에 대해 적어도 애정을 보이기 때문이다. 주워온 것으로 형성되는 가족이자 주워온 것으로 유지되는 가족의 모습은 그 가족을 사회가,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해 불온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영화는 노부요의 입을 통해 관객들에게 묻는다.     


   “버려진 것을 주워온 것뿐이다. 버린 사람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닌가?”   

    

   ‘누가 훔치게끔 하였는가?’ 그리고 ‘훔치는 자를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 영화.

   <어느 가족>이다.


   PS. 영화에 간간히 등장하는 ‘받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가장 뚜렷이 드러난 장면만을 이야기해보자면 쇼타가 항상 도둑질을 하던 동네 구멍가게에서 처음으로 유리가 도둑질을 하는 순간 가게의 주인인 할아버지가 쇼타에게 불량식품을 쥐어주며 “여동생에게는 시키지 말거라.”라는 말을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영화는 가족과 사회와의 관계를 통해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이 장면처럼 가족들이 무언가를 받는 장면에서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감독의 어렴풋한 대답을 엿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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