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의 응원하고 싶은 세계관과 아직 남은 의문들, 표국청
마녀, 박훈정, 2018
개인적으로 박훈정 감독의 작품을 보러 갈 때는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는 편이다. 어쩌다 보니 그의 모든 연출작을 보았는데 매번 필자를 괴롭히는 이미지가 곳곳에서 튀어나왔었기 때문이다. <신세계>의 엘리베이터 장면은 지금에 와서 보면 괜찮지만 당시 극장에서 볼 때는 정말 괴로웠다.
하물며 작년 <브이아이피>로 일련의 논란을 겪은 박훈정 감독의 차기작이기에 마음의 준비는 더욱 단단해졌다. 전작들도 일면 비슷한 성향을 지니지만 <브이아이피>를 봤을 때 감독이 가지는 영화의 테크니컬 한 부분이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필요 이상의 또는 불필요한 불편함을 자극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영화의 장르적 특성, 감독 특유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방식에 있어서 필요한 장면이라고 이야기하는 관객들도 있었지만 우리는 그 장면 이상으로 효과적이고 훌륭한 영화적 이미지들을 <브이아이피> 이전에 목격했었기에 필자는 이 논란에 대해서 감독의 과잉이 불러일으킨 파장이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앞으로 더 나은 영화들이 만들어지기 위해 필요한 담론 형성과정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어쨌든 그로부터 1년 뒤 <마녀>가 찾아왔다. <브이아이피>의 개봉일이 2017년 8월 23일. <마녀>의 크랭크인이 2017년 9월 15일이기 때문에(영화진흥위원회 자료 기준) 아마 <마녀>는 <브이아이피>의 후반 작업 과정에서 이미 작업에 들어갔을, 그리고 기획은 그 이전부터 시작된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때문에 <마녀>를 <브이아이피>의 후속작이라는 느낌보다는 감독이 만들어낸 또 다른 작품이라는 입장에서 받아들이고자 노력했다. <브이아이피>가 남긴 영향을 온전히 받아들여지기 이전의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마녀>를 보러 극장에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각오를 다지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것을 모두 목격한 지금, <마녀>는 필자에게 흥미로운 영화로 남아있고 영화의 단점들 보다도 응원하고 싶은 심정으로 응원하는 지점과 응원하기 위해 필요한 지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본 글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작품에 대한 글쓴이의 주관적 생각을 바탕으로 한 감상임을 밝힙니다.)
‘마녀’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는 2017년 10월에 개봉한 대런 아르노프스키 감독의 <마더!>에 나오는 오프닝 시퀀스이다. 불 속에서 타들어가는 여성의 얼굴. 필연적으로 마녀는 화형이라는 이미지를 떠오르게 만든다. 어떤 한 단어를 떠올렸을 때 그 단어의 죽음이 이미지로 연상되는 단어가 얼마나 있을까?
이렇듯 마녀는 철저히 핍박받는 자의 위치에 놓여있는 단어이다. 조금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단단히 굳어진 사회의 기득권층을 유지하기 위해 이용당한 타자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마녀>의 시작 지점에 등장하는 많은 사진자료들에는 인류가 자행해왔던 의식, 의학적, 생물학적 실험들이 나열된다.
마녀를 다루는 중세 문헌들에서 성경의 악마 구절을 거쳐 나치와 세계대전 중 또는 그 후에 진행된 무차별한 실험들에 대한 이미지들이 나열되다가 결국 해부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뇌가 등장한다.
영화는 <마녀>가 가지는 세계관에 대한 가장 큰 설명을 이 오프닝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결과적으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마녀(김다미 배우가 연기한 구자윤 캐릭터 이외에는 마녀라고 불리지 않으나)들은 어떤 천부적인 초능력이나 마법을 다루는 인물들이 아니며 일종의 개조 인간이라는 것이다.
영화의 후반에 밝혀지지만 우월한 육체와 DNA를 통해 만들어진 이 아이들은 일반 사람과 비교해 월등한 신체적, 지능적 능력을 가지며 초능력도 발휘한다. 이렇듯 영화는 타의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철저히 숨기는 영화와 만들어진 ‘나’
<마녀>의 초반부터 후반에 돌입하기 직전까지의 과정은 철저히 숨기는 과정이다. 영화의 시작점에서 관객들은 어린 소녀와 얽힌 무참한 참살의 종결 지점을 목격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도망쳐 나온 소녀와 마녀라는 제목을 통해서 관객들은 관성적으로 ‘자윤’이 언제 능력을 발휘할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영화를 보게 된다.
하지만 영화는 자윤의 능력을 포착할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메라를 돌려 그 능력을 숨기고 자윤의 과거에 대해 숨기고자 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숨김은 후반의 반전을 위한 선택이지만 영화의 후반에 일어나는 일련의 의미 작용을 위해 유의미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뒤에 자세한 이야기를 하겠지만 무언가 비밀스러운 작전을 수행하는 자윤의 의식과 맞닿아 있는 영화적 설정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이 구간에서 흥미롭게 볼만한 영화적 단서는 ‘자윤’이 자신을 노리는 사람들을 목격하고 난 이후 계속해서 그들에게 던지는 말이다.
“나한테 왜 이래요?”
물론 이 말 또한 후반의 반전을 위한 자윤의 연기 내지 속임수였다는 것이 드러나지만 사실 이 말만큼 영화가 가지는 세계관의 근본을 건드리는 말도 없다. 자윤은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라고 하는 존재를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기본적으로 ‘나’는 ‘타인’이 있기에 성립한다. 이때 타인은 개인일 수도 ‘나’가 접하는 사회나 세계일 수도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에게 영향을 받거나 영향을 주며 ‘나’를 성립한다. 나를 만들어 가는 것은 결국 자신이라는 말이다.
‘만들어지다’라는 단어는 또 어떠한가. 만들어지다는 피동사다. 남의 행동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동작이라는 것이다. 보통 만든다는 것은 어떠한 필요에 따라 무언가를 이루는 행위이다. 세상에 의도나 목적 없이 만들어지는 무언가는 없다. 결국 ‘만들어진 것’은 누군가의 의도와 목적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만들어진 존재, 다시 말해 ‘만들어진 나’는 어떨까. 자윤은 의학적 생물학적 실험의 피실험체로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실험장을 탈출한 이후 한 노부부에 거두어져 비교적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 후반에 밝혀지는 이야기이지만 탈출한 이후 자윤은 한 번도 그 실험장과 연관된 사람들을 잊은 적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처절한 복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윤은 온전히 평범한 삶의 ‘나’로 살아갈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남는다.
결과적으로 자윤의 “나한테 왜 이래요?”라는 대사는 자윤이라는 캐릭터가 본질적으로 가지는 문제인 “나는 왜 만들어졌는가?” 나아가 “나를 왜 만들었는가?”로 귀결된다. 이 문제는 아마도 시리즈로 기획되었을(오늘 개봉한 <마녀>의 부제는 part 1. subversion이다.) 이 영화가 앞으로 시리즈를 거듭해나가며 답을 찾아야 할 문제일 것이다.
다만, 단일한 영화로 놓고 보았을 때 <마녀>는 이미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어느 정도 내어놓았다. subversion이 내포한 전복, 파괴라는 의미들을 미루어 보아, 그리고 영화가 가지는 서사와 전개로 보아 자윤은 ‘만들어진 나’에 대한 전복을 시도한다.
나는 왜 만들어졌고 왜 만들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거듭할수록 훼손되는 것은 나의 주체성이다. 때문에 자윤은 이 의문에 대한 답, 그 자체를 제거하고자 한다. 결국 이 영화는 ‘나’에 대한 주도권을 쥐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앞서 마녀는 핍박받는 타자였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때문에 <마녀>의 마녀는 특별하다. 기득권의 유지와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과거의 마녀는 존재하지 않는 '다름'에 의해 불길 속 타들어갔지만 <마녀> 속 마녀는 그 '다름'으로 인해 그 기득권을 박살 낼 수 있는 힘을 가진다. 영화가 이 힘을 마녀에게 쥐어주는 순간이 가장 정서적 쾌감을 자극하는 지점이다.
자윤의 엄마(거두어 기른)는 자윤에게 "사람들은 나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때문에 자윤의 엄마는 자윤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짐'을 위해 '다름'을 숨기기를 원한다. 하지만 영화는 초반과 중반에 걸쳐 숨겨왔던 '다름'을 후반에 드러냈다. 다름을 드러낸 자윤이 어딘가에 다시 받아들여질 때 시리즈는 결말을 마주 할 수 있지 않을까?
액션이라는 장르, 버릴 수 있을까?
<마녀>는 미스터리 액션을 표방한 영화다. 그리고 영화의 전반에 걸쳐 보았을 때 이 영화는 액션 영화가 맞다. 또한 앞서 말한 것처럼 힘 있는 사람들을 박살 내는 영화에 액션은 잘 어울리는 장르이다. 게다가 감독은 그 장르를 자신의 영화에 훌륭한 재료로 이용하는 소질이 있는 사람이다.
다만, <마녀>가 가지는 세계관에서 만들어진 존재들이 가지는 능력들을 표현하기 위해서 지나치게 CG와 편집에 의존한다. 일반적인 장면들과 위화감이 형성되는 순간 알 수 없는 거부감이 기어 올라오는 것이다. 이는 특히나 이런 장르 또는 서브컬처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이라면 더 할 수 있다.
또한 액션 장면 이외의 장면에서도 액션 장르의 문법을 따르다 보니 의미 없게 느껴지는 컷의 전환이 영화에 존재한다. 이는 감독이 가지는 과잉의 특성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과잉의 특성을 조금 덜어낸다면 <마녀>가 가지는 세계관이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지는 않을까라는 의문이 남는다.
또한 같은 이유로 여전히 소모적인 이미지들이 존재한다. 물론 감독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편집 점에 있어서 소모적인 이미지들을 되도록 제한하고자 하는 노력이 느껴지기는 한다.
기본적으로 소모적 이미지의 지속 시간을 짧게 가져가는 부분부터 소모적 이미지를 외화면으로 미루어 둔다거나 파편화시킨다거나 또는 이미지를 마주하는 대상의 반응으로 전환하는 것이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다만 이러한 방법들은 본질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어찌 되었던 소모적 이미지가 필요한 영화를 만들었으면 그 소모적 이미지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영화의 전반에 걸쳐 영화가 가지는 정서적 지점과 시각으로 느끼는 감각적 자극이 합일되지 않는 경험을 하게 된다.
때문에 배우들의 연기가 무덤덤하게 느껴지고 액션은 너무 어렵게 받아들여진다. 감각적 쾌락으로서 받아들여지기 이전에 무언가 정서적 부분을 거쳐 가는 액션이기에 그렇다.
감독은 분명한 강점이 있다. 액션을 사용할 줄 알고 있고 캐릭터들에 대해 설명하지 않고 설명하는 능력이 있다. 서사적으로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것도 감독으로부터 느껴지는 강점 중 하나이다.
다만, 여전히 그 강점의 과잉 속에서 무언가 단단한 뿌리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감독의 테크닉을 구사하는 능력 이전에 영화가 가지고 있는 맥락들에 그 테크닉이 어우러지지 않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마녀>는 굉장히 흥미로운 영화다. 또한 시리즈의 시작점으로서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물론 시리즈의 시작을 위한 후반의 이별은 개인적으로 혹처럼 느껴졌으나 이는 필요한 혹이라고 생각되는 정도이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씬에서 다루어지는 지점 또한 흥미를 이어가기에 충분하다.
부디 속편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속편에서는 더더욱 진화한 영화와 마녀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