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세계, 끝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표국청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자비에 르그랑, 2017
프랑스 영화가 사회의 문제를 제시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 가까이는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만났던 로랑 캉테의 <워크숍>이나 근래 영화관에서 보았던 로빈 캉필로 감독의 <120BPM>이 있고 멀리 보자면 누벨바그 세대의 감독들이 만들었던 몇몇의 영화가 생각난다. 보다 정확한 표현을 찾자면 프랑스 영화가 사회를 다루는 방식에 대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단적으로 프랑스의 영화들만 놓고 고민한 것은 아니었지만)
필자는 영화를 대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고 영화가 가지는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논쟁을 시작한다면 끝날 수가 없다고 믿지만 한 편으로 영화는 일종의 소통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바라보고 고민한 것에 대한 이야기가 영화를 보는 사람에게 닿았을 때 일어나는 일종의 소통 또는 교감. 이것이 영화가 성립하는 제 1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필연적으로 영화를 보았을 때 그 영화를 만든 사람이 속한 세계(좁게는 한 개인의 이야기에서 넓게는 전 세계, 나아가 온 우주)를 바라보는 태도와 고민,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느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가 필자는 프랑스 영화가 사회를 다루는 방식에 대한 고민을 한 적이 있다. 고민의 가장 큰 지점은 ‘과연 프랑스 영화와 한국 영화가 사회를 다루는 방식에는 큰 차이가 있는가?’였다. 당연히 영화가 만들어진 국가만을 놓고 영화의 우열이나 영화가 가지는 힘의 크기를 가릴 수 없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서의 ‘나’가 받아들이는 이 간극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아직은 고민에 대한 명확한 답을 스스로도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본 글에서는 이 간극에 대한 언급이나 한국영화나 프랑스 영화가 가지는 차이에 대한 언급은 자제할 것이다. 다만, 필자가 느낀 프랑스 영화가 가지는 ‘사회를 다루는 방식’에 대한 몇몇 지점을 <아직 끝나지 않았다>를 토대로 풀어나가고자 한다.
(본 글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작품에 대한 글쓴이의 주관적 생각을 바탕으로 한 감상임을 밝힙니다.)
영화는 비어있는 판사실에 판사가 들어서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판사는 곧 11살 아이 줄리앙을 두고 벌이는 양친의 양육권 분쟁을 중재하게 된다. 영화가 시작하고 제법 긴 시간 동안 줄리앙의 양친과 그들의 변호사들이 벌이는 논쟁을 주목한다. 조금 구차하지만 이 법적 논쟁 장면은 본 글에서 몇 번 언급될 것이기에 그 장면을 조금 묘사해본다.
논쟁의 핵심은 줄리앙이 스스로 보호소에서 진술한 진술서의 진위여부이다. 줄리앙은 진술서에서 자신의 아버지인 앙투완을 보지 않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앙투완은 줄리앙의 어머니인 미리엄이 아이들을 세뇌하였다고 주장하며 자신은 아버지이기에 줄리앙을 격주에 한 번씩 만날 자격과 아이들의 거처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알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치열한 논쟁 중 주목해야 할 점은 영화가 시작되고 논쟁이 끝날 때까지 줄리앙의 모습은 등장하지 않지만 등장인물의 모든 대화 안에 줄리앙의 존재가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가 스스로 줄리앙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선언하는 지점이다.
‘그 사람’을 만든 것은 무엇인가?
논쟁 이후 법은 앙투완에게 호의를 베푼다. 아버지이기에 어린 자식에게 울타리가 되어 주어야 한다는 앙투완의 말에 따라 격주 주말마다 줄리앙을 앙투완이 돌보도록 한다. 미리엄은 법적 결론이 나기 전 앙투완 몰래 공용 아파트 단지로 이사를 가게 되고 앙투완에게는 계속 외가에서 지내는 것처럼 거짓말을 한다.
줄리앙 역시 이 거짓말에 동참하고 앙투완을 만날 때마다 거짓말은 쌓여간다. 영화의 초반 서사가 전개되어가는 원동력은 이 거짓말들에서 나온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수많은 거짓말들이 오고 간다. 앙투완은 이 거짓말들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추궁하고 결국 사실에 다가간다.
다시 이야기를 앞으로 돌려 줄리앙의 진술서로 돌아가자. 줄리앙의 진술서는 자신이 아버지를 싫어하며 성인이 되어 아버지를 만나지 않아도 되는 누나 조세핀과 마찬가지로 본인도 아버지를 만나지 않을 선택권이 주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있다. 진술서를 판사가 읽는 것이지만 판사가 진술서를 읽기 전 선언하듯 보호소에서 줄리앙이 말한 언어들이 글자로 표기되어 있는 진술서는 줄리앙의 말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문제는 이 진술서를 거짓으로 받아들이는 앙투완으로부터 시작된다.
앞서 영화 속에 거짓말들이 무수히 많이 등장한다고 하였다. 그 시작점은 아이러니하게도 줄리앙의 진술서인 것이다. 줄리앙의 진술서가 거짓이라는 것이 아닌, 그 진술서를 거짓으로 받아들이는 앙투완 때문에 무수히 많은 거짓말을 추가로 내어놓아야 하는 줄리앙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앙투완은 줄리앙의 진심을 모르는 것일까? 법적 논쟁 이후 줄리앙과 앙투완이 처음 만나는 순간 앙투완은 줄리앙의 자신에 대한 반감을 알고 있다. 앙투완은 줄리앙의 진심을 애써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줄리앙과 조세핀 그리고 미리엄(이하 줄리앙들)은 앙투완을 ‘그 사람’이라고 부른다. 단순히 ‘그’가 아닌 ‘그 사람’. 마치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덧씌운 것 같은 이 단어는 줄리앙들이 앙투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잘 보여주지만 앙투완은 앞서 말했듯 이 사실을 모두 인지하면서도 이 관계를 어떻게든 이어가려고 한다.
그렇다면 앙투완은 왜 이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야만 하는 것일까. 표면적으로는 아버지의 권리이자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포장되어있지만 필자는 앙투완의 이 집착을 대물림받은 잘 못된 가치관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앙투완은 진심으로 줄리앙들을 되찾고 싶어 한다. 자식들뿐만 아니라 미리엄과의 관계까지 되돌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계속되는 줄리앙들의 저항은 앙투완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에 대한 단서는 앙투완을 대하는 앙투완의 아버지와 어머니. 즉 친가의 태도이다. 앙투완의 아버지가 영화에서 처음 줄리앙에게 던지는 한 마디는 “사냥을 가야 하니 준비해라.”이다. 우리는 법적 논쟁 장면에서 던져진 무수히 많은 정보들 중 앙투완이 수렵 동호회 회원이라는 정보가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연상할 수 있다.
결국 앙투완의 성향은 그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며 동시에 앙투완의 아버지는 자신의 손자인 줄리앙에게도 그 성질을 물려주고자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줄리앙에게 고압적인 태도로 대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앙투완을 보고 앙투완의 아버지는 “네가 다 망쳐놓고 있다.”라는 발언을 하지만 그 이후 앙투완의 짐들을 자신의 집 밖으로 던져버리며 “이곳에서는 내가 왕이야.”라는 발언을 하는 것을 보면 과연 망쳐버린 것이 누구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든다.
다시 앙투완의 상황인식으로 돌아와서, 그는 줄리앙들의 저항에 대하여 인지하고 있지만 동시에 인정할 수가 없다. 자신은 아버지이고 가장이고 동시에 이 가정에서는 왕이었어야 하기 때문에. 왕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어야 하고 그들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앙투완은 이러한(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자신의 생각과 현실의 상황이 부조화를 일으키는 순간 자신이 가진 가장 원시적인 것으로 그들을 통제 하에 두고자 한다.
이러한 폭력이 문제라는 것조차 앙투완은 알고 있지만 앙투완이 줄리앙들의 아파트에 처음 방문한 장면을 곱씹어 본다면 앙투완이 이미 그 문제를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줄리앙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그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줄리앙들에게는 이미 공포인 것이다. 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공포를 주는 존재. ‘그 사람’을 누가 만들어내었는가에 대한 단서를 영화는 영리하게 던져준다.
물론 이것은 철저히 필자의 주관적인 앙투완에 대한 추측이며 이 추측이 맞다고 하더라도 앙투완이 벌이는 모든 행동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불안감을 형성하는 파편화된 이미지들
앞서 영화의 초반, 서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거짓말’이라고 했으나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아니 영화가 고유하게 가지는 서사 이상의 막강한 힘은 불안감에 있다. 무엇 하나 안정되어 있지 못하다는 느낌. 잠깐의 편안함 속에서도 불안감이 화면 밖으로 기어 나오는 순간 그 편안함이 편안함으로 느껴지지 않게 된다.
영화는 이 불안감을 효과적으로 형성하기 위해 파편화된 이미지를 활용한다. 가장 큰 예는 자동차에 타고 있는 줄리앙의 얼굴일 것이다. 그리고 때때로 비교적 넓은 화면에서 시작하여 아주 천천히 화면을 좁혀나가는 방식을 사용하는데 이 파편화된 이미지는 사실상 공간을 제한하는 동시에 외화면의 존재감을 극대화시킨다.
2.35:1의 화면비에서 이루어지는 이 작업은 불안을 느끼는 피사체에 카메라가 다가감과 동시에 피사체를 둘러싼 외화면을 확장시키며 외화면에 존재하는 무언가에 의해 피사체의 불안감이 폭발할 것임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이때 외화면에 존재하는 무언가는 ‘그 사람’ 일 수도 있으나 보다 넓게 바라보았을 때 피사체를 둘러싼 사회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영화는 이 외화면에 대한 불안감을 이용하기 위해 영화의 시작점부터 사회가 개인에게 가할 수 있는 폭력을 세심하게 묘사한다. 이미지를 바라보는 동안 폭력인지 인식할 수 없을 만큼의 이 디테일들은 영화가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쌓여서 어느 순간 피사체를 위협하는 막강한 힘이 된다.
때문에 영화는 불안하고 그래서 불편하다. 11살 아이의 불안감을 90분간 목격하는 것은 여간해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그 불안감을 조성하는 것은 표면적으로 특정 인물이지만 그 안에는 우리가 구성해놓은 ‘사회’가 있다는 것이 가장 불편하게 다가온다. 단순히 이미지가 고통스럽기 때문이 아닌 우리가 이 아이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장본인. 즉 ‘그 사람’과 공법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간담이 서늘해진다.
뿐만 아니라 영화에서 잠깐 언급되지만 가장 강렬하다고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장면 역시 파편화된 이미지로 표현된다. 바로 줄리앙의 누나인 조세핀이 화장실에 들어가 임신테스트기(로 추측되는)를 사용하는 장면이 그렇다.
조세핀에게는 사무엘이라는 남자 친구가 있다. 장면의 시작점에서 조세핀의 휴대전화로 사무엘의 메시지가 도착한다. “확인해보고 연락 줘. 사랑해.” 이에 조세핀은 “알겠어. 나도 사랑해.”라고 답장한다. 이후 조세핀이 향하는 곳은 화장실. 조세핀이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닫으면 카메라는 조세핀을 쫓지 않는다. 다만 문의 아래 틈으로 보이는 조세핀의 신발을 포착한다.
제법 긴 시간 동안 조세핀의 신발을 보고 조세핀이 바닥에 던진 상자(임신테스트기 상자로 추정되는)를 보고 조세핀이 두려움에 떠는소리를 듣고 이내 흐느끼는 소리를 듣는다. 결과적으로 조세핀이 임신을 했는지에 대한 여부는 영화에서 언급되지 않지만 이제 갓 성인(법적)이 된 조세핀이 가지는 불안감을 보여준다.
사실 영화의 시작점인 법적 논쟁 장면에서 이야기의 쟁점은 ‘줄리앙’이지만 줄리앙이 쟁점이 되는 순간 배제되는 존재가 있다. ‘조세핀’이다. 조세핀은 곧 법적 성인이 되기에 양친의 양육권 분쟁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다. 앙투완도 미리엄도 조세핀에 대해서는 그녀의 선택에 맡기겠다는 말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세핀은 자유를 얻었지만 동시에 관심에서 배제된다.
또한 온전히 자유를 얻은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조세핀을 대하는 미리엄의 태도에서 엿볼 수 있다. 조세핀을 통제하려고 하는 미리엄의 시도들은 조세핀을 괴롭게 만든다. 조세핀은 몇 차례 영화 속에서 “견디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렇지만 조세핀을 들여다 봐주는 이는 없다. 남자 친구인 사무엘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사랑에 대한 영화의 자세한 언급이 없을뿐더러 사무엘은 조세핀에게서 500km 떨어진 지역에 거주한다.
스스로를 통제하는 외부의 작용이 아직 남아있는 채로 자유를 부여받은 조세핀은 자유로운 하나의 사람보다도 관심에서 배제된 어떤 존재로 그려진다. 때문에 화장실 장면에서 우리는 조세핀에게 몰아치는 사회의 태도와 그녀가 감당하기 어려운 불안과 공포를 느끼게 된다.
무엇이 끝나지 않았고 무엇이 계속될 것인가?
영화의 제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이다. 영화의 형식에 있어서 영화는 줄리앙 가족의 전사를 생략하고 최종적 사건 이후 스스로 매듭짓기를 거부한다. 관객은 단지 줄리앙 가족이 처해있는 상황을 바라볼 뿐이다. 93분이라는 효율적인 시간 동안 감독은 아주 영리하게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던지지만 영화가 끝나고 ‘그래서?’라는 의문이 남을 수 있다.
영화의 끝에서 우리는 ‘그래서 줄리앙 가족은 어떻게 되는 거지?’에 대한 단서를 찾아보기는 힘들지만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에 대한 단서는 찾을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이웃집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투철한 신고의식을 가지며 공권력이 정의롭고 투명하고 정당한 절차에 따라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교훈뿐만은 아니다.
영화라고 하는 매체는 필연적으로 카메라를 통해 어떠한 이미지들을 엿보게 된다. 때문에 앞서 이야기했듯 <아직 끝나지 않았다>를 보는 순간 우리는 아이를 불안하게 만드는 공범의 불편한 감각을 경험할 수 있다.
영화의 종반, 앙투완은 결국 총을 들고 줄리앙들의 아파트에 찾아오고 이웃집의 바우디 할머니와 미리엄의 신고, 경찰의 노력으로 다행히 인명사고가 일어나지 않은 채 앙투완이 연행되어가지만 관객으로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일련의 공포가 휘몰아친 이후 카메라의 움직임이다.
사건이 종결되고 경찰이 미리엄과 줄리앙을 보호하는 동안 바우디의 집으로 이동한 카메라는 바우디의 힘을 빌려 줄리앙에게서 벗어나 타인의 눈으로 줄리앙들을 바라본다. 이때 카메라의 눈은 바우디의 눈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관객들의 눈이기도 하다. 영화는 끝까지 관객으로 하여금 줄리앙을 둘러싼 공포스러운 타인으로 존재하게끔 만든다.
물론 바우디는 줄리앙들을 보호하기 위해 경찰에 신고를 하였고 결과적으로 바우디는 줄리앙들의 은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 바우디의 시야가 경찰에 의해 저지되는 순간(경찰이 아파트 문을 닫는 순간) 우리는 줄리앙들과 차단되어 타인이 된다. 바우디가 자신의 문을 닫으면 우리는 이제 사회가 된다.
사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줄리앙들의 사건은 사회에서 특별히 희귀한 케이스의 사건은 아닐 것이다. 가정폭력 내지 가정불화에 의한 피해를 겪고 있는 사람들은 비단 프랑스가 아닌 우리나라에도 있을 것이다. 영화는 카메라를 통해 그 많은 사람들 중 한 사람. 한 가족을 선택하여 그 공포에 대해 이야기하고 우리를 그 공범으로 만들며 종국에는 모두를 방관자로 만든다.
사회에 실존하는 문제를 그저 93분간 일종의 서스펜스 극으로 소비하고 극장을 나가면 그만인 우리들에게, 작위적인 메시지를 던지지 않지만 가장 공포스러운 방식으로 질문을 던진다.
‘무엇이 계속될 것인가?’ 그리고 ‘계속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