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모임 로칸디나 Jun 25. 2018

로디즈가 만난 영화 <애정만세>

텅 빈 집처럼 공허한 사람들 <애정만세>, 황다빈

<애정만세>, 차이밍 량, 1995


   꽤 오래전부터 우린 빠르게 살아가는 삶에 익숙해졌다. 이젠 이웃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경우가 더 많다. 그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 울타리는 더 좁아져서 새로운 사람을 들이기도 버겁다. 많은 사람들이 “내 집 마련”을 목표로 열심히 살아가지만 정작 옆집에는 관심이 없다. 필자 본인도 원룸 건물에 살면서 옆집에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걸 얼마 전 에야 알았다. 그때 문득 든 생각이 있다. “이래도 괜찮을 걸까?”


   필자가 매우 양심적인 생각을 했다고 볼지 모르겠지만 얼마 뒤 모르는 이웃주민의 인사에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본 글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작품에 대한 글쓴이의 주관적 생각을 바탕으로 한 감상임을 밝힙니다.)


텅 빈 집처럼 공허한 사람들 <애정만세>, 황다빈

 

   영화 애정만세는 대사도 많지 않고 거창한 서사가 존재하지도 않는다. 세인물의 일상들이나 이 일상들이 얽히며 벌어지는 이야기가 전부다. 영화는 전혀 설명적이지 않고 보여지는 쇼트와 지속시간만으로 충분히 영화를 받아들이게 한다. 


   메이는 집을 팔러 다니는 공인중개사다. 그녀는 많은 ‘빈집’들을 관리하고 중개한다. 메이는 그중 하나의 집에 열쇠를 꽂아 둔 채 떠나고 집이 없는 소강이 그것을 챙겨서 빈집을 이용한다. 아정은 메이와 우연히 그 빈집에서 정사를 나누고 그 집 열쇠를 아정이 훔친다. 그렇게 그 세인물은 이상하게 그 집을 공유하기 시작한다. 재밌는 건 그 빈집이 이들 중심에 있다는 것이다.  


집이 없는 사람들 


   그렇다면 집은 무엇일까? 영화에서 메이는 자신이 관리하는 빈집 중 아무것도 팔지 못했고 죽은 자 들의 집을 파는 소강 또한 그렇다. 소강과 아정은 집이 없다. 둘은 항상 짐을 달고 다니며 떠돈다. 아무리 빈집이 많아도 그들은 그 집을 채울 수 없다. 

 

   이들은 도심 속에 철저히 외롭고 공허한 존재들로 그려진다. 대사는 거의 존재하지 않고 이들은 다른 인물들과의 교류가 없다.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과 이유를 알 수 없는 자살시도는 이들이 처한 상황을 보여준다. 아무리 섹스를 해도 그것은 성욕을 채울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영화에서는 먹고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욕구라고 불리는 것들이 즐비하다. 또 옷을 파는 아정의 모습을 보며 이 영화는 “의식주”에 관한 영화인가 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먹고, 입고, 주거하는 것은 모든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갖는 생활형태일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그것들이 이상하게 어그러져 있다. 혼자 밥을 먹거나 급하게 식사를 마치는 장면들이 많은데 나중에 아정과 소강이 둘이서 제대로 된 한 끼를 나누어 먹는 장면에서 오히려 괴리감이 느껴진다. 또한 집은 그들의 것이 아니며 안식처가 되지 않는다. 유일하게 메이는 집이 있는데 영화에서 그녀는 자신의 집보다 텅 빈 집들에 있는 시간이 더 많다. 그리고 정작 욕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그녀의 표정은 무기력하고 외로워 보인다. 그녀에게 집은 또 하나의 고독한 장소일 뿐이다. 그들은 그런 사회를 살아가는 외로운 현대인의 모습을 대변한다.  

 

   그런 점에서 영화 안에서의 집은 단순히 잠을 자고 머무는 공간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소강이 회사에서 집짓기 놀이에 끼지 못하고 구석에서 구경하는 모습은 이 의미를 곱씹게 한다. 영화에서는 3개의 빈집이 등장하는데 이 빈 집들은 공허한 세인물을 비유한다고도 생각한다. 그렇게 이 텅 빈 집들은 이 사회의 공허한 사람들이고 아무도 쉽게 들이지 못하는 마음의 집일 것이다. 집이 있어도 집을 가질 수 없는 이 사회는 텅 빈 집을 만든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의 삭막함은 공허한 사람들을 만든다.  


<애정만세>라는 제목의 고찰 

 

   “집이 이렇게 많은데 왜 내 집은 없을까?” 높은 옥상에서 서울시를 내려다보며 들었던 생각이다. 영화 ‘애정만세’는 현재 우리나라의 모습과도 많이 맞닿아 있다. 내 집이 없는 사람들의 모습과 고립된 도시민들의 모습이 그렇다. 이 영화가 20년도 더 된 영화이지만 아직도 우리에게 있어 유효하다는 것은 눈여겨볼 일이다. 영화가 현재의 삶을 예언한 것처럼 보이지만 어찌 보면 이는 그 당시와 변한 것이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젊은 세대라는 것은 고독한 도시민들의 삶이 당대에 유행하던 시대상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젊은이들은 활동적이고 생기 넘쳐야 한다는 통념과 대조를 이루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이 사회의 모순을 깊이 고민하게 한다.  

 

   이쯤에서 “애정만세”라는 제목을 돌아보자. 이 영화는 애정과는 거리가 멀다. 그나마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애정은 소강이 아정에게 갖는 마음뿐이다. 하지만 전반적인 영화의 내용은 무미건조한 관계와 고독에 내포되어 있다. 영화에서 메이의 대사는 고객을 대할 때나 전화를 통화할 때가 전부다. 그 마저도 일방적이거나 쓸데없는 내용뿐이다.  또한 전화 상대의 리액션 쇼트가 없거나 있어도 애매하게 배치해서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더 흥미로운 건 아정을 만나서 정사를 나누는 과정까지도 그 상대와 직접적인 대화가 없다. 그걸 본 우리는 그녀가 관계에 있어 얼마나 고립되어 있는지 짐작한다. 메이에게 있어 “애정만세”라는 제목은 어딘가 모순되게 다가온다.  

 

   소강과 메이의 구조는 뭔가 흥미롭다. 소강은 죽은 사람들의 집을 팔고 메이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집을 판다. 소강은 무기력하게 그려지고 영화 초반에 자살을 시도한다. 그것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영화를 보며 우리는 팍팍한 현실을 살아가는 소강의 외로움을 어림짐작해볼 뿐이다. 그 뒤 소강은 같은 처지에 집이 없는 아정을 만난다. 그리고 유일하게 영화에서 애정다운 애정을 표한다. 그는 아정에게 다정하게 음식을 건네고 그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선다. 그러다 결국엔 용기 내어 입을 맞춘다.  

   영화 초반부터 메이가 집을 팔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모습은 생계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으로 보인다. 하지만 영화 내에서 그 시도는 번번이 실패한다. 그리고 그 시도는 ‘빈집’을 채우려는 노력처럼 보인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그녀의 고독함을 마주한다. 살아가기 위해 아등바등 노력하는 그녀의 모습에선 애정을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소강과 달리 그녀는 아정에게 냉정하며 그녀에게 아정은 성욕을 채우기 위한 존재일 뿐이다.  


   무기력과 노력, 무정과 애정, 또 아정을 사이에 두고 메이와 소강은 대조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의 순환처럼도 보인다. 그런 점에서 메이의 삶이 소강의 전사(前事)이고 소강의 삶이 메이의 후사(後事)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내에서 메이와 소강은 만난 적이 없지만 이상하게 계속해서 둘이 교차 편집되는 연출의 논리도 이 관계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메이와 달리 소강에게만은 “애정만세”라는 제목은 반어가 아닐 것이다. 그 또한 메이처럼 좌절을 겪었을 것이다. 그에게도 누군가와 진정한 관계를 맺을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아정이 등장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정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한 집’에서 같이 사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는 그런 아정에게 애정이란 마음을 갖는다. 영화에서 둘의 마지막 쇼트는 둘의 키스신이다. 


   이는 영화 안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한다. 그 키스 뒤 마치 억눌린 것을 해소한 것 마냥 소강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다. 그러고 소강은 아정을 남겨두고 나가고 쇼트에는 아정만이 남는다.  


   감독은 그 둘이 함께하는 모습에서 쇼트를 끝내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그 집은 그들의 것이 아니며 언젠간 떠나야 할 것이라는 걸 암시하는 것 같다. 소강이 같은 ‘집’에 살게 된 아정을 사랑하게 된 것을 보았을 때 같이 살지 못한다는 것은 이별을 뜻한다. 그건 집을 구하기 힘든 그 사회의 모순을 드러낸다. 

 

   결국 메이의 좌절은 마지막 5분가량의 롱쇼트로 이어진다. 한창 개발 중인 공원에서 도시를 크게 팬닝 하는 모습은 도시화에 대한 비유 같다. 그리고 수많은 의자들이 있지만 딱 한 사람만이 앉아있는 공원의 모습은 그 적막함을 비춘다. 그곳에서 메이는 울음을 터뜨린다. 그 장면에서 우리는 이 사회의 고독감을 여실히 느낀다. 거기서 나는 감독이 그녀를 울게 내버려두고 떠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그녀의 울음이 진정될 때까지 오랫동안 지켜봐 준다. 그리고 이 시퀀스 직전의 소강과 아정의 마지막 쇼트를 떠올려보자. 또 소강과 메이의 삶이 교차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 영화는 “이 슬픔에서도 누군가 애정 할 날이 올 거예요. 그렇다면 그 슬픔도 멈추겠죠. 하지만 집을 다시 잃는다면 슬픔이 찾아오겠죠”라고 말하는 것 같다. 여기서 말하는 집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중의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마지막 메이를 위로하는 그 긴 롱쇼트는 염려하고 염원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마음에 누군가를 채울 날을 또 그 빈집들에 사람들이 채워질 날들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제목 “애정만세”는 이 영화에 가장 모순되는 제목이면서 가장 적절한 제목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