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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모임 로칸디나 Jun 16. 2018

로디즈가 만난 영화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

피사체에게 주도권을 쥐어주는 카메라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  표국청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 하라 가즈오, 1987

     

   한국어 제목이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이기 때문에 본 글에서 작품의 이름을 이야기할 때에도 이 제목을 사용할 예정이지만 영화를 보았을 때 번역하기 이전의 원제목인 <ゆきゆき 神軍>(유키 유키 신쿤)이 조금 더 영화와 어우러지는 어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부터 개인적 생각이지만, ‘유키’라는 단어는 똑같이 ‘가다’의 의미를 가진 ‘이쿠’와 미묘한 차이로서 목적지를 향해서 나아간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며 ‘신쿤’이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신의 군대라는 의미로 영화 내에 등장하는 이중적 의미의 신군을 뜻하기도 하고 동시에 ‘진군’이라는 단어의 일본어 발음과 같아 재미있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여담이 길어 죄송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이후 함께 영화를 본 사람들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보다 영화의 제목 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근에는 비교적 덜 하지만 이전 영화들에서는 제법 초월 번역(?)된 케이스를 많이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본 글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작품에 대한 글쓴이의 주관적 생각을 바탕으로 한 감상임을 밝힙니다.)

     

피사체에게 주도권을 쥐어주는 영리한 카메라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 표국청

     

   영화는 오쿠자키 겐조라는 인물을 따라간다. 오쿠자키 겐조는 자신의 중개로 이루어진 결혼식에서 자신과 결혼식을 막 올린 신랑의 전과를 읽으며 이 전과가 있었기에 성사된 결혼이라는 말과 함께 국가와 가정은 인간을 소외시키고 고립시킨다는 말을 하는 인물이다. 지금 막 식을 올린 부부와 많은 참관인들의 앞에서 말이다.

     

   초반에 카메라는 오쿠자키라는 인물을 설명하는데 꽤나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이것은 영화에 있어서 중요하다.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오쿠자키의 동선을 따라가기 때문에 관객으로 하여금 이 인물이 무슨 인물인지,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하여 오쿠자키는 어떤 동기를 가지고 있는지 천천히 관객을 설득해 나가는 것이다.

      

   고백하자면 필자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데 있어서 극영화보다 인물에 대한 동일시가 더딘 편이다. 극영화와 다르게 다큐멘터리의 인물은 보다 현실에 가깝게 존재하는 인물이기에 오히려 카메라에 담긴 피사체로서의 인물이 행동하는 것, 발언하는 것에 일말의 꾸밈(자의 혹은 타의의)이 있지는 않을까를 의심하게 된다.

     

   이때 판단의 기준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으로 작용하는 것은 인물을 대하는 카메라의 방식이다. 인물의 감정이나 주장에 동조하는 카메라가 있는가 하면 인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끔 도와주는 카메라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후자를 조금 더 선호하고 후자의 경우에 비교적 쉽게 인물에 대한 설득을 당하게 된다.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가 오쿠자키를 보여주는 카메라 또한 후자에 조금 더 가깝다. 영화의 시작부터 오쿠자키가 주장하는 이야기는 굉장히 급진적인 사상과 논리이지만 카메라는 그것에 동조하게끔 오쿠자키를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쿠자키를 담아내는 순간 그 주장에 대하여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것은 꾸며낸 카메라가 아니라 오쿠자키의 뻔뻔함이다.

     

영화를 장악하는 오쿠자키의 뻔뻔함은 영화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오쿠자키 겐조라는 인물과 카메라의 관계

     

   앞서 오쿠자키의 뻔뻔함이 영화를 이끌어 나가는 주된 동력이라고 말했고 사실 영화는 이 뻔뻔함에 기대어 만들어졌다. 천황을 향해 빠칭코 구슬을 발사하고 천황을 합성한 포르노 전단을 도쿄 도심에서 살포하는 행위가 오쿠자키라는 인물의 전사를 설명할 때 주로 등장한다. 오쿠자키는 자신의 논리로 이것은 정당한 행위라고 이야기한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오쿠자키가 2차 대전의 참전자라는 사실과 2차 대전 중, 정확히 표현하자면 대전 중과 종전 이후 일본군이 귀국하기 전까지 벌어졌던 사건들에 대한 진상을 파헤치고자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오쿠자키는 전쟁에 참여했던 당사자들을 찾아가 진상에 대해 묻고 진상에 대해 대답하지 않거나 진상을 숨기려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영화의 초반 오쿠자키는 천황이 전쟁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지만 그 책임을 회피한 인물이며 그런 천황을 중심으로, 사회의 법이나 권력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을 비판하지만 정작 자신이 폭력을 휘두른 이후에는 항상 그 법을 집행하는 경찰관을 직접 부른다는 점이다. 자신이 폭력을 휘둘러 상처 입은 사람의 앞에서 전화기를 들어 경찰관을 부르고 그 경찰관에게 지금 자신이 행한 폭력의 경위를 상세히 설명한다.

     

   흥미로운 지점은 그때마다 오쿠자키를 대하는 경찰관이나 폭력의 피해자가 가지는 태도이다. 마치 오쿠자키의 뻔뻔함에 질려버렸다는 듯 사람들은 오쿠자키에게 경고를 하거나 임의동행 정도로 사건을 무마한다. 물론, 카메라에 이 외의 장면이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그려진 것일 수 있으나 적어도 영화만 놓고 보자면 오쿠자키는 본인이 이야기하는 신의 법(오쿠자키는 스스로 사람들과 사회의 법을 따르지 않고 신의 법, 자연의 법으로 움직인다고 말한다.)을 통해 무한한 권한을 가진 절대적 응징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카메라는 그런 오쿠자키의 행동을 과장하기 위한 시도를 하거나 그의 주장에 대하여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주장, 신념에 따른 행동들을 보여준다. 오쿠자키의 뻔뻔함을 그려내는 이 카메라는 한 편으로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건가?’라는 인상까지 심어주지만 그것이 오히려 인물의 행위와 영화 내내 벌어지는 대화, 사건들에 힘을 실어준다.

     

   이렇게 말하기 뭐하지만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오쿠자키의 폭력은 영화를 보는 동안은 그렇게 무겁게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유쾌하다. 영화관을 나오며 ‘그런 장면을 다른 영화에서 유쾌하게 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지울 수 없었다.

     

   이는 카메라가 자신의 피사체에게 주도권을 쥐어준 모양새다. 오쿠자키는 영화의 몇몇 지점에서 마치 자신이 감독인 것처럼 카메라 혹은 그 뒤의 스태프에게 명령을 내리기도 한다. 물론 그 직후 “군대도 아닌데 명령조로 말해서 미안하네.”라고 사과해버리지만 말이다.

     

   아주 재미있게도 이쯤 되면 카메라를 통해 피사체를 보여주는 방식을 정한 하라 가즈오 감독이 영리한지 아니면 자신을 바라보는 카메라를 활용하는 오쿠자키가 영리한지에 대하여 혼란이 오기 시작한다. 지금으로서는 오쿠자키가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고 하라 가즈오가 그에 대한 가장 적합한 카메라를 찾아내었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오쿠자키의 폭력에 휘말려 아내마저 부상을 입지만 오쿠자키는 옳은 일을 위한 폭력을 앞으로도 행사 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진실과 죄 그리고 죄책감

     

   서사의 핵심은 앞서 언급한 오쿠자키의 2차 대전 중 벌어진 사건에 대한 진상 찾기이다. 벌어진 사건은 크게 두 개로 나눌 수 있다. 36 연대 소속 한 부대에서 벌어진 종전 이후 두 명의 병사가 총살당한 사건이 첫 째이고 같은 연대의 다른 부대에서 벌어진 제비뽑기를 통한 동료 살해 사건이 둘째다.

     

   영화는 첫 번째 사건을 선두에 두고 전개된다. 오쿠자키는 당시 희생당한 병사들의 유족과 함께 병사를 실제로 총살한 부사관들과 총살을 지휘한 중대장, 총살 현장에 있었던 위생병을 찾아가 인터뷰를 진행한다. 무언가를 숨기려는 듯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 마다 말이 다르고 이에 대해 오쿠자키와 유족들은 그들에게 ‘인육’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결과적으로 부사관들 중 일부가 생존을 위해 인육을 섭취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병사들을 먹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한다. 유족들은 가장 계급이 낮았던 병사부터 희생되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후 오쿠자키는 제비뽑기를 통해 동료를 살해하고 그 인육을 먹은 사건에 다가간다. 유일한 생존자인 전쟁 참가자를 찾아가 당시의 상황에 대해 묻는 오쿠자키. 이번에도 폭력을 휘두르고 생존자가 답변을 거부하고 경찰이 찾아오는 등 소동이 벌어지지만 결과적으로 생존자는 자신이 동료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고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을 하게 된다.

     

   길게 서사에 대한 부분을 짚었던 이유는 이 일련의 동선이 오쿠자키라는 인물이 보여주고자 했던 거대한 하나의 담론 형성에 기여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인육’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이질감이 드는 단어이다. 항상 먹는 입장에 서있는 인간이 먹히는 입장에 놓이는 순간에 벌어지는 이 기묘한 감각은 이내 감당하기 힘든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오쿠자키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질환이나 사고가 전부 천벌이라고 주장한다. 살아남은 자들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생존자들을 질책하는 오쿠자키는 분명 강렬한 죄책감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과 살아남은 이후 본인의 삶을 지탱해 나가는 모든 행위가 죄로 다가오는 것. 그것이 오쿠자키를 움직이게 하는 두려움일 것이다.

     

   결국 오쿠자키는 본인의 사명을 전쟁에 대한 진실을 널리 알리는 것과 책임을 다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폭력을 이용한 경각심 일깨우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는 얼핏 자발적으로 보이지만 자발적이라고만 정의하기에는 무시할 수 없는 죄책감에 의한 행동이라고도 보인다.

     

   죄를 지은 뒤 느끼는 책임감이 오쿠자키의 안에 천황이라는 인물을 대체하는 신으로 자리 잡은 것이라고도 생각된다. 오쿠자키는 종전 후 자신에게 벌어진 일련의 사건(오쿠자키는 살인을 저질렀다.)들이 자신이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로서 책임을 다하지 않았기에 벌어진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고 이는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에 대해 모든 것을 인정하고 철저히 전쟁의 책임자들을 공격하고 전쟁의 참상을 알림으로써 자신의 죄를 씻어내고 또 씻어내려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오쿠자키는 지극히 자기 확신에 가득 찬 인물로 묘사된다. 죄로 인해 무겁게 짓눌린 자가 아닌 자신의 모든 죄를 인정하고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계몽시킴는 일종의 선구자. 본인이 표현하기로는 “너희들과 다른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매김한 것이다.

     

   이것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에 대한 판단은 관객에게 온전히 맡겨지지만 이런 오쿠자키가 자신을 짓누르는 무거운 죄를 드러내는 장면은 자신과 동기인 병사의 유족이자 홀로 사는 노모를 찾아가는 장면이다. 노모를 만나 동기인 병사를 자신의 손으로 매장한 사실을 밝히는 오쿠자키는 눈물을 감추지 못한다. 노모가 아들의 묘소에서 부르는 노래가 영화의 후반부에도 등장하는데 오쿠자키를 짓누르는 죄의 형상을 목격하는 느낌으로 마음 아프게 다가온다.

     

   영화의 결말은 최초의 의도와는 다르게 매듭지어지지만 카메라는 오쿠자키라는 인물이 가지고 있는 죄책감을 우리 마음속에 고스란히 전달하는 것에 성공한다.

오쿠자키라는 인물이 안고 있는 죄책감의 무거움은 영화가 끝나고 관객을 강하게 짓누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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