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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모임 로칸디나 Jun 13. 2018

로디즈가 만난 영화 <버닝> 4

기다린 시간 만큼 아쉬움이 남는 <버닝> 황다빈

<버닝>, 이창동, 2018


(본 글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작품에 대한 글쓴이의 주관적 생각을 바탕으로 한 감상임을 밝힙니다.)
 

기다린 시간 만큼 아쉬움이 남는 <버닝>


   우리의 모던마스터 (션 베이커 감독이 인터뷰에서 이창동을 가리켜 한말) 이창동 감독의 신작이 나왔다. 충무로 3대 거짓말 중 하나로 “이창동 감독이 시나리오를 완성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이 작품이 등장하기 까지 8년이라는 긴 공백이 있었다. 그 만큼 기대가 컸으며 좋은 작품이 나왔다. 하지만 왜 이렇게 아쉬운 걸까?


1.     火 불을 품고있는 사람들

    

      이 영화 속 여기저기에는 저마다의 화가 존재한다. 종수의 집에서 들리는 대남 방송이 그렇고 뉴스에서 연설하는 트럼프의 모습이 그렇다. 그 화는 실제 등장인물들에게 서도 나타난다. 시골사람들은 처음 보는 이에게 극심한 경계와 냉대를 보이며 종수의 아버지는 자신의 화를 다스리기 힘든 존재로 묘사된다. 인력을 뽑을 때 사람들을 대하는 고용자의 태도 또한 그렇다. 이 장면들은 이 사회에 만연해 있는 알 수 없는 분노를 그린다.


      그것은 벤, 해미, 종수에게도 존재한다. 벤은 경제적으로 굉장히 부유하고 이 사회에서 소위 말하는 재벌이다. 그는 굉장히 여유롭고 차분한 존재로 묘사되지만 실상 그는 습관적으로 ‘비닐하우스’를 태워야하는 존재이다. 이 화의 근원은 알 수 없지만 뼛 속 깊은 곳에 내재된 이 불은 그렇게 텅 빈 존재(타자)에게 향한다. 그것은 이기적이게 보인다.


     반면 해미는 자기자신이 소멸하기 원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붉게 타들다 사라지는 노을에 자신을 동일시한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그녀가 살아가는 것이 팍팍하고 가난하다는 것을 짐작한다. 그런 그녀의 삶속에서 그녀의 화는 그녀 자신의 소멸욕구를 부추긴다. 그렇지만 마냥 그녀를 자기파괴충동을 지닌 인물로만 보기 어려운건 그녀가 삶의 의미를 찾는 것에 집착하는 부분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름답게 타들어가는 노을 앞에서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추는 그녀의 모습은 타들어가는 자신의 삶 앞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몸부림(행동)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종수는 초반엔 무던한 인물처럼 그려진다. 청년실업에 관한 뉴스가 나올 때도 무심하게 밥을 먹는 반응을 보이고 해미를 처음 만났을 때도 수동적으로 따르기만 한다. 그 후에 그와 대척점에 있는 벤을 만나며 그 무던함이 흔들린다. 그 때 우리는 그것이 무던함이 아닌 무기력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무기력함 뒤에 감춰 있던 그의 화는 꿈속에서 비닐하우스가 불타는 모습을 본 뒤부터 겉잡을 수 없이 커진다. 그는 그 불을 실제로 발견하려고 찾아다니지만 헛수고다. 그의 노력은 실재하는 불을 마주하면 그 화의 근원을 알 수 있을 거라는 집착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건 마치 안개속에서 찾아헤매는 모습과 같다.  결국 그의 집착은 추상적인 불이 아닌 실제로 불을 지르며 끝이 난다. 과연 그는 불을 마주하고 그 답을 찾았을까?  



2.     존재하지 않음을 잊는다는 것.


     영화는 시종일관 보이지 않는 것을 찾는다. 그 보이지 않는 것은 영화 곳곳에 존재한다. 처음엔 고양이로 시작해서 비닐하우스, 그리고 해미 마지막엔 분노의 대상을 찾는다. 하지만 그것들은 찾기 시작할 때 실체가 없다. 하지만 그 존재를 찾는 종수의 행동은 그것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한다. 그 존재를 찾기 힘들수록 그는 그것이 애초에 존재하긴 했는지 의문을 갖는다. 그런 그에게 이제 존재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이제 존재하지 않음을 잊는다. 그 때부터 영화의 장르는 스릴러로 변한다. 결국 존재하지 않음을 잊는 형식은 이 사회가 갖는 분노의 원인불명을 표현하고자 한다.  


     이 세인물에게서 확연히 구별되는 부분은 계급의 차이다. 과거보다 오히려 공평한 사회를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결국 출발선이 굳어진 계급차를 보여준다. 그것이 질투에서 시작되었을지 모르지만 종수는 어떤 문제를 깨닫는다. 그리고 열심히 그 문제의 원인을 찾지만 그 것은 찾으면 찾을수록 더욱 모를 뿐이다. 마치 원래 그것이 존재한 것은 맞는지 의문을 갖거나 얼룩진 비닐하우스의 비닐처럼 무언가 보일 듯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혹여나 그 불을 보게 되면 무언가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듯이 강박적으로 벤이 없앨 비닐하우스를 찾지만 그 불은 나타나지 않는다. 어느 순간 그 비닐하우스는 해미가 되었고 모든 것들이 종수의 의심을 뒷받침하기 위해 존재한다. 종수는 그것을 운명처럼 흡수하고 자신의 불을 마주하기 위해 분노를 키워간다. 그 때가 되면 해미의 죽음은 이제 더 이상 종수에게 중요한 것이 아닌 벤이 상징하는 계급의 분노로 변모한다.   

 

     그 과정은 일정부분 오해할 위험성을 가진다. 영화는 종수가 벤을 죽이게 되는 과정까지 벤이 여자들을 죽였다는 실제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실제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장면에 존재하는 증거들은 사실 종수의 추측에 기반한다. 거기엔 종수의 괴상한 집착이 느껴진다. 그런 이상한 줄타기는 영화가 벤이 살인마일지도 모른 다는 사실을 종수의 분노를 합리화하기 위해 작동한다고 인정하는 것 같다. 마치 존재하지 않음을 잊어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벤이 종수에 의한 피해자처럼 그려지게도 만든다. 그건 의도일까 오해일까?


  

3.     마지막 장면

 

      마지막 장면에 대해서는 사람들 저마다의 의견이 다양할 것 같다. 적어도 나는 정말 아쉬웠다. 마지막이 종수의 소설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종수는 결국 벤을 죽이고 불을 지른다. 그리고 차를 타고 떠나는 장면에서 트럭 앞유리에는 뒤에 타고 있는 불의 형상이 비친다. 종수가 그 불에서 멀어져 갈수록 유리에 비치는 붉은 불빛이 사그라 든다. 그 모습은 종수의 마음속 분노가 사그라드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서 나는 영화가 “너가 분노라고 생각(추측)한 대상을 죽이고 태워버렸지만 과연 그게 옳을까?”라는 질문까지 나아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영화 스스로 키운 불이었다. 그리고 그 불을 쥐었다 너무 뜨거워 관객에게 떠넘겼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무책임하다. 영화는 분노의 원인을 모른다고 선언하면서 종수가 그 분노의 칼날을 꺼낼 수 밖에 없게 만든다. 왜 종수는 그 분노의 끝을 살인과 폭력으로 끝내야 했을까? 정말 다른 선택은 없었을까?? 누군가는 영화의 구조에 의해 종수가 누군가를 죽이면서 끝날 수 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그 구조를 만든 것 또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 동안의 작품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이창동 감독님이 폭력이나 분노가 이 사회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고 마지막 장면을 쓰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종수의 폭력이 답이라고 제시하는 것이 아닌 더 나아가 그것이 과연 옳을까 라는 질문까지 나아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폭력의 책임을 종수의 소설속이라는 장치로 도피한다. 그 글을 쓰는 곳이 해미의 방이라는 것도 흥미롭다. 해미의 방에서는 남산타워가 보인다. 계속해서 그 장면을 보여주며 그 장소가 서울이라는 것을 일깨운다. 그리고 영화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를 계속해서 상기 시킨다. 종수가 해미의 방에서 글을 쓸 때 카메라가 창문을 통해 빠져 나와 패닝하며 서울 도시를 바라본다. 남산타워의 시선처럼 느껴지는 그 장면은 자연스레 이 사회로 뻗어나간다. 그런 시도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런 시도를 했다는 것이 더더욱 마지막 장면의 무책임함을 곱씹게 한다.


 

     여기서 나는 벤이 상징하는 어떤 특정 계층을 옹호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것과 별개로 불을 지필 대상을 고른 것도 불을 지른 것도 영화 본인이면서 그것이 젊은 세대의 생각인 것 마냥 그린다. 그리고 종국에는 영화조차 분노의 대상을 모르겠고 그에 대한 옳고 그름을 관객에게 따져 묻는 태도에 화가 날 뿐이다. 나는 결국 종수는 그 불을 마주하고 아무런 답도 찾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종수라는 한 인물을 나락으로 몰아세우면서까지 얻은 대답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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