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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모임 로칸디나 Jun 12. 2018

로디즈가 만난 영화 <버닝>3

난 <버닝>을 지지 할 수 없다., 정재욱

<버닝>, 이창동, 2018


(본 글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작품에 대한 글쓴이의 주관적 생각을 바탕으로 한 감상임을 밝힙니다.)
 

난 <버닝>을 지지 할 수 없다. , 정재욱


    <버닝>의 개봉관들이 이제 거의 사라지며 <버닝>에 대한 1차적인 평가의 파도는 끝이 난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사정들 때문에 어울리지 않게(?), 조금은 뒤 늦게 <버닝>을 관람 하였고, 이제는 조금 뒤늦은 나의 감상을 글로 적어보고자 한다.  


     <버닝>과 같은 논쟁적인(최소한 내가 속한 집단들에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오가고 있다.) 작품을 보고 나면 조금 늦게 본 것이 후회된다. 이미 알게 모르게 그 영화에 대한 여러 정보들이 내 머릿속에 들어와 있기에 내가 조금은 편향된 관점으로, 혹은 이미 판단하는 자세로 영화를 본 것은 아닐까 고민하게 된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나면 더 필사적으로 여러 사람의 글을 찾아보고 읽어본다. 그렇게 다양한 글들을 읽다보면 나 스스로 어느 정도 나의 생각이 정리가 되기도 하고, 내가 편향된 시각으로 이 영화를 보고 있지는 않았나 하고 판단도 서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의 분노를 담고싶었다." 과연?
 

    결론적으로는 필자는 편향적인 시선으로 <버닝>을 바라 본 것이 맞다. 이 영화가 가지는 어떤 형식적은 아름다움 혹은 대단함은 영화를 보는 내내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아마 다시 보더라도 난 좀 편향적인 시선으로 이 영화를 볼 것 같다. 필자는 90년대 초반생이고, <버닝> 속 종수와 아마 같은 세대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사람으로서 난 <버닝>을 지지 하지 않는다. 제아무리 형식적으로 훌륭한 영화일지라도 <버닝>이 바라보는 젊은 세대에 대한 시선은 불편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버닝>의 순수 영화적 가치에 대해서 조명 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이미 많은 평론가들과 작가들이 했다. 그리고 그런 지점들에 대해서는 상당 수 동의하기도 한다. 필자가 이 글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소위 “젊은이들의 분노 담았다”고 하는 이 영화에서 어떻게 젊은이들이 삭제되었고, 소비되어 산화 되었는가에 관한 것이다.


     <버닝> 속 캐릭터들은 놀라우리만큼 도구적으로 그리고 기능적으로 소비된다. 종수의 분노가 누군가의 죽음으로 이어질 것은 당연한 것이고(영화의 시작 초부터 우리는 분노조절 장애 아버지가 물려준 나이프 세트를 종수의 POV로 바라본다.), 해미의 역할은 종수의 분노가 벤에게로 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영화 속에서 가장 큰 역할이다. 즉 이 서사 속의 모든 일들은 지극히 필연적이다. 그러니까 어떤 결론이 이미 내려져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그 결론이 중요하기 보다는 그 결론으로 향하는 원인을 탐색하는 것이 중요한 영화가 되었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버닝>은 그 원인 또한 결론 지어버린다: ‘수수께끼’. 그래서인지 종수라고 하는 캐릭터의 소위 이야기하는 분노는 이창동 감독이 그렇게 강조하는 ‘진짜’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분노는 한국사회를 살며 내면화 되어있는 젊은 사람의 것 이라기 보다는, 그 젊은 세대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으로부터 인위적으로, 그가 생각하는 젊은세대의 모습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가짜처럼 느껴지고, 캐릭터의 존재 자체가 대상화처럼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종수는 한국 사회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지만,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그런 인물처럼도 필자는 보여진다. 그의 행동들은 모두 어디에선가 한국 사회의 젊은 남성들이 행할법한 것들이지만, 그가 가지는 의문들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버닝> 속에서는 불만과 분노만이 존재를 한다. 조금은 비평스럽게 이야기를 한다면, 비어있는 기표들만이 존재 할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버닝> 속 유아인의 연기는 연기적은 측면으로만 보았을 때 분명 탁월하다. 하지만 그 연기의 해석이 올바른가에 대해서는 필자는 또 동의 할 수가 없다. 유아인이 연기하는 종수는 어떤 장애가 있는 인물처럼 재현된다. 그는 전화를 받을 때마다 세상에서 가장 어눌하고 불쌍한 목소리로 받고, 가만히 있을 땐, 정자세로 있기 보다는 베베 꼬인 손과 다리로 안절부절하지 못함을 증명한다. 이것은 연상엽의 연기와는 확연하게 대비되는 점이다. 마치 자본적 계급 차이 때문에 한 쪽은 선천적 장애를 앉고 사는 것만 같다. 그렇다, 그는 이 사회에서 버림받았다고 믿고 있는 패배감과 무력감에 젖어 있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다고 믿는 소위 찌질한 한국 남성의 거울이다. 관객은 이런 종수가 분노의 원인을 찾는 것인지, 혹은 분노를 풀 곳을 찾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보는 내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도 같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어떤 신체의 장애가 있는 것 마냥 재현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인가를 떠나서 윤리적으로 맞는 해석인지는 우리는 고민을 해봐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런 캐릭터를 만들어 낸 <버닝>이 생각하는 젊은 세대는 어떤 사람들인가 또한 고민 해 봐야한다. 개인적으로는 <버닝>에는 종수에 대한 이해는 오간데 없고, 동정심만이 존재를 한다.


     위에서 계속 언급했듯이 <버닝>은 젊은 세대의 분노에 대한 답 혹은 원인을 수수께끼로 설정해 놓고 어떤 필연적 결말로 치닫는 영화다. 그렇다 하여, 이런 분노의 원인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영화라고 단정짓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 고민들이 영화 곳곳에 사실 존재한다. 그리고 그 고민들의 중심에는 ‘자본의 부재’라는 모호한 답이 존재한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역시 벤이라고 하는 존재이다. <버닝>이 어렵다고 하시는 분들은 다시 한 번 이 영화의 줄거리를 생각해 보시기를 바란다. 여러 메타포들을 통해 어렵게 보이는 영화일 뿐이고, 여러 레이어가 있는 듯한 이 영화는 생각하면 할수록 그 레이어들은 마치 안개처럼 들여다보면 들여다 볼수록 비어있기만 하다. 결국 <버닝>이 향하는 지점은 자본적 계급차이로 인해 나타난 젊은 세대의 억울함이다. 해미도 벤을 동경하고, 종수도 벤을 동경한다. 벤이 살인마인가 아닌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는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그 많은 개츠비 중 한 명이라는 것이며, 종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종수는 그것을 알기에 해미를 붙잡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는 다 죽어가는 트럭을 몰고, 벤은 페라리를 몰기 때문에. 이런 이유에서 종수의 칼 끝이 다른 사람이 아닌 벤에게로 향하는 것이 설득이 된다. 결국 이 분노는 대한민국의 개츠비들을 향한 것이며, 그들 때문인 것 마냥 영화는 종결된다. 이런 답을 안고 가는 영화이기에, 영화 속에서 벤이 그나마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그는 ‘진짜’ 영앤리치(Young & Rich)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이것이 어디 우리나라 젊은세대에만 존재하는 분노이던가?


     그리고 이제 우리는 해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한다. 필자가 생각하기엔 <버닝>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속에서는 가장 기능적으로 소비되어버린 인물. 영화 속 해미의 역할은 단순하다. 종수에게 질투심을 유발시킬 수 있는 장치로서 벤과 종수를 연결하는 인물이다. 정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로서만 존재를 한다. 그래서 이 영화의 고민들은 더욱 가짜처럼 느껴진다. 왜냐면 해미는 <버닝> 속에서 젊은 세대의 온상을 가장 잘 표현한 인물이라고 생각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해미의 젊은 세대로서의 대표성을 이야기 하기 전에, 여성으로 재현되는 해미에 대해서 꼭 짚고 넘어가야한다. 필자는 해미의 첫 등장부터가 불편하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첫 쇼트부터 말이다. 종수를 트래킹하며 마치 종수의 욕망을 따라가는 이 영화의 카메라의 첫 쇼트의 종착지는 해미다. 그리고 해미는 넌지시 종수에게 상품 응모권을 주고, 다음 쇼트에서는 둘은 담배를 피며 그 날 저녁 술을 먹으러간다. 이미 처음부터 해미라고 하는 여성은 이 영화로부터 대상화되어지고, 신비화 되어있다. 그리고 이후에 해미는 한껏 더 신비화가 되어진다. 종수가 그녀에게 끌리는 이유는 같은 젊은 세대로서의 동질감이라고 절대 할 수 없다. 그것은 술을 먹고 쓰러진 해미를 바라보는 쇼트에서 이미 증명이 된다. 쓰러진 해미를 보고, 옆 자리에서 진한 애정행각을 하는 젊은 커플을 바라보는 종수는 그저 그녀와 섹스가 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종수의 욕망의 상상력을 실현이라도 시켜주듯 둘은 곧바로 다음 날, 아무런 전조 없이 해미는 종수를 유혹하고 둘은 섹스를 한다. 애초에 처음부터 이 영화는 해미가 어떤 사람인지 관심조차 주지 않는다. 그저 종수의 욕망의 트리거(trigger)로서 도구화되고 이용되어지다가, 말 그대로 사라진다. 이런 와중에도 전종서의 연기는 놀랍다. 영화가 안 알아주니 마치 애원이라도 하듯 자신을 알아주길 바라는 방식으로 그녀는 연기를 하는 것만 같다. 아무도 물어봐주지 않으니,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버닝>의 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는다. 이것은 냉혹하고, 잔인한 것이 아닌 그냥 무관심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전종서의 모습은 정말 지금의 젊은 세대를 대변해주는 듯하다. 이 사회 속에서 발부둥치면서 아등바등 살아가지만,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그래서 스스로 존재를 확인 하지 못해 사라지고 싶은 그런 모습 말이다.


     해미와 종수는 영화 속에서 같은 세대 사람으로서 그려지지만 사실 공통점이라고는 영앤리치 해지고 싶다, 즉 벤처럼 되고 싶다 말고는 없다. 해미는 <버닝>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일을 하는 사람이며(종수가 하는 것은 일을 한다는 표현을 쓰고 싶지 않다. 그는 작가 지망생이지만 우리는 일련의 사건들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그리고 해미가 도구화되어 산화되기전까지 단 한번도 그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386세대가 이야기는 소위 노오력을 하지 않는 젊은세대의 모습 일 뿐이다.), 유일하게 어떤 꿈을 가진 사람이며, 유일하게 ‘진실’을 아는 사람이다. 진실은 영앤리치 해질 수 없다는 것이고, 그럴 수 없다면 그것을 조금이라도 따라하고 싶은 욕망일 것이다. 빚도 있는 처지에 아프리카를 가기 위해 돈을 벌고 떠나는게 어디 이성적인 생각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고 싶다. 그런 삶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억울하고, 당신들이 말하는 노오력을 해서 그런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그래서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 삶이라도 살아보는 것이다. 당신들 눈에는 그런 삶이 창녀처럼 보일지 몰라도 말이다. 이런 해미의 처지는 정말 우리 젊은 세대를 닮아 있다. 하지만 계속 이야기 하듯 이런 해미는 영화 속에서 대상화되어지고, 도구화되어 산화되어 사라진다. 마치 현실의 젊은 세대처럼 말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버닝>이 젊은세대를 잘 표현 한 것만 같다는 착각이 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종수가 글을 쓰기 시작하는 시점을 생각하면 이것은 얻어걸린 것만 같다. 그러니까 ‘착각’같다. 결국 해미라고하는 인물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전시하고 타자화하면서 종수의 글의 밑거름이 된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해미의 동료와의 대화는 마치 이런 지점에 대한 변명처럼도 느껴진다.  


     결국 <버닝>은 사실 수수께기가 아니다. 영화는 모른 척을 할 뿐, 모든 답은 이미 정해져 있고, 사실 이미 영화 스스로 결론도 지어져 있다. 이 영화가 작동하는 방식은 마치 실제 현실에서 젊은 세대들이 착취당하고 고통받는 모습과도 닮아있다. 그 젊은세대에게 무관심하고, 스스로 젊은 세대를 안다고 자기만적으로 판단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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