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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모임 로칸디나 Jun 11. 2018

로디즈가 만난 영화 <유전>

엄습하는 두려움을 마주치는 <유전>, 표국청

<유전>, 아리 에스터, 2017


   본 글과는 전혀 상관없지만 영화를 보기 전 <유전>이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필자는 질병과 기름이라는 두 가지 이미지를 연상했다. 서로 어우러지지 않는 두 단어를 떠올리며 헛웃음 짓기는 했지만 영화를 모두 본 이후 영화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렸을 때 질병이 가지는 이미지와 기름이 가지는 이미지는 어쩌면 비슷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제는 신뢰할만한 배급사가 된 A24의 공포영화라는 것만으로 영화를 보겠다는 결심을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영화를 본 후 A24의 다음 영화가 더더욱 기다려진다. 


(본 글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작품에 대한 글쓴이의 주관적 생각을 바탕으로 한 감상임을 밝힙니다.)


엄습하는 두려움에 대한 극단적 자기방어 <유전>, 표국청  

   

   영화는 그레이엄 가문의 어른인 엘렌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기사로 시작된다. 검은 화면에 띄워져 있는 하얀 문장들이 제법 긴 시간 지속되는데 아무리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더라도 이 첫 샷과 영화의 제목만으로도 우리는 이 영화가 누군가의 사후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다. 

    

   누군가의 죽음은 모순적이게도 누군가의 존재를 다시금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영화는 시작부터 누군가의 존재를 우리에게 강하게 각인시킨다. 영화 내내 그 등장이 불분명한 하지만 누구보다도 강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엘렌이 바로 우리의 뇌리에 새겨지는 순간이다.

     

유전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유전되는 것은 많다. 외형적 생김새, 성격, 말투나 버릇부터 가족력으로 내려오는 질병이나 가족만의 문화, 어떠한 가치관 등도 큰 범위로 보자면 유전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유전’이라는 현상의 특성들을 이용하여 관객을 무려 127분간 쥐락펴락하는데 여기서 특별히 관심을 두고 싶은 부분은 서사 안에 녹아든 ‘유전’이라는 현상의 특성을 보여주는 영화의 표현방식이 ‘유전’이 가지는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유전’이 가지는 가장 큰 특성을 두 가지로 분류하여 글을 쓰고자 한다. 비정기적 발현이 첫 번째이고 발현 이후 불가피하다는 점이 두 번째이다. 가족의 해체가 일어나는 시기에 유전의 불가피성을 논하는 것은 이상할 수 있지만 적어도 우리는 가족 중 누군가 어떠한 질병을 앓고 있거나 부정적 요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 그와 가장 가까이 있는 ‘나’에게 그것이 발현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

      

   때때로 이것은 너무 빠르게 발현될 수도 있고 느지막이 발현될 수도 있다. 또는 발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발현이 일어나는 시점을 알 수 없다는 것과 그 발현의 시기가 다가오기 전까지 잠재적인 두려움이 우리를 지배한다는 점이다.

     

   영화는 이 발현이 가까워졌다는 두려움에서 출발한다. 앞서 말했듯 영화는 엘렌 그레이엄의 죽음(장례식)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장례식 이후 주인공 애니 그레이엄이 자신의 어머니인 엘렌의 존재를 다시금 확인하면서 무언가 두려운 것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엘렌의 유언장에서 볼 수 있는 ‘희생’이라는 것이 또한 이 두려움을 부르는 다른 이름일 것이다. 애니는 어머니가 남긴 희생의 완성이라는 사명에서 영화 내내 달아나고 싶어 한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애니가 피터에게 가지는 미묘한 반감을 느낄 수 있다. 어쩌면 이는 자신의 가족 (그 이상의 조상들이 겪었을지도 모를)이 겪었던 비극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극단적인 자기방어일지도 모른다. 

    

   영화의 전반에 걸쳐서 등장하는 피터에 대한 애니의 반감과 과거 피터를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임신 중 유산 시도와 몽유병으로 인한 방화미수 사건 등)은 표면적으로는 가족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장치로 등장하지만 조금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가족을 비극에서 구해내려는 애니의 극단적 노력임과 동시에 가족을 비극으로 빠뜨리는 늪으로서 기능한다는 것이다.

     

   영화의 끝에서 몇몇 관객들은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라는 감상을 느낄 수도 있겠다. 실제로 필자가 영화관에서 나올 때 몇몇 관객은 ‘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에 대한 토론과 함께 격한 짜증을 나타내고 있었다.

     

   하지만 ‘유전’의 특성에서 바라보자면 <유전>의 결말은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비극의 두려움에 떨던 인물들이 불가피한 비극을 받아들이는 지극히 타당한 결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보다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순간들.

     

   서사가 전개되어가는 중 영화는 영리하게도 관객들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게끔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관객들이 납득할 만한 정보를 제시함으로써 질문을 던지지 않게끔 하는 것이 아닌 관객들이 피부로 느끼는 감각이 현상에 대한 질문을 감추는데 주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꼽을 수 있는 찰리의 죽음으로 되돌아가 보자. 찰리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 원인은 찰리가 차창 밖으로 머리를 내민 순간 전신주에 머리를 부딪혔기 때문이고 찰리가 머리를 내민 이유는 땅콩 알레르기로 인한 숨 막힘 때문이었다.

      

   그 이전에 땅콩이 든 초콜릿 케이크를 먹은 것이 문제였고 그것을 먹게끔 만든 피터의 부주의가 문제였으나 결국 가장 원점으로 돌아가자면 찰리를 피터와 함께 파티에 가게 만든 애니의 잘못이라고 볼 수도 있다. 영화의 후반부에서도 언급되는 이 인과관계의 연결고리는 애니와 피터의 갈등을 심화시키기도 하고 동시에 두 사람의 죄책감을 강화하는 장치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때때로 사람들은 인과관계라는 것을 맹신하게 된다. 예를 들어 살인마의 이웃들을 인터뷰했을 때 살인마가 어린 시절 벌레를 죽이는 것을 보았다는 대답이 나오게 되면 사람들은 어린 시절 벌레를 죽이는 비뚤어지는 심성이 어른이 된 이후 살인을 저지르게 만든 원인이라고 생각하게끔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간의 선형성에서 비롯하여 어떠한 현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구조적 관점이 가질 수 있는 맹점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 찰리의 죽음에 있어서 우리는 ‘왜 하필 그 날?’이라는 질문은 하지 않게 된다. 찰리의 죽음에 앞서 나열되는 죽음과 연관된 이미지의 나열은 단지 죽음으로 다가가기 위한 장치였을 뿐 필연적 이유는 무엇 하나 없었음에도 우리는 영화 전반에 걸친 두려움에 대한 감각 때문에 이 죽음을 너무나 당연한, ‘그렇게 될 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영화 내내 보이는 이러한 ‘그렇게 될 일’(조안과의 만남부터 엘렌의 무덤이 도굴된 일 등)은 사실은 우리가 질문을 던져 그 원인을 밝혀야 할 일이지만 그 원인은 애초에 영화 내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다뤄지고 이는 곧 ‘유전’의 특성 중 하나인 불가피함을 드러내는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관객이 스스럼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유전>이라는 공포영화가 잘 만들어진 공포영화이기에 그렇다. 여기서 잘 만들어진 공포영화라고 말하고 싶은 지점은 영화가 가진 주제의식이나 서사에 앞서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관객으로 하여금 두려움에 잠식되어가는 감각을 느끼게 한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지루하다고 느낄 수 있을 초반부터 영화는 이 잠식되어가는 이미지를 훌륭하게 보여주는데 엘렌의 부고기사 이후 이어지는 찰리의 나무집에서부터 애니의 작업실을 거쳐 애니가 만든 미니어처 모형의 피터의 방으로 들어가는 부분까지의 매끄러운 연결은 영화의 끝에서 드러나는 파이몬이라는 존재, 그 이전에 엘렌이라는 존재가 한 집안을 잠식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인 것처럼 느껴진다.

     

   또한 가족들을 뒤덮은 죄책감을 보여주는 방식에 있어서도 찰리가 내는 독특한 소리를 지속적으로 이용한다던지 거친 숨소리나 꿈을 보여주는 카메라 워킹과 편집 방식은 만족할만한 완성도를 보여준다. 이런 가운데 영화를 이끌어가는 내용에 있어서 ‘왜?’는 사라지고 단지 결과로써 ‘그렇게 되었다.’가 남게 된다.

     

   결국 엘렌과 그녀의 동료인 조안의 계획대로 피터는 파이몬 왕의 몸이 된다. 그 와중에 애니는 피터를 파이몬에게 인도하는 역할을 모두 마치고 스스로의 목을 자른다. 그렇게 될 일이었던 것이다.

     

영화에서 계속해서 등장하는 '불'은 파이몬의 상징이기도 하다.


두려움에 떠는 사람은 누구인가? 

    

   언젠가 다시 밝힐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미리 고백하자면 필자는 스스로가 공포영화를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편이다. 공포영화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포영화가 다루고 있는 대상이 누구인가인데, 필자는 이 부분에서 공포영화는 항상 타자를 이야기하는 영화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집단 안에서 보편적이지 못 하거나 기득권을 가지지 못하는 존재인 이 타자는 결국 사회적 약자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공포영화에 대해 우리가 질리도록 들었던 ‘원한을 가진 자의 귀환’이라는 정의는 사실 우리 스스로가 사회에서 배제하고 있던 사람들이 우리에게 돌아왔을 때 우리는 그들에 대한 일종의 죄책감 내지 그들에게 보복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공포를 느끼고 공포영화는 성립될 수 있다.

     

   그렇다면 <유전>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명백하게 그레이엄 가문의 사람들이다. 조금 더 범위를 좁혀보자면 애니와 피터이다. 두 사람은 가족이라는 조직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불편함을 만드는 원인은 자신의 윗세대이다. 애니는 어머니인 엘렌으로부터, 피터는 애니로부터 가족에 대한 불편함을 느낀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어떤 의식을 물려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 이는 단순히 한 가족의 사적인 이야기에서 영화가 사회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세대와 세대 사이에 물려주는 것은 결코 긍정적인 것뿐만은 아니다. 또한 그것이 피할 수 없는 두려움을 가장한 강제적인 계승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영화 중간에 조안은 피터를 바라보며 “너를 추방하겠다.”라는 말을 한다. 파이몬의 그릇으로 쓰이기 위하여 피터의 인격 자체를 소멸시키겠다는 뜻으로 읽히는 이 말은 작금의 사회가 새로운 세대를 다루는 방식으로 읽히기도 한다. 이미 굳어진 어떠한 가치를 지키기 위하여 새로운 세대를 너무 쉽게 다루는 행태.

     

   엘렌은 애니에게 보내는 편지에 ‘희생은 보답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을 한다. 어디선가 많이 들었던 말이 아닌가? 영화관을 빠져나왔을 때 사회는 우리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를 돌이켜 보게 된 것은 우연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족이야기로 녹여낸 사회의 모습. 우리 사회는 생각보다 훨씬 더 공포스러운 곳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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