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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모임 로칸디나 Dec 24. 2018

로디즈가 만난 영화 <밤치기> 2

엉성하게 풀려있는 시간의 매듭을 통한 영화적 도발 <밤치기>, 표국청

   밤치기, 2018, 정가영


   포스터에 적혀있는 문구와 한참 먼저 영화를 봤던 지인들의 감상평, 관련된 기사에서 사용된 언어들은 필자로 하여금 정가영 감독의 영화 <밤치기>를 여자판 홍상수 영화, 도발적인 여성영화로 인식하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오늘 (12월 23일) 드디어 소문의 그 <밤치기>를 보았다.

     

   사실은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관객심사단을 하고 있던 기간에 인근의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밤치기>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있었으나 같은 시간에 이루어진 비경쟁 섹션의 영화들을 보느라 <밤치기>를 다음으로 미루었던 기억이 있다. 이미 본 사람들의 평가도 좋았고 사람들의 기대감도 높았던 터라 은연중에 ‘언젠가 보겠지.’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다행히도 상영은 연말까지 이어졌고 조금은 뒤늦은 감이 있지만 <밤치기>에 대한 감상을 적고자 한다. 다만, 영화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앞서 언급했던 <밤치기>에 대한 몇몇 편견(필자가 가진)을 부각할 만한 지점은 의도적으로 배제하여 글을 작성할 생각이다.

      

   이는 이미 존재하는 <밤치기>에 대한 많은 평가와 언어들과는 비교적 차별화된 글을 쓰기 위한 노력이며 영화를 보는 내내 작품이 가진 또 다른 영화적 지점이 많이 존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본 글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작품에 대한 글쓴이의 주관적 생각을 바탕으로 한 감상임을 밝힙니다.)

영화는 두 인물의 대화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샷들에 충실한 문법을 가지고 있다.


엉성하게 풀려있는 시간의 매듭을 통한 영화적 도발 <밤치기>, 표국청


   극장에서부터 줄곧 이 영화에 대하여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결국 시간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점이다. 영화의 서사는 간단하다. 시나리오 자료조사를 위한 작가(영화상 정가영, 여자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지만 이하 작가로 표기한다.)와 남자의 만남, 작가는 남자에게 호감을 가지고 성적으로 접근한다. 남자는 작가에게 또 다른 남자(이하 아는 형)를 소개해주지만 결국 작가는 남자를 다시 찾아간다. 끝내 작가는 남자와 이어지지 않는다. 정말 표면적인 서사만을 꺼내어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일반적으로 영화 안에 흥미로운 지점은 이런 간단한 서사 안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일면 자극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재미있다거나 유쾌하다거나 위트 있다고 생각되는 대사들이다. 비교적 적은 공간들 속에서 영화는 남녀의 대화를 통해 이야기와 감정들을 전개해나간다. 이 부분은 명확하게 영화의 강점이며 영화가 ‘원나잇 토크 무비’라는 셀링포인트를 가지게 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극장에서 목격한 <밤치기>라는 영화 속 물리적 시간은 하룻밤인가?

     

   필자가 이러한 의문을 가졌던 영화 속 순간들은 다음과 같다. 


   룸카페에서 남자가 화장실에 다녀온 이후 자신과 작가가 있었던 방을 잃고 룸카페를 계속해서 헤매는 장면. 남자가 작가에게 소개해준 동네 아는 형과 작가가 입맞춤을 나누는 장면, 작가가 아는 형과 헤어지고 남자를 찾아가는 장면, 영화의 결말부에서 작가가 화장을 하고 옷을 갖춰 입고(작가가 영화 내내 입고 있는 그 의상들) 집을 나서는 장면.

     

   위의 네 가지 장면을 하나씩, 기억이 나는 한 최대한 자세하게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해보겠다. 먼저 룸카페의 장면이다. 작가와 남자가 만난 이후 술집에서 술을 한 잔 걸치고 두 사람은 룸카페로 향한다. 물론 술집을 나서는 장면도 룸카페로 향하는 모습도 없다. 단지 술집에서 길거리로 길거리에서 룸카페로 씬이 바뀔 뿐이다.


   이것은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 관성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인물들이 같은 시간의 선 안에서 공간을 이동했다고 여기게 된다.

     

   하지만 이 관성에 제동을 거는 것이 바로 룸카페에서 길을 잃는 남자의 장면이다. 남자는 여자에게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화장실에서 볼일을 본 뒤 룸카페로 돌아온다. 미로 같은 룸카페를 헤매던 남자는 어떤 방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그곳에서는 다른 연인이 사랑을 나누고 있다. 머쓱해진 남자는 어느 방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서비스 쿠키를 접시에 담는다. 이후 방 안에서 작가와 다시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남자의 모습이 등장한다. 

    

   물론 <밤치기> 이외에도 인물의 이동을 자세하게 제시하지 않는 영화는 있다. 아니, 많은 수의 영화들이 인물의 이동에 있어서 공간의 이탈과 진입을 명확한 이미지로 제시하지 않는다.

     

   재미있는 점은 길을 잃었을 때 남자의 표정이다. 마치 무언가 잃어버린 것 같은 남자의 표정. 그 표정이 이미지로 제시된 이유는 무엇일까? 룸카페가 미로로 제시되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의문이 제기된다.

     

흔들리는 마음, 사랑에 대한 마음이라고 하기에는 상실의 감정이 느껴지는 샷. 왜 필요했을까?

   룸카페를 잠시 벗어나 작가와 아는 형이 입맞춤을 나누는 장면이다. 노래방에 남겨진 두 사람은 둘만의 시간을 보내다가 함께 귀가한다. 이야기를 나누며 걷던 두 사람. 작가가 아는 형에게 “키스해도 돼요.”라는 말을 하고 두 사람은 키스한다.

     

   한참 키스를 보여주던 영화는 이내 키스하기 직전의 대사를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다시 보여준다. 그리고 이번에는 두 사람이 키스를 하지 않고 헤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필자는 앞서 언급한 룸카페의 장면과 지금의 이 키스 장면에서 마치 시간이 분절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조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같은 인물의 서로 다른 시간 선. 조금 더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기 쉬운 용어를 채택하자면 평행우주와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생각해보자. 우리는 영화를 받아들임에 있어서 서사를 따라가게 되고 이 서사를 이끄는 것은 항상 다르지만 주로 인물이다. <밤치기>는 그 인물이 뱉는 ‘말’로 서사를 이끌어 나간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사를 따라가다가 그 서사의 시간이 어긋나는 순간이다. 

    

   순행되거나 역행하는 것이 아닌 조금 되돌아오거나 조금 앞서 나가는. 그런 순간들이 <밤치기>에는 존재한다. 그때마다 관객은 관성에 의해 그 어긋난 지점을 순식간에 봉합해 버리지만 사실은 그 순간들이 서로 이어진 시간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해보면 흥미롭지 않은가? 

    

   룸카페에서 길을 잃은 남자의 모습이 또 다른 시간 선상의 남자의 모습이라면? 그대로 작가가 있는 방을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입맞춤을 나누는 작가와 아는 형, 그렇지 않은 작가와 아는 형이 모두 존재하는 것이라면?  

   

   영화는 이처럼 시간을 활용해 여러 가지 선택지를 만들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작가가 아는 형과 헤어지고 남자를 찾아가는 장면, 남자가 작가가 기다리는 장소로 찾아가는 장면에서 감독은 적극적으로 점프컷을 활용한다. 수많은 다른 공간들 속을 걷는 인물이 마치 한 지점을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은 같은 구도와 같은 인물과 인물을 구성하는 정보들, 가령 의상이나 헤어스타일 등이다.     

   때문에 관객들은 계속해서 공간이 바뀌더라도 인물은 같은 시간 안에 있으며 동일한 곳을 향해 가고 있다고 믿게 된다. 하지만 그게 정말 같은 시간 안의 인물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분명하게 두 시간 선상이 보였던 씬. 입맞춤과 헤어짐.

   감독은 이러한 시간의 접합 부분을 교묘하게 열어 놓아 관객으로 하여금 그 시간들이 동일하다고 믿게 만든다. 하지만 시간의 어긋남이라는 포인트에서 영화를 바라보자면 그 이미지들이 진행되는 모든 시간과 공간은 다르다고도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감독은 <밤치기>에 영화가 가지는 속성 중 하나를 가져다 놓은 것이다. 영화의 모든 이미지는 재현이고 모든 재현은 서로 다른 시간성을 가진다. 때문에 마치 여러 가지 선택지, 또는 선택에 따른 결과물이 하나의 스크린에 펼쳐지는 것이다.

     

   작가가 남자와 만난 뒤 키스를 시도했을 때 남자는 그 키스를 피한다. 그리고 작가는 남자를 남겨두고 떠난다. 하지만 작가가 말했던 것처럼 “함께 있었으면 정말 좋았을”어느 시간이 존재하지 않다고 장담할 수 없다.

     

   영화의 안에서 작가는 남자에게 15년간 골방에 갇혀있는 남자의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 속 남자가, 나아가 현실의 작가가 만들고 싶었던 영화는 최고의 결말을 가지고 있는 영화였지만 결국 영화는 완성되지 못한다. 영화가 제작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영화의 후반부에 이 이야기가 등장하는 이유가 영화 전반에 드러나는 선택지에 대한 귀결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의 결말은 감독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완성하는 것이다. 여러 시간들을 흩뜨려 놓고 그 시간들 속에서 관객들이 선택하는 시간들을 결합하면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영화의 결말은 영화의 시작일 수도 있고 끝일 수도 있는, 아니 어느 지점에 놓아도 괜찮은, 집을 나서는 작가의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밤치기>의 시작점은 어디인가? 결말은 어디인가? 

   

   극단적으로 인물을 중시하는 카메라로 인물의 감정을 따라가게 만들지만 그 사이사이에 시간의 매듭을 엉성하게 풀어두어 즐거운 상상을 해보게끔 만드는 <밤치기>는 정말 도발적인 영화다.

     

두 사람이 맺어지지 못 한 것은 누구의 결말인가? 아니, 그 이전에 결말일까?

PS. 작가가 남자를 남겨두고 떠나는 순간에 남자의 뒷모습에서 이미지가 멈추고 잠깐의 블랙아웃 이후 다시 남자의 뒷모습이 등장한다. 마치 눈을 깜빡이 듯. 이 이미지에 대한 의문을 풀어내고 싶었으나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더 깊게 이야기해보고 싶어 이번 글에서는 제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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