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을 앞둔 당신에게 <미스터 노바디>, 나선혜
미스터 노바디, 2009, 자코 반도마엘
(본 글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작품에 대한 글쓴이의 주관적 생각을 바탕으로 한 감상임을 밝힙니다.)
0. 선택을 향한 시선을 담은 영화
우연히 만나게 된 한 편의 영화가 오랜 기간 마음속에 남을 때가 있다. 몇 번을 거듭해서 보아도 영화가 담고 있는 의미가 전혀 퇴색되지 않는 그런 영화 말이다. 나에게는 <미스터 노바디>가 그러하다. 이 영화에 특별한 끌림을 느낀 이는 나뿐만이 아닌 듯하다. 그래서인지 이미 <미스터 노바디>의 흥미로움에 대해 논하는 글은 넘쳐난다.
영화가 지닌 복잡한 서사나 과학적 개념(상대성 이론, 나비효과 등)은 관객의 영화 해석 본능을 일깨운다. 영화 속에 숨겨진 작은 요소들(색이나 특정 단어의 이용)도 영화를 분해해서 해석해보고자 하는 욕심을 자극한다.
하지만 이 영화와 여러 번에 걸쳐 만났을 때에, 마침내 이 영화를 향한 모든 해석은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영화가 130분가량 끌고 왔던 서사는 결국 ‘니모’라는 한 아이의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얽혀있는 이야기로, 니모의 선택이 일어나지 않은 이상 그 모든 것은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불과하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해석하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그렇기에, 여기서는 잠시 해석을 접어두고자 한다. ‘니모의 미래 인생은 9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라고 말하는 대신, 니모의 인생이 뻗어 나가는 모양새를 지켜보고 싶다. 그 모양새를 지켜보다 보면, 우리의 인생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작은 선택’을 내려야 하는 순간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어서, 우리가 매일매일 행하는 ‘작은 선택’들을 영화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에 주목하게 된다. 영화가 인생의 ‘작은 선택’들에 보내는 시선이 담긴 두 곳을 살펴보자.
1. 첫째, 비둘기 미신
영화는 비둘기 실험 영상으로 시작한다. 버튼을 누르면 먹이를 먹을 수 있는 문이 열리게끔 조성된 우리가 있다. 비둘기는 버튼을 누르면 먹이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을 가장 빨리 이해했다고 한다. 인과관계를 파악하는 데에 능숙한 동물인 것이다.
하지만 실험조건을 바꿔서 20초마다 자동으로 문이 열리게끔 조성했을 때, 비둘기는 무엇을 했기에 문이 열렸는지 궁금해한다. 만약 문이 열리는 시간과 비둘기가 날갯짓을 하는 시간이 우연히 일치했을 경우, 비둘기는 자신의 날갯짓으로 인해 문이 열렸다고 믿게 된다. 이후 먹이를 먹기 위해 20초마다 반복적으로 날갯짓을 하는 행동을 보인다. 이러한 조건 반사를 ‘비둘기 미신’이라고 한다. 어떠한 행동과 결과 사이의 인과관계를 구축하고자 자신만의 논리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이런 비둘기 미신을 증명하는 것처럼, 주인공 니모는 미래의 자신이 행한 선택들과 결과를 인과관계를 통해 설명한다. 내가 행한 사소한 언행이 나비효과를 거쳐 이후의 거대한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식이다. 이러한 작은 선택들이 모여 만들어낸 결과로서 니모의 9가지 인생이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영화가 담고 있는 인생의 개수가 9개일 뿐, 니모가 어떠한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니모의 미래는 사실상 무한대에 가깝게 변주될 수 있다.)
하지만 나비효과에 기대어 만들어낸 이 인과관계가 옳다고 보기는 어렵다. 날갯짓을 했을 때 우연히 문이 열렸다고 해서 날갯짓과 문이 열리는 것 사이에 인과관계가 성립된다고 볼 수 있는가. 그 사이에 인과관계가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힘으로 나비효과의 복잡다단하고 예측 불가한 인과관계의 단계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한가. 오히려 그 인과관계는 누구도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맞는 편일 것이다. 실은 문이 20초마다 자동으로 열린다는 사실을 비둘기가 절대 알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역시도 현재라는 결과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흔히들 ‘선택의 결과로 현재가 있는 것이니 네 선택에 책임을 지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비둘기 미신에 따르면, 우리가 내리는 선택과 결과 사이에 분명한 인과관계를 따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문은 ‘그저’ 열린 것이고, 우리는 때마침 그때 ‘그저’ 날갯짓을 한 것이다. 모든 것을 인과관계로 해석하고자 하는 마음을 버릴 때, 비로소 선택은 좋은 선택과 나쁜 선택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게 된다. 모든 선택이 제 나름의 가치를 갖는 선택이 된다. 이는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일종의 위로와도 같다. ‘현재의 모습이 어떠한지와 상관없이, 당신의 선택은 유의미했다’는 위로.
2. 둘째, 낙엽 날리기
영화의 마지막, 자신의 미래를 이미 꿰뚫어보고 있는 9살 니모는 기찻길에 서서 어느 방향으로 갈지를 고민하고 있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인해, 이제 어린 니모는 아버지와 함께 플랫폼에 남아있을 것인지 아니면 어머니를 따라 기차를 타고 떠날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한다. 아버지와 함께 남는다면 진 혹은 엘리스와 결혼하여 불행히 삶을 마감할지도 모른다. 어머니를 따라가서 운명의 연인인 안나와 함께한다고 해도 그 끝이 불행한 것은 매한가지이다.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니모가 선택하는 곳은, 다름 아닌 제3의 길, 즉 한 번도 달려가 보지 않은 샛길(자신도 알지 못하는 미래)이다. 니모는 샛길로 달려가 숲에 도달하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낙엽을 불어 날린다. 미래를 아는 특별한 소년으로 태어났음에도, 결국 자신이 알지 못하는 미래에 모든 것을 걸어본 것이다.
이 역시 ‘선택’을 향한 영화의 독특한 시선이 드러난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마치 A와 B라는 단순한 선택지 외에도 인생에는 무수한 선택지가 있다고, 그렇기에 앞이 훤히 보이는 길보다는 새로운 길을 택해보라는 조언처럼 들린다. 선택의 결과가 자명한 세계가 아닌, 인과관계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세계를 향해 낙엽을 날려보라는 것이다.
그 조언대로 제3의 길을 택해 낙엽을 날린 니모는 어떻게 되었을까. 낙엽을 날린 덕분에 니모가 안나와 무사히 재회할 수 있게 된다는 식으로 영화는 선택의 결과를 꽤나 행복하게 그려낸다. 바로 이 순간이 영화가 두 번째로 우리에게 위로의 손길을 보내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니모처럼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우리에겐 매 순간이 낙엽을 날리는 순간일 것이다. 어쩌면 영화는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미래에 모든 걸 걸고 낙엽을 날리는 우리에게, 결국은 원하던 미래가 찾아올 것이라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3. 사랑할 수밖에 없는 영화
이제까지의 선택의 여파로 현재의 인생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때마다 선택의 무게에 짓눌리곤 한다. ‘그때 그걸 선택했더라면’으로 시작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수없이 많은 ‘아무도 아닌 나(nobody)’를 만들어낸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고민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아직 생겨나지 않은 ‘아무도 아닌 나’들이 나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는 무게감, 그 무게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 외면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늘 <미스터 노바디>를 찾는다. 얽히고설킨 과거와 미래 속에서 선택을 포기하고 싶을 때 항상 이 영화의 처음과 끝을 주시하며 다음과 같은 문장을 되뇌인다. 이 문장 안에서 모든 길은 옳은 길이 되며, 모든 길을 긍정하기에 나는 이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비둘기 미신처럼, 당신의 날갯짓과 문이 열리는 것의 인과관계는 끝내 파헤칠 수 없다. 그러니 모든 게 당신의 선택으로 인한 것이라며 인생을 선택의 인과관계 속에 옭아매지 말자. 그리하여 비록 당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다 해도 괜찮다. 달리고 싶은 길로 곧장 달려 낙엽을 날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