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치 드렁크 그 자체인, 우리를 환상 속으로 초대하는, 김영찬
본 글에는 영화 <펀치 드렁크 러브>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폴 토마스 앤더슨(PTA)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호아킨 피닉스, 고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과 같은 걸출한 배우들의 이름을 떠올릴지 모르겠습니다. 또는 그들의 연기가 빛나는 <데어 윌 비 블러드>나 <마스터>라던지, 폴 토마스 앤더슨이 베를린 영화제에서 금곰상을 받은 <매그놀리아>나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후보작에 올랐던 <팬텀 스레드>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영화들을 보면 배우들의 소름 돋는 연기력과 재미있는 각본, 연출력 등에 감탄하게 됩니다. 꽤나 긴 시간의 영화들이지만 쉽게 몰입하여 감상하게 되고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영화가 끝나면 상업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대단하다는 감탄이 절로 튀어나옵니다.
저는 올해 <팬텀 스레드>를 통해 PTA라는 감독의 영화를 처음 만났습니다. 그전까지는 이름만 알고 있었지만 <팬텀 스레드>의 경험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감독이 어떤 영화를 만들었는지 궁금해졌고, 마침 얼마 뒤에 종로의 시네마테크에서 PTA전을 진행하여 <매그놀리아>를 만났습니다. 아직도 모든 영화를 다 보지는 못했지만 저는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중에 특히 <펀치 드렁크 러브>는 가벼운 마음으로 좋아할 수 있는 그런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PTA는 미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그 속에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해 종종 이야기합니다. 또는 인간관계의 균열이나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하지만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해서도 얘기하곤 합니다. <펀치 드렁크 러브>는 후자에 속하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이 이상한 사랑 영화는 보는 사람을 미소 짓게 만듭니다.
저는 사랑 영화를 썩 좋아하지 않는 편입니다. 사랑 영화들은 일종의 판타지라고 생각을 하는데, 많은 영화들은 사랑을 판타지처럼 다루기보다는 현실에 맞닿아 있는 것으로 다루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랑을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사랑은 현실 속에서 존재합니다. 그러나 영화가 다루는 사랑이 보통 ‘우연한’ 기회로 ‘우연한’ 장소에서 ‘우연하게’ 시작되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를 발견하는 것이 기적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우연하게 마주칠 확률은 기적에 기적을 곱하는 정도의 확률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통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판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사랑 영화를 보는 거라면 그럴 수 있지만, 저는 사랑 영화를 보고 나면 자꾸 현실 속에서 그런 사랑을 찾을 수 있기를 꿈꿀 것 같아서, 그래서 사랑 영화를 자제하게 되는 면도 있습니다.
그런데 <펀치 드렁크 러브>는 어쩌면 그런 사랑을 꿈꿔도 좋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연애를 못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영화는 시작부터 완전한 판타지성을 전제합니다. 차가운 창고 속에서 홀로 일을 하고 있는 배리(아담 샌들러 역)는 밖으로 나가고, 카메라는 천천히 도로 쪽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갑자기 사고가 납니다. 차가 뒤집어지고 구릅니다. 그리고 이어서 다른 차가 배리의 앞에 멈추더니 피아노(하모니움)를 내려놓고 떠나갑니다. 배리는 이 피아노를 자신의 창고에 옮겨놓습니다. 혹자는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을 겪는 사람이라면 앞서 말한 기적적인 사랑을 겪기에 충분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PTA는 관객을 자신의 영화 속으로 초대합니다. 이 말도 안 되는 영화 속 공간에서 우리는 모든 일들을 ‘벌어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영화는 계속해서 배리의 심리상태를 따라갑니다. 레나(에밀리 왓슨 분)를 만나기 전까지(초반부에서 레나가 배리에게 차를 맡길 때는 아직 레나와 정서적인 공감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배리의 심리에 변화를 주지는 않습니다.) 영화는 뭔가를 긁는 거슬리는 소리를 깔아 둡니다. 배리의 일곱 누나들이 배리를 대하는 태도와 배리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모습들, 배리가 마일리지를 모아 비행기 표를 사는 데 집착하는 모습은 지금 배리가 놓여있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처럼 보입니다.
레나와 처음 데이트를 할 때, 배리의 불안한 심리상태는 극대화됩니다. 사랑이라는 감정과 레나라는 사람과 관계를 형성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모두 섞인 채 배리는 데이트 중간에 레스토랑 화장실에 가서 화장실을 부숴버립니다. 레스토랑의 매니저는 배리가 화장실을 부순 사람임을 확신하고 레스토랑에서 나갈 것을 요구합니다. 배리는 그 순간 지속적으로 이를 부정합니다. 이 이상한 데이트가 끝나고, 배리는 레나를 집에 데려다줍니다. 그때 배리가 걸어가는 길에는 EXIT이라는 글자가 마치 거울에 거울이 반사된 모양으로 끊임없이 이어져 있습니다. 레나는 경비실 전화로 배리를 부르고, 둘은 키스합니다.
레나는 얼마 뒤 하와이로 출장을 떠납니다. 배리는 푸딩을 미친 듯이 사 모아 마일리지 쿠폰으로 하와이행 비행기 표를 받고자 합니다. 하지만 상담원은 바로 발급이 안 된다고 말하고, 레나를 보고 싶다는 일념에 사로잡힌 배리는 자신의 돈으로 표를 사 하와이로 떠납니다. 또 다른 마법 같은 순간입니다. 배리는 레나에게 연락해 그가 있는 호텔로 향하고, 만난 두 사람은 키스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감정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배리의 변화가 나타납니다. 배리는 레나에게 자신의 문제들을 고백합니다. 레스토랑의 화장실을 부순 것도 사실 자신이라는 것까지도.
하지만 해결되지 않은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배리가 예전에 걸었던 폰섹스 업체의 협박입니다. 돈을 달라는 협박을 무시하던 배리에게 폰섹스 업체의 사장(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역)은 사람을 보냅니다. 배리는 레나와 같이 있었고, 레나는 이 과정에서 다치게 됩니다. 그동안 혼자 화를 분출하던 배리는 처음으로 행동합니다. 그는 폰섹스 업체가 있는 곳을 찾아가 사장을 대면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고 독특한 대사를 던집니다.
“내가 지금 얼마나 강한 지 넌 모를 거다. 난 지금 사랑에 빠졌거든”
사장은 배리를 그냥 보내줍니다. 배리는 레나를 만나기 위해 돌아오고, 이미 퇴원한 그녀에게 진심을 다시 한번 고백합니다. 하모니움을 치는 배리의 옆에서 레나 또한 그에 대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다른 영화들에서도 알 수 있지만, PTA는 노래를 정말 잘 사용하는 감독입니다. <팬텀 스레드>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아름다운 메인 테마 곡이나 <매그놀리아>의 삽입곡들만 봐도 그렇습니다. <펀치 드렁크 러브>에서도 노래들은 관객인 우리의 감정을 증폭시키는 데 많은 역할을 합니다. 촬영 또한 PTA만의 특징이 잘 부각되며, 이 이상한 영화의 내용을 이상하지 않게 만들어줍니다. 몽환적인 영화 전체의 분위기는 관객을 영화 속에 몰입할 수 있게 만들어주고 심지어는 오글거릴 수 있는 대사들이 괜찮아 보입니다.
<펀치 드렁크 러브>에서 PTA는 ‘자신을 온전히 보여줄 수 있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심리적으로 불안하여 누구보다 자신을 보여주기를 싫어하던 배리는 레나를 만나 자신의 문제들과 감정을 드러냅니다. 누구보다 독특한 두 사람이지만 그렇기에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영화의 로맨틱한 분위기 때문에 우리는 <펀치 드렁크 러브>가 사랑의 시작에 대해 이야기하는 로맨틱 코미디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 <펀치 드렁크 러브>는 올해 개봉했던 <팬텀 스레드>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펀치 드렁크 러브>가 온전히 나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그 시작을 다룬다면, <팬텀 스레드>는 그런 사랑의 관계가 극단적으로 가는 경우에 얼마나 서로를 옭아매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실제로 <팬텀 스레드>에서 레이놀즈(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알마와 사랑에 빠질 때, 그는 자신의 성격을 모두 고백합니다. 자신의 집에서 알마가 지켜줬으면 하는 규칙들까지도. 그럼에도 알마는 레이놀즈와 사랑에 빠집니다. 맞지 않는 서로의 성향은 점차 균열로 이어지지만, 그 극단에서 두 사람은 합의점을 찾아냅니다. 지독히도 폭력적이지만 그들의 사랑은 그런 방식으로 유지됩니다.
아마도 PTA는 영화를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의 개념을 전달하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영화들이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건, 사랑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반증일 수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우리를 판타지 속으로 초대하고, 환상적인 사랑-복싱 선수의 주먹에 여러 대 맞은 듯한 얼얼함-을 소개하는 <펀치 드렁크 러브>라는 영화를 저는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