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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모임 로칸디나 May 23. 2018

로디즈가 사랑하는 영화 <고스트 스토리>

모든 것들은 돌고 돌아 순간들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닐까, 황다빈

<고스트 스토리>, 데이빗 로워리, 2017




모든 것들은 돌고 돌아 순간순간들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닐까?


   드넓은 우주를 상상해본다. 그 속에서 아둥바둥 살아가는 우리들의 존재를 떠올려본다. 광활한 우주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존재란 소파 틈에 존재하는 한 줌의 먼지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연약하고 불안전한 우리의 존재에 대해 생각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간다. 또 우리는 죽는다. 죽음에 대해 생각했을 때 나는 두려움을 느낀다. 또 내가 없는 죽음 이후의 세상을 생각하며 허무함을 느낀다. 죽음에 비했을 때 모든 것들이 한심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오히려 그 유한성이 이 순간들을 특별하게 만들기도 한다. 더 나아가 그 유한성을 넘어 우리의 삶이 그대로 다시 반복된다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이 영화는 이 질문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감독이 인터뷰에서도 밝혔듯이 처음 이 이야기에 영감을 준 계기는 지구 종말에 관한 기사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사랑하는 연인을 기다리는 유령의 이야기로 변모한다. 이 이야기만 들으면 단순히 사랑이야기로만 보일 수 있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시간과 공간, 존재와 죽음, 장소와 역사 등 다양한 차원의 이야기로 나아간다.


   아름다운 이미지와 음악이 이 영화를 채워 나가는데 그 추상적인 이미지와 사운드들이 관객을 여러 차원을 거쳐 저 멀리 데려다 놓는다. 그쯤 되면 단순히 아름답게 찍은 영화가 아니라는 것을 저마다의 논리가 쇼트 하나하나에 베여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 영화를 올해 첫 개봉작으로 보아 너무 기뻤다.  비평의 시작을 이 영화를 선택한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1.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는 기다림

 

   기다림이란 단어에는 시간과 공간의 속성이 불가분 하게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기다림 속에는 인내하는 시간이 포함돼있으며 그 기다림과 약속의 공간이 내포되어있다. 영화는 이 기다림이라는 속성으로 영화를 이끌어간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우주적 존재로서 우리의 의미와 시공간의 흐름을 아름답고 유려하게 담아낸다.  


   영화는 두 남녀의 대화에서 시작한다. 여자는 과거에 집을 떠날 때 집안에 무언가 표식을 남겼던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남자는 어떤 움직이는 빛을 발견한다. 그 빛이 우주의 빛으로 변하고 별들이 수 놓인 하늘이 자전하며 밤하늘이라는 공간적 요소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표현한다. 그리고 그 빛이 고스트였다는 걸 우리는 영화를 보며 깨닫는다.

  

   또 영화에서 시간을 다루는 기이한 형식의 대조가 보인다. 그것은 관습적으로 보통의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는 일상의 시간을 그대로 나열하는 시간과 엄청나게 오랜 시간을 아주 짧게 압축해 점프하는 시간이다.  M은 c의 죽음에 슬퍼하며 파이를 먹는 롱테이크 장면이 나온다.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카메라는 꽤 오랜 시간 동안 그 모습을 바라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 장면은 이상하리만치 길어지며 관객으로 하여금 답답함과 괴로움을 느끼게 한다. 그 긴 시간 동안 우리는 구석에 있는 고스트의 존재를 의식한다. 그렇게 카메라의 시선은 물끄러미 바라보는 고스트와 동일시된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를 잃고 슬퍼하는 m의 곁에서 기다림의 시간을 간접적으로 체험한다.

 

   그 뒤부터는 시간의 흐름이 유려하게 압축되어 점프되는 형식을 취한다.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유령이 빌딩에서 떨어지며 나타나는 밤하늘의 움직임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오랜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변화를 순식간에 점프한다. 이는 앞과 뒤의 시간을 다루는 형식에 있어서 대조가 느껴진다. 그리고 이미 앞에서 기다림의 시간을 경험해본바 고스트가 견뎌온 영겁의 시간을 상상하게 한다.

  

   그 세월의 흐름에 의해 꼬질꼬질해진 유령을 보면서 이상한 감정의 동요가 인다. 이 영화에서는 대사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유령은 말도 할 수 없고 살아있는 존재와 상호 소통이 되지 않는 일방적 소통의 존재이다. 어떤 이유인지 천을 뒤집어쓴 이 고전적인 유령의 모습은 표정조차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말 그대로 다른 차원의 존재인 유령을 통해 시공간을 관통한다. 우리는 지나오는 시공간을 보며 유령의 감정을 가늠하게 되고 그 순간 영화의 의미가 여러 차원으로 갈라진다.

 


2.     시간의 순환, 공간의 역사,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위하여.


   우리는 기다림의 시간을 축적하며 공간의 변화를 마주한다. 그 길고 긴 세월에 갇힌 이 유령은 높게 솟은 빌딩에서 다시 바닥으로 추락한다. 그 하강의 이미지는 마치 다시 땅으로 처음으로 돌아가려는 시도 같다. 그 뒤의 영화는 서부개척시대로 점프한다. 그곳에서 다시 일어서는 꼬질꼬질한 유령의 모습은 과거로 돌아간 것이 아닌 영겁의 세월을 겪고 맞이한 시간의 순환이다. 그곳에서 만난 개척민들을 바라본다. 그들이 새로운 집터를 찾고 있던 순간이라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그 뒤 한 소녀가 쪽지에 무언가 적어 바위 밑에 숨기며 c가 만들고 m이 들었던 노래를 흥얼거린다. 그때 우리는 m이 노래를 들으며 만져지지 않는 유령에 가 닿았던 모습과 집을 떠나기 전 쪽지를 숨기던 모습이 떠오르며 순환의 의미를 더한다.

 

   그 뒤 유령은 다시 전반부의 시공간을 맞이한다. 그토록 기다려왔던 그녀를 본다. 그리고 본인과 그녀가 그 집에서 지내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 장면들은 1.33:1에 둥근 비네트 효과가 가미된 이 화면이 마치 유령의 구멍 뚫린 시선을 연상케 한다. 또 영화에서 모서리가 둥근 화면 형태가 오래전 가족사진처럼 보이는 점은 영화 안에서 그 공간에 머물렀던 모든 존재들을 담아낸 사진과도 같이 느껴진다.  C가 말했던 “history”처럼 유령이 거쳐왔던 모든 시간의 흐름이 공간의 역사를 쌓아낸다. 사진이란 추억을 담아내며 기억이 되고 기록이 되며 역사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때 영화는 나의 주변을 둘러보게 하고 보잘것없게 느껴지던 주변의 모든 것들의 역사를 상상해보게 한다.

   

   다시 맞이한 순간들 앞에서 우리는 c가 죽기 전에 이미 그 집에 c고스트가 존재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이 단순히 고스트의 플래쉬백이 아니라는 걸 절망 섞인 피아노 소리가 중복되면서 더욱 확신한다. c고스트의 존재를 몰랐을 때 공포감을 느꼈던 피아노 소리에서 이제 우리는 피아노 앞에 주저앉은 고스트의 모습과 함께 상실의 슬픔을 느낀다. 이 존재의 깨달음은 함부로 두려워하고 무심하게 흘러 보낸 순간들을 떠오르게 한다. 그 뒤 c는 죽고 마지막 장면엔 두 명의 c 고스트가 존재한다.

  

   오랜 세월을 견뎌온 고스트가 일어나 그토록 보고 싶었던 쪽지를 꺼낸다. 그때 문이 열리며 초반에 등장했던 버지니아 울프 소설의 구절이 떠오른다. 그리고 쪽지를 펴자 유령은 사라진다. 그리고 그 위에서 반짝이는 빛이 보인다. 그 빛은 죽은 지 얼마 안 된 새로 남은 고스트일 것이다. 그렇게 그의 기다림은 또다시 시작되고 반복되며 순환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기나긴 기다림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이점에서 이 영화에게 매우 인상 깊었던 점은 이 순환되는 시공간을 통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구분이 무너져버렸다는 것이다.


   어쨌든 영화에서의 과거는 순환되어 오는 미래로 볼 수도 있으며 미래는 이미 과거에 저질러진 일로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공간의 차원에 밀접한 이야기를 유령이라는 어떤 차원의 존재를 가져와 이야기한다는 것이 정말 매력적이다.

 

   이 시간의 순환은 영화에 등장한 주정뱅이 예언가의 말에 온몸으로 반박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애초에 감독이 이 주정뱅이의 대사와 같은 맥락의 신문 기사를 보고 이 영화의 영감을 받았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모든 것이 죽음에 이르듯이 이 세상의 존재하는 것들은 언젠가는 다 사라질 것이라는 그의 말은 고스트에게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유령은 이 허무주의 태도에 반박하 듯 영겁의 시간을 기다려 반복되는 시간을 만난다. 다시 쪽지를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이 고스트는 경쾌한 음악과 함께 기다림을 끝낸다. 고스트는 이 영겁회귀의 끝에서 끝끝내 반복되는 시간을 이음으로써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긍정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없어질지라도 그것은 덧없음이 아님을 비록 그 삶들이 유일성을 잃고 반복될 지라도 말이다.

  

   니체는 허무주의에 대해 고민하다 죽음을 초월하는 가장 극단적인 허무주의를 발견했다. 그것이 영겁회귀이다. 나의 모든 것들이 굴레에 갇혀 죽음조차 무한히 반복되는 것만큼 허무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극단적 허무인 영겁회귀를 넘어서는 것 그것은 이 반복되는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영겁회귀 안에서는 결국 현재의 삶의 반복일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현재의 선택을 본인의 의지로 행하며 다시금 그것이 반복돼도 좋다고 자신할 때 그의 삶은 긍정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현재는 거창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처럼 사랑하는 이를 껴안고 입을 맞출 수 있었던 순간, 내가 좋아하던 공간을 사유했던 순간, 기다림의 끝에 결국 마주할 수 있었던 순간 등 아주 일상적인 현재의 순간이다. 영겁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다시 경험하고 싶은 삶으로 그 순간들을 진심으로 긍정할 때 그것이 그 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은하계에 생멸하는 모든 우주를 즉 영겁회귀의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우리는 영화가 보여준 것처럼 그 순간에 존재했던 시간과 공간 또 모든 존재했던 것들을 다시 만난다. 결국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고 긍정하는 것은 우주를 아우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을 긍정하는 것과 같다. 그런 점에서 이영화는 가히 니체적이다.


   영화가 끝나고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잠을 잘 때 들렸던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에서 자기 혼자 떨어져 버린 액자들의 모습에서 이제는 두려워하고 무심하게 반응하지 않으리라. 그 너머의 존재를 한번 떠올려보고 이 순간 현재의 시간과 공간을 떠올려 본다. 그 시공간에 생멸해왔던 모든 존재들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다시 질문이 되어 돌아온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은 어떤 삶을 사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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