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에 대한 공포, 황다빈
(본 글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작품에 대한 글쓴이의 주관적 생각을 바탕으로 한 감상임을 밝힙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며 나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서웠다. 그리고 그 순간에 생긴 질문은 하루 종일 나의 마음을 찜찜하게 만들었다. 무엇이 두려웠던 것일까?
역설적이게도 나는 ‘자유’라는 것이 두려워졌다.
인류의 역사는 자유를 추구하며 발전해왔다. 이 자유를 쟁취하기 위하여 수많은 분들의 희생이 있었다. 그 덕에 현재 인류는 어느 정도 자유를 보장해주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것이 법적 이데올로기 하에책임이라는 대가를 담보로 하는 자유이긴 하지만 말이다. 우리는 이 자유의 가치를 숭고히 여기고 이것을 손상시키는 것들 로부터 자유를 지키기 위해 맞선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 너무나도 소중하고 특별한 이 ‘자유’가 영화가 끝나는 순간만큼은 너무나 무섭고 소름 끼쳤다. 그리고 그 자유에 뒤따르는 책임이라는 단어가 내 어깨를 짓눌렀다. 그리고 그 공포심은 자유라는 것이 너무 지나치게 신성시되어왔던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에 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이 영화가 노르웨이 영화라는 것. 2011년 7월 22일 노르웨이 섬 우토야에서 있었던 아이들을 향한 극우 인종차별주의자의 무참한 살육 사건을 떠올려 본다면 그 질문이 현재 북유럽에서 더 나아가 테러의 위협을 받는 전 세계에 공론화되어 왔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유를 어디까지 용인해야 하는 것인가. 그에 따라 미국은 9.11 이후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감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노르웨이는 반대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자유주의가 퇴보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그들은 자유가 아닌 폭력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인류의 역사가 쟁취해온 이 ‘자유’를 둘러싼 많은 논쟁들은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델마>의 이야기는 어느 소녀의 특별한 능력에서부터 비롯된다. 그녀의 능력은 무언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는 매우 전지전능하게 그려지며 윤리적인 선의 제약이 없다. 그런 그녀의 능력을 통제하기 위해 가족 내에서 특히 아버지로부터의 어떤 억압이 존재하는데 이는 당연히 프로이트의 외디푸스 작용을 떠올리게 한다. 이는 전혀 우연이 아니라 이 이야기의 전반적인 구조에서 바라보아도 프로이트의 이론에 맞추어 짜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물며 그녀의 능력이 꿈을 꾸는 순간 발현되는 것조차도 프로이트가 갖는 꿈에 대한 해석. 즉 꿈이 존재하는 아주 근본적인 이유인 소원성취라는 프로이트적 관점이 그녀의 능력으로써 발현이 된다.
이 영화에서 또 놀라웠던 지점은 어떤 초월적인 존재를 그녀의 주변에 상정해 놓고 그 보이지 않는 존재를 관객 스스로가 자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서 버드 아이즈 뷰 쇼트로 광장을 내려다보는 장면이나 인물들이 떠나거나 그 뒤의 배경에 초점을 맞추어 바라보는 쇼트들이 그렇다. 그것은 델마에 등장하는 새를 떠올리게 하지만 그 1차원적인 답변으로는 쉽사리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이야기 안에서 가족 내력을 통한 무당, 마녀라는 내러티브를 더해 그 알 수 없고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해 더욱 다층적인 의미를 생산하며 곱씹게 만든다. 여기서 더 나아가 ‘델마’가 예수와 악마에 대해 이야기하며 일탈을 시도하는 장면을 떠올린다면 다음으로의 질문에까지 이어진다.
그녀의 주변에 있는 존재는 예수인가 악마인가. 그리고 이 질문은 우리가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녀가 마음먹기에 따라 예수가 될 수도 악마가 될 수도 있음을 안다. 처음 그녀가 그 능력을 쓰게 되었을 때 자기의 갓난아기 동생을 호수 바닥으로 사라지게 해서 죽게 만든다. 그것은 프로이트의 책에서 나와있듯이 사람들이 간혹 꾸는 꿈 중에 하나인 형제를 죽이는 꿈이다. 이는 특히 어릴 적 3-4살 터울의 형제에게서 나타나는데 이를 프로이트는 인간의 이기적임에서 발현되는 경쟁심이라고 보았고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하였다. 어쨌든 동생에 대한 질투심이 어린 그녀에게 동생이 없어져 버렸으면 하는 욕망을 갖게 했고 그것이 그녀가 자는 사이에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프로이트의 말에 따라 억압이 이루어지기 전 유아기 시기의 아이들의 꿈에는 어떠한 검열도 이루어지지 않으며 자신이 원하는 욕망이 그대로 실현된다는 말처럼 그녀의 꿈 또한 그대로 동생의 죽음으로 작용한다.
그 뒤 그녀의 부모는 특히 아버지가 기독교적인 억압을 그녀에게 가하고 이는 외디푸스 이론처럼 그녀의 욕망을 억제하고 잠복하게 만든다. 그 억압이 성인으로 까지 이어지면서 그것이 발작으로 등장하고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 이 분출되지 못한 욕망이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꿈을 통해 이루어진다. 또다시 윤리적인 선을 넘은 소원이 이루어지고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녀는 다시 집으로 내려가 억압을 요청하고 더욱 고통에 시달린다. 그녀 스스로 찾아간 길이었지만 그녀는 거기서 외디푸스 삼각형 속 억압의 상징인 아버지를 죽인다. 영화에서는 생물학적 아버지로서 그려지지만 그 이면에 함의된 의미는 그녀에게 가해지는 모든 사회적, 종교적 억압일 것이다. 그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그녀는 자유를 되찾고 해방을 갖는다. 그 모습은 그녀가 물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모습과 몸속에 가둬 두었던 새가 튀어나오는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딸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이 아버지의 존재가 억압을 강요하는 그런 권위적인 절대악이 아닌 델마의 능력으로부터 세상을 보호하기 위한 필요악처럼 그려진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론에서도 억압을 필요악처럼 다루는데 프로이트는 이 억압을 나쁜 것이라고 보지 않으며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고 문명화가 되기 위해서는 억압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하며 그에 따른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간이길 포기하고 인간이전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라고 우려한다.
어쨌든 이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우리의 사회는 계속 변혁해간다. 이처럼 델마는 자신을 괴롭게 하던 억압을 제거하고 자신만의 자유를 쟁취한다. ‘아버지를 죽인다’는 행위 이는 인류의 문명에 어둡게 드리워졌던 봉건적, 종교적, 전통적 억압에서 탈피하고 자유를 쟁취했던 우리의 역사를 의미한다. 영화에서도 그것을 어둡게 그려낸 것이 아니라 숭고하게 담아낸다. 그리고 그녀는 어머니의 다리를 낫게 하며 예수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마지막 광장에서 그녀가 자신의 능력으로 없애버린 연인을 끌어안는 장면을 보자. 거기서 카메라가 첫 장면과 비슷하게 버드 아이즈 뷰 쇼트로 넓은 광장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빠지기 시작한다. 그 순간 우리는 그 카메라에서 느껴지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물음이 해결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그 존재는 과연 예수인가. 아니면 악마인가. 단순히 그녀는 억압에서 해방된 것일 뿐 그녀의 삶에서 보았듯이 그녀가 그 능력을 예수처럼 선함에만 사용한다는 보장은 없다. 그리고 그녀가 생각하는 선함의 기준이 평등하고 보편적일 것이라는 보장도 더더욱 없다. 그것은 개인에게 처해진 입장에 따라 각기 다른 진영을 취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 아름답던 광장과 전지전능한 능력과 고귀한 자유를 쟁취한 델마에 대해 나는 두려움을 갖기 시작했다. 마치 그 광장 한가운데에 시한폭탄이라도 놓여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곳이 광장이라는 것은 더욱더 그런 의미를 곱씹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그 노르웨이라는 사회, 더 나아가 이 세계로 돌아가 같은 질문을 반복할 것이다.
"이 사회가 보장하는 자유는 무엇이며, 우리는 이 자유를 어디까지 용인하여야 하는 것인가."
이것이 바로 이 영화를 보고 내가 소중하게 생각해왔던 ‘자유’에 대해 두려움을 갖게 된 이유다.
*추신 영화가 너무 잘 만들어졌고 어디 하나 버릴 게 없었다는 점. 너무 좋은 영화를 만나서 기뻤다. 무서운 건 무서운 거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