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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모임 로칸디나 Dec 28. 2018

투 러버스 앤 베어, 2016

가장 추운 곳에서 가장 따뜻한 죽음을, 정재욱

(본 글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킴 누옌 감독


가혹하리만큼 냉혹한 누나부트준주(북극과 인접한 캐나다의 지역)의 빙판에서 이 영화는 진행이 된다. 하지만 언제 얼어죽어도 이상하지 않을만한 그 추위에서 마지막 로만(데인 드한 분)과 루시(타티아나 마슬라니 분)의 동사(凍死)는 이 영화에 그 어떤 장면보다도 따듯하며 어떤 온기가 느껴진다. 왜인지 이 얘기부터 하고 싶었다. 차갑고 공포스럽게 보여지는 이 영화가, 결말도 죽음으로 끝나는 이 영화가 오해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죄송스럽게도 결말을 먼저 스포일 해 버렸다. 이 영화는 사실 차가운 마음을 치유하는 사랑 영화라고 나는 먼저 이야기하고 싶고 관객들도 알아봐 줬으면 좋겠다. 


그곳은 과연 그들에게 안전한 곳이었을까?

어떤 얼어붙은 사람의 마음 마냥 펼처진 이 설원은 사실 이 영화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공간이라고 나는 얘기 할 수 없을 것 같다. 나에게 이 설원은 출구가 없는 연옥처럼 느껴졌다. 제아무리 달려도 끝 없이 나타나는 백색의 공간들. 너무 오래 지내다보면 정신병에 걸릴 것만 같은 그런 곳이다. 도대체 누가 그런 공간에서 살고 싶겠는가 싶다. 생각 해보니 딱 두가지 유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곳에 태어나 평생 그곳만을 알고 살았거나, 누구도 찾아 올 수 없는 세상의 끝으로 도망가고 싶었거나. 그런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고, 전자가 그 곳으로부터 도망가고자 할 때 이 관계는 파국으로 향해 달려간다. 로만은 폭력적인 아버지를 피해 세상의 끝으로 도망왔고, 루시는 아버지에게 강간을 당해 그 세상의 끝에서 공포에 시달린다. 둘은 서로에게 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최후의 보루이다. 그런 관계 속에서 루시는 로만을 떠난다고 한다.


이런 상처만 가득한 두 연인(two lovers) 사이에 느닷없이 북극곰(bear) 한 마리가 등장한다. 이 곰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 굳이 설명하려고 하지 않으려고 한다. 잘 모르기도 할 뿐더러 그 곰이 어떤 상징이라거나 하는 것을 설명 하려는 행위는 이 영화를 훼손하는 짓이 될 것이다. 여하튼 이 곰은 너무나도 뻔뻔하게 극 중에 등장해 너무나도 뻔뻔하게 극 중 인물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무슨 신이라도 되는 마냥 뜬금없이 본인 할 말만 하고는 사라진다. 사실 생각 해 보면 이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이 뻔뻔스러울 정도로 뜬금이 없다. 둘의 감정선도, 외화면에 갑자기 음악이 삽입 되는 것도, 하필 등장하는 군사기지도 그렇다.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굉장히 현실성이 짙은 이 영화에서 그런 뻔뻔스러운 비현실적인 요소들은 나의 마음을 안도 시킨다. 왜 그런가 이 글을 쓰면서 고민하게 되었다.


최근 들어 많이 하는 생각이 있다. 상처가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만날까? 우리는 나이 들면서 상처도 흉터도 누적된다. 어린 아이에게는 불에 손을 집어 넣을 용기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고 나서부터는 우리는 그것이 절대적인 법칙이 된것 마냥 다시는 시도 해 보지 않는다. 왜냐면 아팠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아프고 아프다 보면 우린 결국 멈춰 있을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 그것을 안다고 하자. 그런데 이렇게 상처가 쌓이고 하나 둘 우리의 걸음을 느리게 하다보면, 어느 순간 무엇 때문에 우리가 멈칫하는지, 무엇 때문에 아팠는지 우리는 더 이상 알지 못하게 되는 시점이 생긴다. 그저 이렇게 하면 아파 혹은 이렇게 해야지 안 아프다는 것만 기억하게 되는 아주 결과론적인 사고를 하게 된다. 그래서 무엇 때문에 아팠는지 기억을 하려고 하면 그것이 외화되지 않는다. 그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러다 보면 똑같은 실수를 계속해서 반복하게 된다. 알면서도 그런다. 로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게 어쩌면 우리는 앞 사람이 한 실수를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정도로 상처가 쌓인 사람들은 새로운 만남이 가능할까? 기억도 못하는 상처들은 치유가 가능할까? 하고 고민을 하곤 한다. 하지만 이 영화 속 둘의 상처가 명확하게 명시되지는 않지만 최소한 어떤 비현실적인 형태로서 물질화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된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도 못하고, 언제 생긴 상처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니 비현실적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에당초 말로서 설명이 되지를 않는걸. 최소한 나에게는 이 영화 속에 나타난 비현실적인 요소들은 그런 말로서 설명 할 수 없는 트라우마들의 흔적들 같아서, 그 흔적들을 우리가 볼 수 있어서 어떤 안도감을 얻었다고 생각을 한다. 그렇게 보여진 트라우마들이 폭파 할 때 얼마나 속이 시원하던가.


그런데 그런 시원함도 잠시 뿐이다. 로만은 루시의 아버지를 죽였다고 하지만 사실 생각 해보면 아무것도 해결 된 것은 없다. 그들은 여전히 연옥 같은 백색의 벌판에 버려져 있고, 설상가상으로 폭풍에 갇혀 얼어 죽게 생겼다. 사람의 상처라는 것이 그렇다.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더욱 아프게 다가오는 것이 상처다. 마치 비오는 날 다친 무릎이 시리듯이, 잊을만 하면 다시 나에게 찾아온다. 애당초 ‘내가’ 없앤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그저 앉고 살아가란 얘긴데, 그건 또 얼마나 가혹한 현실인가. 그런 가혹한 현실을 그래도 누군가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삶의 큰 위안이다. 둘 죽음이 따뜻한 이유는 그런데 있을 것이다. 둘은 서로를 껴안으며 마치 어떤 관에 함께 몰딩 된 것 마냥 함께한다. 둘은 이제 각자의 상처를 혼자 앉고 가도 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렇게 그 놈의 연옥에서 벗어난다.

가장 추운 곳에서 가장 따뜻한 죽음을 맞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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