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한다'라는 것은 무엇일까, 황다빈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2017, 아녜스 바르다
아녜스 바르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떠올리면 누벨바그 시대에 프랑스 영화를 이끌던 대표적인 감독들 중의 한 사람으로 기억할 것이다. 또한 그녀를 보수적인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역대 여성 감독 2명 중 한 명이며 여성 운동가로서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물론 그녀의 많은 작품들 또한 그녀를 기억하게 한다. 이 정도까지가 그녀를 글과 영화로 접한 사람들의 기억일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갑자기 기억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이 영화는 누군가에 대한 기억에 관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기억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기억은 어떤 형식으로 저장되고 불려지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으로 쉽게 떠오를 수 있는 것은 이미지다. 우리는 이미지의 연속인 영화에서 기억의 작동방식을 떠올린다. 더 나아가 ‘영화는 누군가의 기억일 수 있지 않을까’라는 호기심이 든다. 어떤 감독들은 영화를 만들 때 쇼트를 기억의 개념으로 접근한다.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영화로 <메멘토>가 그렇다. 재밌는 것은 영화에는 기억을 표상하는 문법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플래쉬백’이다. 이는 영화에서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보여주는 방식으로 자주 사용된다. 하지만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서는 '플래쉬백’을 통해 기억이라는 개념을 제시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기억의 개념을 고민해보게 만드는 지점은 그들이 찍는 사진이다.
영화는 아녜스 바르다 본인이 JR이라는 포토그래퍼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그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사진을 찍거나 특별한 사진들을 골라 만남의 장소에 커다랗게 붙인다. 영화는 특별한 사건 없이 사진을 찍고 붙이는 행위로 주된 서사를 이룬다. 또한 이 영화의 특이점은 전반적으로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따르면서 즉흥성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특정한 장면들에서 갑자기 연기를 시작한다. 그렇게 연출된 장면들은 영화를 관통하는 뼈대가 되며 극영화로서의 기능을 하게끔 만든다. 이 두경계를 오가며 자신만의 영화언어를 만들어내는 그녀의 연출에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영화의 첫 장면은 그들이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너무나도 뻔뻔스럽게 사랑스러운 주인공들은 우연히 마주치는 상황들이 생겨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척 연기를 한다. 서로가 둘의 작업물에 대한 생각이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며 이제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인지한다. 여기서 바르다는 JR이 절대로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 모습에서 오랜 친구인 ‘장 뤽 고다르’를 떠올린다. 이제 실제 그 둘이 만나는 장면이 나오면 둘은 같이 시작할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식탁에서 나누는 이 대화 장면은 그들이 실제 본인들이라는 측면에서 실제 일어난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쇼트의 구성은 극영화에서의 전형적인 대화 신으로 짜여있다. 대화 주체의 쇼트, 듣는 자의 리버스 쇼트, 둘의 마스터 쇼트와 음식을 자르는 클로즈업 쇼트는 픽스된 카메라로 촬영되었다. 이 말은 한꺼번에 4-5대의 카메라로 찍지 않는 이상 다 따로따로 찍었다는 말이 된다. 그것은 그 장면의 실제 시간이 연속된 시간이 아니며 쇼트마다 각기 다른 실제 시간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그 순간은 이 영화에서 실제와 연출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이 장면은 굉장히 재미있는 질문으로까지 밀고 나가게 한다. 그들은 분명 연기를 하고 있지만 그들이 자기 자신으로서 영화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 상황이 연기더라도 그것을 거짓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하지만 영화에서 명백하게 두 경계가 구분되어지는 지점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다음 장면들에서 나타난다. 둘은 커다란 카메라 사진이 그려진 차를 타고 어떤 마을을 방문한다. 그곳에서 그들은 마을 사람들의 사진을 찍어서 담벼락에 커다랗게 붙여준다. 그때 담아내는 사람들의 반응과 인터뷰, 두 주인공이 기대하는 모습들은 연출된 것이 아니다. 영화는 영화 내내 이러한 형식을 지킨다. 명확히 경계가 구분되는 순간들을 말이다. 그 지점에서만큼은 영화는 다큐멘터리처럼 즉흥적인 것들을 담아낸다. 여기서 그들은 첫 프로젝트의 시작으로 마을 사람들의 얼굴을 사진 찍어 붙인다. 그리고 바르다가 그 사진들을 바라보며 담벼락을 걷는 모습을 JR이 또 사진기로 찍는다. 그리고 바르다의 내레이션이 나온다. “새로 만나는 얼굴들을 내가 금방 잊지 않게 JR이 사진을 찍어주고 있다.” 거기서 우리는 바르다가 JR을 보며 ‘장 뤽 고다르’의 얼굴을 기억해낸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 영화가 사진을 찍는 행위에서 어떤 태도를 갖는지에 대해 우리는 짐작한다. 바로 '기억한다'라는 것을 말이다.
그 뒤 그들은 광산촌으로 떠난다. 그곳은 이제 광산으로 운영되지 않는다. 거기서 둘은 철거가 예정인 광산촌에서 유일하게 자리를 지키는 자닌을 만난다. 그리고 그녀와 다른 사람들에게 옛날 광부들의 사진을 받아 철거가 예정된 그 건물들에 광부들의 사진을 커다랗게 인화해 붙인다. 또 홀로 남은 그녀의 사진을 찍어 유일하게 살고 있는 그녀의 집에 커다란 사진을 붙여준다. 여기서 또다시 우리는 사진을 마주한다. 과거의 찬란했던 광부들의 사진이 이제는 없어질 그들의 건물에 붙여진다. 그리고 그 사진은 기억이라는 개념을 불러온다. 사진이 갖는 지표로서의 특징은 그들이 이곳에 존재했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하지만 그 사진들이 붙여진 건물들이 멀지 않은 시기에 없어질 것이라는 사실은 그들에 대한 기억과 찬란했던 광산촌의 추억이 서서히 사라져 감을 상기시킨다. 이는 더 나아가 누군가에 대한 기억이 사람들에게서 잊히는 순간들에 대입된다. 존재의 사라짐과 이어지는 기억의 잊힘은 우리가 언젠간 맞이해야 하는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그다음 장면에서 갑자기 두 주인공은 다시 아까의 식탁으로 돌아가서 대화를 나눈다. 굳이 다시 그들의 여정에서 식탁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왜 필요했을까? 그러한 질문과 함께 그 대화 장면에서 내가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이다. 바르다는 JR에게 자신의 성치 않고 노화된 몸상태를 투정하 듯 말한다. 그러자 JR은 그녀에게 “더 늦기 전에 같이 많은 사진을 찍어요”라고 다정하게 말하지만 바르다는 “더 늦기 전에”라는 말에 발끈한다. 아주 짧은 순간 거기에 어떤 설명이 부연되지 않더라도 88살인 그녀에게 머지않은 죽음을 관객 또한 의식하게 만든다. 이 죽음에 대한 사유는 그녀의 죽음 뒤에 사라질 그녀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기억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철거될 광산촌의 건물(존재)들을 그리고 거기에 붙여놓은 사진(기억)들을 생각하게 한다. 존재의 죽음과 함께 맞이할 그 존재가 가지고 있을 기억들의 죽음. 그렇지만 그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 계획을 세운다.
바르다와 JR은 다시 여정을 떠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 사람들의 공통점은 어떤 마을의 불특정 다수들이던가 혹은 노동자들이다. 두 주인공은 위인을 만난다거나 유명한 사람들을 찾아가 사진을 찍지 않는다. 그 태도는 기억이라는 측면에서 어떤 의미에 까지 도달한다. 유명한 사람들은 그들이 죽은 뒤에 많은 사람과 매체를 통해 오래도록 기억되고 머무른다. 하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잊히는 순간 사라진다. 그런 점에서 두 주인공이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찍고 벽에 붙이는 행위는 인상 깊다.
이쯤에서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바르다의 시점 쇼트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 둘은 시장에서 물고기의 사진을 찍는다. 그러다 물고기의 눈이 클로즈업되면 다음 장면에 바로 바르다의 벌려진 눈이 등장한다. 거기에 주사기를 꽂는 장면은 “안달루시아의 개”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그 뒤에 두 눈이 새겨진 목걸이가 등장하는데 이는 JR이 평소에 작업하던 사진들을 떠오르게 한다. 그렇게 영화는 바라보는 시선과 눈을 강조하는데 이는 여태껏 사람들을 찍어주던 카메라의 시선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든 걸 바라보는 영화 자체의 카메라가 갖는 시선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바르다는 내레이션을 통해 자신의 눈 건강이 안 좋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보란 듯이 그다음 장면에서 그녀의 좋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시점 쇼트가 등장한다. 이 부분은 굉장히 인상 깊은데 그녀가 자신이 보이지 않는 부분을 상세히 지시하면서 자신의 시선과 영화 속 카메라의 시선을 일치시킨다. 이것은 더 나아가 관객의 시선까지 자신의 시점으로 위치시키며 경험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뒤에 절대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 JR과 바르다가 나누는 대화는 ‘본다’라는 것을 사유하게 한다.
“흐릿한데 좋으시다고요?” JR이 묻는다. “자넨 까맣게 보면서 좋아하잖나.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른 거지.” 바르다가 답한다.
여기에 이르러 ‘본다’라는 것과 ‘기억’에 대해 생각해본다. 결국 기억이 이미지라고 생각할 때 그것은 우리의 눈, 시선을 통해 기억된다. 마찬가지로 영화와 사진도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기록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보고 기억하냐는 각자의 몫이다. 이 영화를 찍는 카메라도 또 촬영된 이미지를 보고 있는 관객도 이 영화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한다.
둘은 다시 길을 나서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는다. 그러다 바르다는 과거에 자신이 작업했던 사진을 문득 기억한다. 그리고 거기에 모델로 등장하는 오랜 친구 ‘기’를 생각한다. 바르다는 오래전에 죽은 그를 추억하기 위해 해변가 절벽에 그녀가 작업한 ‘기’의 사진을 거대하게 붙인다. 하지만 이 사진은 바다의 파도에 금방 사라져 버린다. 이번엔 사진이 사라진 뒤의 모습을 직접 보여준다. 이것은 또다시 기억의 잊혀짐과 더불어 존재의 사라짐이다. 다음 장면에서 바르다와 JR은 바람이 부는 해변에 앉아 있는다. 그리고 흩날리는 모래와 함께 그들의 존재 또한 서서히 사라진다.
영화는 그것에 대해 좀 더 고민하고 싶다는 듯 바로 다음 장면에 바르다와 JR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과 ‘마르틴 프랑크’의 묘지를 찾아간다. 그리고 거기서 그녀는 그들의 묘비에 돌을 올려놓고 그들의 작품을 떠올리며 추억한다. 묘비와 죽음 그리고 그들을 기억하려는 주인공들의 이미지는 존재와 기억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묘비를 바라보며 바르다가 이야기한다. “죽음을 많이 생각하는데 두렵지 않은 것 같아. 오히려 기다려져. 모든 것이 다 끝날 테니까.” 영화는 기억에서 시작해 다시 바르다 본인의 질문 죽음에 대해 환기한다.
영화는 다시 더 많은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 거대한 항구로 향한다. 남성 노동자들 뿐인 그곳에서 바르다는 그들의 아내를 찍는다. 그리고 당당히 서있는 그녀들의 사진을 항구의 한가운데 있는 컨테이너 탑에 큼직하게 붙인다. 각 사진들의 심장 부위에 그녀들을 올려주고 그들이 날갯짓을 하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며 바르다는 “멀리서 잘 보이지 않지만 그녀들이 새처럼 보인다.”라고 말한다. 그 사진의 존재를 통해 그녀들도 남자들만의 세계인 그 항구에서 나란히 서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 모습을 그녀는 오래도록 바라본다. 그리고 기억할 것이다.
이제 그 둘은 마지막으로 바르다의 오랜 친구 ‘장 뤽 고다르’를 찾아 나선다. 그때 바르다는 ‘장 뤽 고다르’를 유명인으로서가 아니라 그녀의 친구로서 만나기 위해 떠난다. 그 길에서 둘은 JR의 작품을 지나치는데 공장에 붙여진 두 눈은 그들을 바라보는 것 같다. 다시 잠에서 깬 그녀는 이제 ‘장 뤽 고다르’가 출현한 그녀의 단편영화를 틀어서 보여준다. 거기서 고다르는 그녀를 위해 잘 벗지 않는 선글라스를 벗어 연기를 한다. 그들이 고다르를 찾는 이유는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그와의 만남에서 그를 사진에 담아 기억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약속한 채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집 문에는 그 둘만의 추억이 담긴 비밀 암호가 적혀 있다. 그를 만나지 못한 바르다는 그 암호를 보고 마음이 상해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암호에 대한 답을 옆에 적는다. 그 장면에서 바르다의 눈물은 죽기 전 마지막일지 모를 고다르의 모습을 기억하기 위한 시도의 좌절이며 그녀가 완성하려 한 서사의 좌절일 것이다. 거기서 다시 한번 현실과 연출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고다르의 장난에 상처를 받은 바르다는 JR과 함께 호수로 간다. 거기서 JR은 “당신과 장 뤽이 나란히 글을 적었으니 그는 글들이 만났다고 생각하겠죠.”라며 그녀를 위로한다. 그럼에도 고다르의 사진을 찍지 못한 바르다는 혼란스러워한다. 그러자 조용히 JR은 고다르의 영화 대사를 읊조린다. “난 뭘 해야 할까요? 무엇을 할 수 있죠?” JR은 울고 있는 그녀를 위해 절대 벗지 않으려던 선글라스를 벗는다. 그때 카메라는 그녀의 시점 쇼트로 변한다. 그 순간 영화는 그녀의 시점 쇼트로 관객인 우리를 위치시킨다. 바르다가 보듯 우리는 선글라스를 벗은 JR의 얼굴을 마주 보지만 그녀의 좋지 않은 시력에 의해 우리 또한 그의 눈을 볼 수가 없다. 흐릿한 JR의 얼굴을 보며 바르다는 말한다. “자네가 잘 안 보이는데 그래도 자네가 보여.” 그녀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그의 눈은 그녀의 기억 속에 이미지로 남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음에도 그가 그곳에 존재함을 또 그가 그녀를 위해 안경을 벗어주었음을 안다. 그리고 그 순간은 이미지가 아닌 그 순간 자체로 그녀의 기억 속에 머무를 것이다. 그 대목에서 영화가 줄곧 이끌어온 기억은 이미지라는 의미가 뒤틀린다. 그것은 그녀가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 줄곧 사진을 찍어온 영화의 행위 즉 그녀가 믿어온 '기억한다'라는 행위에 대한 뒤틀림일 것이다. 영화는 그 대목에서 우리를 그녀의 시점에 위치시키며 우리에게까지 다른 방식으로 그 순간을 기억하게 한다. 우리의 기억에도 JR의 눈은 이미지로 남지 않지만 그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새롭지 않은 질문을 다시금 떠올려본다. '기억한다' 라는 것은 무엇일까.
마지막으로 그 둘은 호수를 바라본다. 거기서 그들은 무엇을 보았을까. 아니 무엇을 기억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