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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모임 로칸디나 Mar 12. 2019

로디즈가 만난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

빌런을 쓰러뜨려라!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 표국청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 2017, 이시이 유야

   

   어렸을 때, 다양한 색깔의 타이즈를 입고 등장하여 괴수를 물리치는 전대물의 히어로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어본다면 솔직히 그렇게 사랑하지 않았다고 답할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오히려 일본 애니메이션을 더 좋아했고 로맨스를 더 좋아했다. <지구용사 벡터맨> 시리즈의 베어를 따라 하며 놀거나 <파워 포스 레인저> 시리즈의 몇몇 에피소드를 감명 깊게 본 기억은 있으나 히어로들의 열렬한 지지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흘러가는 물의 이미지에서 도쿄의 전경이 펼쳐지고 병원에서는 사람이 죽고 주인공의 비관적인 나래이션으로 시작하는 영화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를 보고 필자가 전대물의 이미지를 떠올린 것은 어딘가 어색했다.      


   영화관에서 ‘이건 전대물인가?’라는 의문에 사로잡힌 필자는 이번 글에서 그 의문에 대한 스스로의 답을 조금 서술하고자 한다. 언제나처럼 비약적인 글이 될 것이며 누군가에게는 영화를 대하는 것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글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공간이 푸르른 것은 그 공간을 메우고 있는 사람들이 푸르름을 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을 비관하게 만드는 공간과, 결핍에 대하여     


   영화는 시작부터 주인공인 미카를 둘러싼 공간, 즉 도쿄의 여러 모습들을 보여준다. 건물들이 즐비한 야경과 곳곳의 거리들, 그 공간들을 채우고 있는 인물들과 그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는 주인공의 심경을 대변해주는 입술 클로즈업. 이미지 실험이 돋보이는 도입부는 단번에 관객을 공간의 정서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또 다른 인물.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주인공 신지.   

   

   일용직 노동자로 살고 있는 신지의 삶 또한 그야말로 비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신지의 동료는 허리가 좋지 않은 이시아카, 필리핀에서 온 안드레스, 신지에게 항상 입을 다물고 있으라고 이야기하는 토모유키. 어딘가 하나씩 부족한 이 인물들이 살아가는 세계와 미카의 세계는 아주 우연한 계기로 이어진다. 

    

   이 세계는 아주 갑작스러운 비극을 맞이하고 미카로 하여금 더더욱 사랑을 비관하게 만들고 신지로 하여금 불안한 예감을 계속해서 느끼게 만든다.     


   이처럼 영화는 시작부터 맞닥뜨리는 상황을 비관적으로 받아들이는 인물들, 아니 비관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인물들을 내세운다. 상황이 지나치게 거대한 나머지 그 거대한 상황에 짓눌리는 모양새이다.     


   이러한 비관적인 모습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몇몇 장면이 눈에 띄는데 특히나 신지가 자신의 자취방에서 달빛을 바라보며 여러 가지 부정적인 사회의 단상을 읊조리는 장면이나 데이트 중 말이 없어진 신지를 보고 토해내듯 여러 가지 사회의 비관적인 면모를 마치 랩 하듯 내뱉는 미카의 모습이 그렇다. (심지어 방사능에 대한 이야기까지 끌고 간다.)     


   이쯤 되면 도쿄라고 하는 공간 속에서 살아내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인물들은 힘겨운 상황에 쳐해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사랑을 한다는 것은 결국 정신이 나가야만 가능한, 혹은 누군가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거대한 빌런

믿는다는 것. 누군가의 존재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실 이 영화를 보는데 사랑이란 무엇일까 라는 인류 최대의 난제를 끌고 올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영화가 말하고 싶은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해서 개인적인 생각을 서술함으로써 이후의 글 전개에 도움을 받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영화는 관계 속에서의 믿음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듯하다. 이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것 자체도 사실을 도쿄라고 하는 공간이다. 앞서 강조하였던 것처럼 도쿄라고 하는 공간은 누군가에게 모든 가능성을 소진한 공간이다. 하지만 영하는 그렇기에 더더욱 믿음을 외친다.     


   직접적으로 인물들이 믿음을 외치거나 인물의 행위가 믿음을 상징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근래에 들어와 ‘이상적이다’, ‘낭만적이다’, ‘감상적이다’.라고 부르는 것들, 그러한 감정들에 대하여 인물들이 서서히 동화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관객들은 그 감정에 대한 믿음을 목격하게 된다.     

그녀의 간바레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믿게끔 만든다.

   잠시 다른 예를 끌어들여 보자면 영화는 필연적으로 8-90년대 일본의 애니메이션, 소위 아니메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사이버펑크나 SF, 아포칼립스 서사가 만연한 아니메들은 작품 속 공간과 시대관 자체가 빌런이 되는 작품들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떻게든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 인물들로 하여금 절망을 느끼게 하거나, 새로운 희망을 찾거나 혹은 아예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게끔 하는 식으로 결말을 맺는다.   

  

   특히나 절망을 느끼게 하는 방식이 필자의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상당히 많았던 것 같다. 처절히 노력하는 주인공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한 쿨의 아니메를 전부 보았을 때 그 아니메가 가지고 있는 결말은 어린 필자에게 상당히 충격이었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작품은 도쿄라는 공간을 빌런으로 상정한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그런 공간을 살아나가는 사람들은 공간에 잡아먹혀 부정적 생각을 쏟아 내거나 일탈적 행위에 몰두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사실, 공간 자체의 묘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공간을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일 텐데 영화는 그 구성원들의 모습 속에서 공간이라고 하는 빌런과 한패인 무리의 사람들을 등장시킨다. 술집에 앉아있는 신지의 귓가로 들리는 사람들의 보이스오버는 신지로 하여금 계속하여 비관적인 정서에 짓눌리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희망적인 결말을 내포한다. 이는 이 영화가 전대물이라는 생각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가게끔 만든다. 그런 공간일지라도 사람들은 결국에 마음속에 어떠한 감정, 마음이 두근두근거리거나 보고 싶다거나 운명적으로 이끌린다는, 바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그 감정을 통해 이 비관적인 공간을 어떻게든 살아나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담아낸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을 쟁취하고 보면 도쿄라고 하는 공간도 그렇게 나쁘지 않은 공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 시골집에 있던 미카와 신지가 다시금 서울로 돌아오는 행위는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한 이동이었을 것이다. 아니, 서로가 서로를 사랑해보고자 마음먹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영화는 결국 도쿄라는 빌런을 무너뜨리고 서로를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그마한 공간에서 막을 닫는다.


   결국 빌런(도쿄)이 사람들로 빼앗으려는 가치(사랑)를 끝끝내 지켜내고 나아가 그 가치에 대해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게끔 만드는 이 영화, 다양한 장면에서 전대물의 화면 분할이나 서사적 유사성을 가져온 느낌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빌런을 무너뜨린 영웅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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