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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주호 Jooho Yum Aug 15. 2023

보 물 섬  : 함께 찾은 즐거움

그가 남긴 궤짝에 손을 댄다. 그리고 거기서 종이 한 장을 손에 쥔다.
그것은 보물이 숨겨진 섬의 위치를 알려주는 보물섬 지도였다. 

짐은 의사 리지브와 대지주 트로렐리와 함께 지도를 바탕으로 보물을 찾아 떠난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 < 보물섬> 중

 

 운탄고도 1330 그 길을 처음 알게 된 건 월간산 잡지를 통해서였다. 

*월간산은 대한민국의 산을 소개하는 대한민국 대표 잡지다 


 무더운 여름,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하고 있었다. 덥고 습한 날이 계속 이어졌고, 그날따라 사람이 굉장히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답답했다.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출근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뜩 가방 속에 잡지가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구석으로 가서 잡지를 천천히 읽어가기 시작하다 운탄고도 1330이라는 길을 소개하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운탄고도 1330은 영월 청령포에서 출발해서, 삼척 소망의 탑까지 이어지는 길로, 그 길 위에서는 지금은 사라진 작은 마을들과 역들, 그리고 탄광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영월, 정선, 태백 그리고 삼척으로 이어지는 이 길은 총거리는 173.2km, 최고 높이는 1330m의 트레킹을 위한 길이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 길을 달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거리도 173km 라니, 나를 위한, 100마일 트레일 러닝을 위한 길 같았다. 마치 보물지도를 찾은 기분이었다. 지금이라도 지하철을 내려서 보물을 찾으러 떠나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러지 못했다. 언젠가는 그 길을 달리겠다는 마음을 잘 접어서 가슴 한편에 두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세이브더 아일랜드: 석모도를 달리며 지속 가능성에 대한 고민과 시간변화에 따른 자연을 만끽할 수 있었다.


 교정이는 작년 겨울 세이브더 아일랜드 석모도 프로젝트에서 함께 달리며, 만나게 되었다. 

*세이브더는 트레일 러닝으로 여러가지 환경문제를 풀어보고자 고민하는 환경 단체이다


 그렇게 알게 된 교정과 인연은 올해 초 SCARPA KOREA의 선수로 활동하면서 이어졌고, 많은 대회와 Sea to Summit : 속초에서부터 대청봉까지 달리는 프로젝트를 통해 깊어졌다. 함께 하는 시간을 통해 달리기에 대한 순수한 교정이의 마음과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그가 가진 장거리 러닝에 대한 동경을 느낄 수 있었다.

속초 바다에서부터 설악산 대청봉까지 달리면서 봤던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11월 초, 그렇게 교정이와 나는 운탄고도 1330으로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설레었다. 마치 보물을 찾으러 떠나는 기분이었다. 트레일 러닝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If you want to go far, go together / 멀리 가고 싶다면 함께 가라

더 즐거운 모험을 위해, 긴 거리를 완주하기 위해 동료들을 모우기 시작했다. 장거리 트레일 러닝은 러너 혼자만이 하는 운동은 아니다. 러닝 메이트와 서포터가 한 팀이 되어야만 완주할 수 있다. 


나의 6번째 100마일 트레일 러닝 

그리고 3번째 New 100miler 프로젝트의 성공


 트레일 러닝은 로드 러닝과 다른 매력이 있다. 특히 장거리 트레일 러닝은 그 차이점이 더욱더 극명하게 나타난다. 사실 장거리 트레일 러닝을 하게 되면, 빠르게 달리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보통은 6~7분 페이스로 달리거나, 빠르게 걷는 구간도 많다. 그렇기에 많은 대화를 할 수 있고, 주변 경치도 구경할 수 있다. 트레일 러닝을 통해 자연을 온몸으로 느끼고, 배워간다. 그래서 점점 빠져들게 되었다.


 트레일 러닝을 시작한 지 3년이 된, 2019년 4월 나는 상국, 예석과 함께, 서울 둘레길을 통해 첫 100마일(160km)을 완주했다. 30시간이 넘게 달린 건 처음이었기에 너무나 힘들었다. 하지만 완주의 성취감은 도전 과정에서의 고통을 보상하기에 충분했다. 첫 100마일은 Tomo라는 일본 트레일 러너 친구의 도움이 컸다.


 Tomo는 100마일을 100번 달리는 프로젝트를 진행할 만큼, 엄청난 실력의 소유자였다. 완주 후 Tomo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었는데, 그는 나보고 언젠가 누군가가 100마일을 달릴 수 있도록 도와주면 어떠냐고 제안했었다. 그에게 느낀 고마움이 컸기에, 나도 누군가의 100마일을 돕고 싶었고, 그래서 일 년에 최소 한번 이상은 누군가의 100마일을 돕는 New 100miler 프로젝트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New 100miler 프로젝트는 100마일을 달려보지 않은 누군가와 함께 첫 100마일을 달리는 프로젝트이다. 페이서(Pacer maker)라기 보다는 러닝 메이트(Mate)에 가깝다. 100마일 함께 달리며, 다른 친구를 돕고, 그 과정에서 감동을 나누는 프로젝트이다. 장거리 트레일 러닝을 좋아하는 나로썬 이 프로프로젝트 한다는 것이 너무나 큰 기쁨이다. 그래서 교정이와 함께 New 100miler 프로젝트를 운탄고도 1330을 통해 도전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더구나 이제 곧 나 자신이 바다로 나가지 않은가. 스쿠너를 타고 호각을 부는 갑판장과 노래를 부르며 일하는 머리 땋은 선원들과 함께, 바다로, 미지의 섬을 향해,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 < 보물섬> 중



 아침이 밝았다. 붉은 태양이 떠오르며 간밤의 추위를 달래었다. 뺨을 스치는 바람의 온도가 포근했다. 드디어 출발할 시간이었다. 교정이와 천천히 호흡을 맞춰 달려가기 시작했다.


 달리면서 만난 운탄고도의 모습은 정말 인상 깊었다. 특히 영월에서 봤던 모습은 잊을 수 없었다. 깎아지는 절벽으로 이루어진 높은 돌 산들이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었고, 추수가 끝났지만 빈 논은 아직 황금빛이 남아 있었다. 달리며 본 간간이 날아가는 새들과 고요히 흐르는 계곡의 물은 너무나 평화로 왔다. 


온몸으로 운탄고도 1330을 즐기며 그렇게 우리는 함께 달려나갔다.


 그뿐 만이 아니었다. 침엽수가 만들어낸 낙엽 위를 달릴 땐, 마치 카펫 위를 달리는 기분이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부드러움이었다. 오르막길이었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았고 온 신경을 발끝에 집중해서 조금이라도 그 부드러움을 더 느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쉼 없이 달려나갔고, 이윽고 밤이 되었다. 완벽한 어둠의 하늘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었고, 달리다 지쳐 잠시 바닥에 누워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본 순간, 그동안의 힘듦을 위로 받을 수 있었다. 도시에서는 별들을 잘 볼 수 없었기에, 헤드랜턴까지 끈 채로 그 순간을 온전히 즐겼다. 바람이 찼다. 그래서 별들은 더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날 밤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함께한 저녁 식사는 너무나 좋았다. 음식도 맛이 있었다. 

벤 건이 준비한 소금에 절인 고기에다 히스파니올라 호에서 가져온 오래된 포도주 한 병이 있었다. 

모두들 그때만큼 즐겁고 행복한 적은 없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 < 보물섬> 중


 장거리 트레일 러닝을 위해선, 가장 중요한 것이 보급이다. 보급은 일반적으로 10km에서 20km 사이에 CP(check point)를 설치하고 잠시의 휴식과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한다. 그렇기에 CP는 없어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어디서 보급을 할 것 인지와 CP에서 어떤 음식을 먹을 것 인가에 대한 계획이다.

CP는 우리에게 집 같은 존재였다. 도착하면 안도감과 함께, 긴장이 풀렸다.


 “장거리 트레일 러닝은 먹은만큼 간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잘 먹어야 갈 수 있다.   

힘들게 달리다가 CP에 도착하면 맛있는 음식과 서포터가 기다리고 있다. 그동안 힘들게 달린 부분이 다 보상받을 수 있는 시간이다. 보통은 CP에서는 10분 정도 쉬는데, 후반부에서는 좀 더 오랜 시간을 쉬었던 것 같다. CP에서의 시간은 마치 주말과 같이 쏜살같이 흘러간다. 짧은 휴식이 언제나 아쉬웠지만,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기에 멈출 수 없었다.


그 해 겨울은 정말 추웠다. 차디찬 서리는 시간이 가도 녹을 줄을 몰랐고, 

세찬 눈보라는 쉴 새 없이 몰아쳤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 < 보물섬> 중


 장거리 트레일 러닝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제각각 다르지만, 보통은 트레일 길을 처음부터 끝까지 멋지게 달릴 것이라고 상상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의 장거리 트레일 러닝을 하면서 느낀 점은, 살아있음과 죽음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묵묵히 버티고, 또 버텨내는 것이다. 겨우 숨만 쉴 수 있을 정도의 에너지로 버티고 또 버티는 시간들이 대부분이다. 

추운 바람과 졸음은 우리를 지독하게 괴롭혔다. 하지만 버텨내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특히 이번 운탄고도는 혹독한 날씨 때문에 더 힘들었던 것 같다. 초 겨울이라 크게 추울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는데, 밤이 되면서 불어오는 바람은 온몸을 굳게 만들었고, 추위로 인해 쉬는 시간에도 제대로 쉬는 게 아니었다. 차가운 바람으로 인해 호흡할 때마다 폐 속이 시렸고, 혈관을 따라 냉기가 온몸으로 펴져나갔다. 바들바들 떨렸다. 추위로 인한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그나마 잠시 쉬면서 마시는 따뜻한 차만이 그나마 나를 녹여주었다.



트렐로니 지주는 키다리 존 실버라는 은퇴한 선원의 도움을 받아 기적적으로 선원들을 모두 모은다. 

존 또한 바다 생활이 그리웠다며 배의 조리사로 합류하고, 스몰릿 선장의 지휘 하에 

히스파니올라 호는 보물섬을 향해 출항한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 < 보물섬> 중


 장거리 트레일을 달리는 계획을 짜면서 또 하나의 중요한 부분은 동료를 모우는 일이다. 우리는 그 동료를 서포터라 부른다. 서포터는 CP를 운영하고, 차량으로 필요물품을 보급해 주고, 전체적인 스케줄 관리와 비상시에 문제를 해결해 주는 친구들이다. 이번 운탄고도 1330 100마일도 다르지 않았다.


함께해 준 그들이 있었기에 비로서 이 긴 거리를 달릴 수 있었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집에 돌아가는 시간까지 함께해 준 예지, 촬영을 맡은 홍석, 응원과 러닝 메이트로 함께한 민철과 지현, 그리고 차량 서포팅과 운영을 도와준 굿러너 컴퍼니의 태우와 영준까지. 모두의 도움 덕분에 완주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굿러너컴퍼니는 국내 달리기 문화의 확장과 트레일 러닝 문화의 정착을 위해 여러 도전을 하고 있다.


 특히 이번 운탄고도 1330의 경우 처음 달려보는 코스라 중간중간 헷갈리는 구간이 있었는데, 영준과 태우의 든든한 지원 덕분에 길을 잃지 않고 완주할 수 있었다. 이 자릴 빌어 함께해 준 서포터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나는 동굴 한쪽 구석에 엄청난 양의 동전과 금괴 더미가 불빛을 받아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저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까지 찾아 헤맸으며….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 < 보물섬> 중


드디어 끝이 났다. 완주했다는 안도감 그리고 시원 섭섭함과 아쉬움의 감정이 공존했다.

 토요일 아침 7시에 시작했던 달리기는 일요일 오후 3시가 다 되어서야 끝났다. 32시간 동안 183km를 멈추기 않고 달려 마침내 도착했다. 

*산불조심기간으로 인해 일부 구간을 우회했기에 거리가 더욱 길어졌다. 


 즐거운 시간이었고, 또한 지독하게도 힘든 시간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에선 아쉽게도 보물은 없었다. 여는 대회처럼 완주 메달이나, 완주 재킷 그리고 트로피 그 어떤 것도 없었다. 다만 함께한 추억이 가슴 깊이 남아 있었고, 함께 힘든 시간을 나눈 교정, 예지, 태우, 홍석, 민철, 지현 그리고 영준이와의 우정이 남았다. 그래서 다음 모험을 떠날 용기가 생겼다. 


 충분히 힘들었고, 충분히 즐거웠다. 그래서 나는 다음 모험을 또 떠나고 싶다. 벌써부터 설렌다.


*이번 프로젝트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준 스카르파 코리아측에 다시 한번 고개 숙여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영상 촬영을 위해 도움 준 고프로 코리아측에도 감사함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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