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아버지께 맡기고 나도 스키를 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스키를 즐기지도 잘 타지도 못하는 내가 괜히 방해가 될 것 같아 타지 않기로 결심을 했다. 스키를 타지 않으니 딱히 할 일도 없다. 스키 타는 사람들은 스키 타도록 놔두고 어린 조카, 어머니, 동생, 올케와 함께 눈썰매를 타기로 했는데, 이도 여의치가 않다. 바람이 부는 탓에 가족이 함께 타는 썰매장까지 가는 유일한 방편인 곤돌라가 운행을 중지했다. 할 일이 없이 그냥 숙소에서 쉬자니 아버지께 애들 맡겨놓고 마음이 편치 않아 스키하우스에서 가족들이 잘 내려오나 바라보고 서있었던 것이다. 망부석이 따로 없다.
작은 아이가 내려오는 건 종종 찾아내는데, 큰아이가 내려오는 건 매번 보질 못한다. 아래위로 시커먼 옷을 입혔더니 찾기가 어렵다. 아버지도 위아래로 차콜색의 옷을 입으셔서 영 눈에 띄지 않는다. 그나마 눈에 띄는 옷을 입은 막내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가는 바람에 보이지도 않는다.
올라간 지 한 참이 된 거 같은데 내려오질 않으면 괜스레 불안한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어디냐고 전화를 해댈 수도 없고, 따라가자니 짐이 될까 걱정이고, 마냥 기다리자니 할 일 없이 떠오르는 이런저런 생각에 심란하다. 혹여나 안전요원 뒤에 실려 내려오는 사람이 있을 때는 목이 빠져라 내어 빼고 살펴보게 된다. 혹여나 아버지가 아닐까 염려가 컸다. 평소 운동도 즐기시고 스키도 꽤 오래 타오셨고, 또 당신께서 그렇게 자신 있어하시니 말리지 못하고 그냥 안전하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괜스레 걱정되는 것이 하나 더 있으니…. 막내동생과 오붓하게 긴 슬로프를 타러 가셨는데 돌아온 아버지의 손에는 스키 폴이 하나밖에 없는 게 아닌가. 내려오다가 잃어버리셨단다. 어떻게 하면 스키 폴을 잃어버리나… 의아했다. 다시 찾으러 간다고 올라가 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스키 폴이란 게 사실 초보들은 필요가 없다. 그냥 스키 벗을 때 사용하거나, 일어날 때 쓰기도 한다. 찾아봤던 유튜브 강의에서도 초보는 폴을 쓸 일이 없다고 말한다. 문제는 아버지가 초보는 아니라는 거다.
폴대 때문에 렌탈샵에 알아보러 가보라고 말씀하셨다가 '아니다 말아라' 하시길를 몇 번이나 하셨다. 그때마다 고민을 하긴 했다. 대여소에 내려가볼까 하다가 물어달라면 어쩌지… 물어달래 봐야 스키 폴이 얼마나 할까 싶었지만, 싫은 소리 들을까 봐 발길이 떨어지질 않는다. 그냥 하나 슬쩍 가져와야 하나… 생각도 했지만, 생각보다 쫄보인 나는 그런 대범한 짓은 하질 못한다. 폴은 굳이 없어도 타기는 하는데… 고민을 거듭했다. 그 고민은 폴대를 하나로만 가지고 스키 타신 지 4시간 만에 겨우 해결됐다. 결국 아버지가
“니 안 바쁠 때 폴대 좀 가져와라.”라고 하신 말씀에 내가 움직였다. 도저히 불편해서 안되셨나 보다. 그냥 가만히 서서 아이들 잘 내려오나 바라보고 서있는 내가 바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위약금이 있을까… 한 3 만원정도 할까… 좀 더 일찍 알아봐 드릴걸 그랬나… 어린애들 강습받는 거 보니까 아예 안 가지고 가는 팀도 있던데… 그래도 아버지는 없어서 아쉬운 티를 몇 번이나 내셨는데… 나 민망하다고 알아보지도 않고 내가 너무했나…. 이런저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살짝 긴장하며 대여소 직원을 마주했다.
“저…. 스키 폴 하나를 잃어버렸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참하게 생긴 대여소 총각이 너무나도 친절하게 상관이 없다고 한다. 하나 새로 가져가도 되냐는 물음에 눈부신 미소로 화답하며 그러시란다. 차라리 직원이 싫은 티라도 내줬으면 덜 머쓱했을까… 폴대 한 짝 들고 스키하우스로 올라가며 이렇게 간단할 일이었다면 좀 더 일찍 내려와 볼걸 후회스럽다. 아쉬워하는 걸 눈치 못 챈 것도 아닌데… 아이들이 폴을 잃어버렸어도 이렇게 뭉그적 댔을까!!! 잃어버린 폴대에 너무나도 친절한 직원의 태도에 나는 천하의 불효녀가 된 것만 같다.
화려한 조명으로 고요한 밤이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스키장이 고요해졌다. 아이들이 잠들러 들어가고 고요해진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자니, 아버지가 나를 불러 옆에 앉아보라고 하신다. 나는 살짝 경계한다. 저렇게 불러 옆에 앉혀놓고 잔소리 늘어놓으신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되도록이면 도망갈 수 있는 적정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쭈뼛쭈뼛 다가가자
말씀하신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얼른 생각이 떠오르질 않았다. 사실 예상 레퍼토리는 ‘너는 나이도 젊은것이 왜 스키 안 탔냐’, ‘비싼 돈 들여 강습도 시켜줬는데 젊은 애가 왜 이리 도전 정신이 없냐’, 잔소리하실 줄만 알고 경계했다. 거참, 스키장에서 아버지가 자꾸 내 예상을 빗나가게 하신다. 애들 아버지께 맡겨놓고 혼자 따뜻한 데서 쉬자니 맘이 편치 않아서요… 애들이 잘 내려올까 내 눈으로 확인하려고요… 안전요원들이 부상자들 태워 내려오면 아버지일까 걱정돼서 자리를 못 떠났어요…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뭐라 대답할지 결정은 못하고 그냥 멋쩍어 괜한 물만 들이켰다.
아이들이 잘 내려 오나 살피긴 했지만, 사실은 아버지가 제일 걱정돼서 안전요원들이 누군가를 실어 내려올 때면 제일 마음 졸이며 목을 내 빼었던 望父石이었노라 말하려다 그만 두었다. '별걱정 다하고 있다'고 하실게 뻔하지만, '하기사 이제 나도 늙긴 했지' 말씀하실까봐. 그 말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니까. 그냥 어미노릇만 열심히 한 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