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희 Nov 24. 2023

아무튼, 떡볶이를 읽고

'아무튼, 떡볶이'를 읽었다.


글자를 읽는 것을 무척 힘들어하는 내가 어떤 책을 이토록 후루룩 읽은 게 얼마 만이더라.


(대작가)요조는 (역시 대작가)장강명으로부터 '떡볶이'에 관한 글을 쓰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는다.


"요조님 떡볶이 좋아하시잖아요."라는 말과 함께.


책 속 떡볶이를 사랑하는 사람의 유형은 두 가지로 나뉜다.


1. 떡볶이에 좁고 깊은 사랑을 가진 사람 : 떡볶이를 너무나 사랑하여 본인이 바라는 이상적 떡볶이의 형태를 설정하기에 이르렀다. 누구는 쌀떡만이 진정한 떡볶이라 말하고, 누구는 밀떡의 탱글한 맛을 부정하는 이들은 다 사파라고 말하며 '떡볶이 원리주의자'의 모습을 보인다.


보기 좋은 적당한 호들갑. 남들이 보기엔 별것도 아니지만 본인이 진정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호들갑을 부르르 소리가 날 만큼 떨어대는 것이다. 그 (부끄러움이라는 것이 제거된 듯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귀엽기도 하고 무언가에 대해 열변을 토해낼 수 있는 열정이 부럽기도 하다.


2. 떡볶이에 넓고 따뜻한 사랑을 가진 사람 : 떡볶이를 너무나 사랑하여 '떡볶이'라는 정체를 가진 존재라면 무엇이든 환영하는 사람들. 아무리 하기 싫어하는 일도 떡볶이로 꼬시면 넘어오는 사람들. 밀떡이든 쌀떡이든 묽든 걸쭉하든 빨간 떡이기만 하다면 충분하다는 사람들이다.


둘의 공통점은 유독 우울하고 힘든 날도 붉고 자박한 양념이 묻은 떡을 입 안에 넣고 오물거리면 내일을 살아갈 최소한의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무언가에 그리도 따뜻한 사랑을 내보일 수 있는 사람들은 그 무언가를 다루고 있을 때 참을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워지고 세상에서 가장 무해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돈가스를 너무나 사랑하는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기 위해 돈가스집에 가자고 거짓말을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아이는 곧 버석거리는 돈가스를 썰어 달큰짭짤한 소스에 듬뿍 담가 입안 가득 넣고 우물댈 수 있다는 희열을 느끼다가 어느새 병원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그는 슬픔과 좌절과 공포와 배신감을 한 번에 느끼게 된다. 아이는 눈물을 흘릴 수도, 비명을 지를 수도, 치과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칠 수도 있으나, 어쩌겠는가? 이미 통발에 들어서고 만 것을. 결국은 병원 치료를 받게 된다.


너무나 어린 나이에 기망행위로 인한 사기 범죄를 당하게 되어 큰 충격을 받았을 테지만 이내 만족할 만한 보상이 이루어진다. 병원에서 나온 아이는 돈가스를 먹을 것이기 때문. 불과 몇 분 전까지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처럼 좌절하였으나 언제 그랬냐는 듯 행복한 얼굴로 돈가스를 우물거린다.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마음은 고통과 충격을 씻어낼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누군가 '너 이거 좋아하잖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나에게도 있을까. 그만큼 내게 끊이지 않는 시선을 보내는 사람도 없거니와 있다 하더라도 '타인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좋아하는 무언가' 라는 건 없는 것 같다.


누군가 내게 "너는 가장 좋아하는 게 뭐야?"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늘 끙끙거리며 대답하지 못했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뭐야?"라며 질문의 폭을 좁혀줘도 반응은 같았다. 한 번도 명확한 답변을 하지 못했다. '가만있자... 당장 떠오르는 건 A, B, C... 세 영화... A라는 영화는 너무 대중적이고, B는 배우들의 연기가 아쉽고, C는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기엔 반복해서 본 횟수가 너무 적고... 아, 섣불리 대답했다가 더 좋은 영화가 떠오르면 어쩌지?'


이런 생각은 삶을 대하는 태도에도 묻어난다. 평일을 보상받을 수 있는 주말이 되면 나는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 가장 행복할 수 있을지 깊은 고민에 빠진다. 저녁을 뭘 먹을까. 정말 맛있는 걸 먹고 싶은데. 술을 한잔하며 영화를 볼까. 술은 뭘 마셔야 하지. 영화는 무엇을 봐야 하지. 아니, 드라마를 볼까. 아냐 아냐 유튜브를 보는 게 나을까.


결국 무엇 하나 진득하게 먹지도, 마시지도, 보지도 못한 채 주말 밤이 지나가고 만다.


나는 이제 삼십 대가 되었고 이십 대 때 막연히 상상하던 '여유롭고 멋있는 나'와는 정반대의 인물이 되었다. 대학 졸업을 포기해 가면서 10년 넘게 해오던 일이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조금만 버티면 어려움이 해소될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더 이상 버틸 여력이 남아있지 않다. 지금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새로운 시작이 두렵기만 하다. 누구나 이러한 경험을 해보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패색이 짙어진 무언가를 손에 꽉 쥔 채 한 자리에서 고여가는 것이다. 결정에 대한 두려움과 과거에 대한 미련 때문이다.


오락실 게임기 앞에 앉아 주머니 속 한 개의 동전을 만지작거리는 기분이다.


'이제 마지막 판이야. 이번에도 죽으면 진짜 끝이라고'


하고 싶은 것, 할 때 재밌는 것, 잘하는 것은 있다. 그러나 많은 것들을 포기해도 좋을 정도로 하고 싶은 것, 너무 재밌어서 하루 종일 해도 질리지 않는 것, 남들보다 월등히 잘하는 것은 없다. 많은 갈림길 중 하나의 길을 선택한 뒤 중간지점에 다다라 다른 길로 갔어야 한다며 후회하지 않을 자신도 없다.


떡볶이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맛이 엉망인 떡볶이를 맞이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들은 바라지 않는 태도로 그 순간을 넘긴다. 그저 떡볶이를 사랑할 뿐 떡볶이로부터 무언가를 돌려받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아, 오늘 떡볶이 진짜 맛없었다"


끝. 


바란 것이 없기에 망설임 없이 선택할 수 있었고 절망감 없이 떠난다.


친구로부터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니"라는, 2000년대 드라마 대사 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한 답변을 수정하고 싶다. 사랑은 바라지 않는 것.


누군가를 사랑할 때도, 내 인생을 사랑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선택이 잘못된 결과를 불러올 수는 있으나 좌절할 필요는 없다. 바라지 않았으니까. 떡볶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무슨 떡볶이를 먹을까? 고르는 흥미진진한 순간에, 아무튼, 떡볶이를 먹었음에 기뻐하면 되는 것 아닐까, 싶다.


결과물이 좋지 않아도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자기 최면이자 자기 위로일 뿐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내가 무언가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시도하는 것이 반드시 결실을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려 노력한다.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는 동안 눈앞의 떡볶이가 불어 터질 수도 있기에.


아무튼, 떡볶이를 먹었으면 됐다는 자세로.

작가의 이전글 친구가 없어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