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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차희 Feb 23. 2023

길은 어디에나 있다

6:13am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지하철 엘리베이터를 탔고 몇몇 사람들이 내리자 남은 한 여성이 어디로 가냐고 물었다. 나는 부천으로 간다고 대답했고, 그 여자는 갑자기 안경을 쓰더니 이전에 없던 야무진 얼굴을 하고 같이 나탈리 웨어 세일전에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700번 버스를 타고 900번을 갈아타면 있는 곳이라고 했다. 모바일로 찾아줘서 보니 예쁜 옷을 파는 곳이었다. 나는 왜인지 이 사람의 추진력에 이끌려 같이 가겠다고 따라갔다. 이렇게도 만날 수 있는 관계라니, 신이 나 명함을 달라고 했다. 가면서 주겠다며 우선 길을 떠났는데 지도를 보니 너무나도 먼 곳이었다. 퇴근 후에 두 버스를 타고 옷을 사러 가겠다니. 나에게 가능하지 않을 일정이었다. 아무래도 못가겠다고 말하자 그분은 나탈리 웨어라는 곳에 전화해 오늘 영업이 몇 시까진지, 세일은 언제까지 하는지를 물었고, 우리는 지금 가도 세일전의 기회를 맛볼 수 없다는 걸 알게됐다. 아쉬웠지만 내심 좋았다. 그 분은 언젠가 다시 만날 것처럼 하며 명함을 주지 않은 채 쿨하게 떠났다. 이제 집에 가볼까 하며 버스를 찾는데 버스까지 가는 길이 카카오맵에서 제대로 뜨지 않았다. 아주 꼬불꼬불하고 지도에서도 제대로 찾기 어려운 길이었다. 어플에서도 오류가 나고 가려고보면 길은 막혀있었다. 사람들에게 1800번을 타려면 어디로 가야하냐고 물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너무 지쳐 있었는데 우연히 조안나와 샐리를 만났다. 조안나는 길을 잘 아는 친구였고 샐리는 그의 동생이었다. 길을 잃었는데 길에 능통한 사람을 만나다니! 조안나는 역시 바로 길을 알려줬고 나는 그 길대로 갔는데 다시 또 길이 아닌 곳에 도착했다. 조안나도 틀린 길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조안나도 틀릴 수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조안나는 다시 새로운 길을 알려줬고 그 길을 우리는 같이 걸었다. 원래부터 같은 길이었는지, 나를 위해서 그 길을 택해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조안나와 샐리에게 아까 만난 사람과 어떤 일이 있었고, 길을 엄청 헤맸다는 이야기를 평소처럼 재잘재잘 얘기했다. 조안나와 샐리 역시 평소처럼 잘 들어줬다.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혼자 사는 집에 도착하고는 꿈에서 깼다. 


어제는 같은 편집디자이너이자 콘텐츠 에디터로 투잡을 하고 있는 모모를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지라 그간의 고민, 우리의 변화들에 대해서 쉴새없이 떠들었는데 나는 모모를 만날때면 디자이너로서의 수명, 이후의 삶에 대해 항상 나누게된다. 둘 다 두 개의 일을 하고있는지라 새롭게 만나게 된 세계에 대해서도 나누었는데 모모는 새로운 세계와 부딪히고 있었다. 본인과 가치관이 달라 대화가 쉽지 않은 점, 생각이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게 이상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느끼고 있었다. 나 역시 새로운 세계를 만나며 내가 쉽게 열정을 갖고 쉽게 사그라든다는 것, 잘하는 일도 맘이 편하지 않으면 하고 싶지 않다는 것, 한 가지 일에 대한 대표성이 없고 이것저것 여러 가지는 시도해봐도 덕후처럼 꾸준히 한 우물만 파는 성격이 아닌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며 나의 불안을 나눴다. 모모도 우리는 원래 그렇게 타고 난 사람인 것 같다며 크게 공감했다. 사실 모모는 두 개의 일에 더해 공동체까지 운영하고 있기에 세 개의 일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옆에서 공동체의 시작부터 지켜 본 나는 차근차근 넓어지고 깊어지는 공동체의 모습만으로 잘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속에는 모모만의 고민들이 있었다. 고민이 있다는 건 오히려 건강한 공동체의 모습 같다고 생각했다. 나도 그 공동체에 참여 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공동체 일원 중 한 사람이 부모님과 거리를 두는 게 필요하지만 독립을 꿈꾸긴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 사람의 안부를 물으니 좋은 쉐어하우스를 만나 6개월간 지내다 얼마 전에 독립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그때만해도 막막해보였는데 공동체원의 그런 과정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일이 행복했겠다고 얘기했다. “모모, 길은 어디에나 있네요.” 모모는 옆에서 보면 길이 이어져있는데 본인은 잘 모르기 쉬운 것 같다고 대답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길이 그냥 주어진 게 아니라 옆에서 모모와 다른 공동체원들이 함께해서 길을 낸 것 같다고. 그런 의미에서 길은 어디에나 있을 것이다. 조안나와 샐리 덕분에 무사히 집에 도착한 나처럼 말이다.



2023년 2월 17일 금요일


길은 어디에나 있다, 6:13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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